27화. 드러난 비밀 3
* * *
발리안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자가 죽는다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들이 어찌 알겠나?”
그제야 호독니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
“이 일을 사주한 놈에게 우릴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일러 줄 것이다. 이자를 훈련장으로 끌고 가라.”
발리안의 명에, 곁에 서 있던 군사가 묶인 줄을 풀고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사내가 군사들에게 끌려가는 걸 본 효령이 외쳤다.
“저 사람을 어쩌려는 거예요, 대장?”
“효령을 처소로 데려가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밖으로 못 나오게 해.”
“대장, 대장!”
애타는 효령의 부름을 외면하고 발리안은 감옥을 빠져나갔다.
* * *
“도독 어른. 도독 어른.”
한 관리가 위주 관사의 정청으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 이마는 땀 범벅에 머리에 쓴 관모도 삐뚤어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냐?”
“어제 삭주에 들어갔던 자가, 그자가…….”
낯빛마저 허옇게 질린 그는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어제 거기 들어간 자들이 어쨌다고? 벌써 연락이라도 온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지,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것이…….”
관리의 재촉에 위주 도독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관사 마당에 내딛던 위주 도독의 발이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더럭 숨이 막히며 목이 죄었다.
호위무사로 위장시켜 아는 상단에 끼워 넣은 자의 수가 열다섯. 그중 한 사람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소가 끄는 우차 위에 윗옷이 벗겨진 채 정신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차마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다. 여기저기 너덜너덜 떨어져 나간 살점과 몸에 패인 무수한 채찍 자국.
그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족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위주 도독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 몸 한가운데 커다랗게 새겨진 검은 글자.
다음은 너…….
그 선뜩한 문구에 거기 선 모두가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이, 이자 혼자 돌아온 것이냐?”
묻는 위주 도독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차 곁에 서 있던 군사가 대답했다.
“그건 저희도 잘……. 오늘 새벽, 기탄 군사들이 직접 와 이자를 우리 쪽 군사들에게 넘겼습니다. 반드시 위주 도독께 전하라 하면서요. 저기 삭주를 책임지는 대도위의 서신도 들어 있다 했습니다.”
군사가 우차 한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가리켰다.
“어서 여, 열어보아라.”
위주 도독의 명에 군사가 상자로 다가가 그 뚜껑을 열었다.
“으악!”
위주 도독이 비명을 지르며 그예 바닥으로 넘어졌다.
거기에는 돌아온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열네 명의 목이 들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머리 위에 피로 물든 서신이 놓여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역한 피비린내에 모두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위주 도독 곁에 서 있던 관리가 군사에게 명령했다.
“그, 그걸 이리 가져오너라.”
그가, 혼비백산한 위주 도독을 대신하여 군사가 가져온 서신을 읽어 내렸다.
“뭐, 뭐라 써, 써 있느냐?”
위주 도독이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물었다.
“그것이….”
망설이던 관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 다시 한번 이런 짓을 벌이면 그땐 위주 도독께서 저자와 같은 꼴이 될 거라고. 위주 도독의 배후에 있는 자에게도 이 사실을 똑똑히 전하라 그, 그리 적혀 있습니다.”
일체의 존칭과 안부를 생략하고 단 몇 줄의 경고만이 적힌 서신.
그 무례하고 무시무시한 서신에 위주 도독은 끝내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 * *
효령이 방안에 갇혀 지내는 사이, 호시가 끝이 났다.
그동안 발리안은 단 한 번도 처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삭주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서야 효령은 자신을 찾아온 시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갑갑했지? 이제 그만 나와도 돼. 미안. 나라도 진작 와보고 싶었는데 대장이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해서.”
“그 사람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시타?”
“널 잡아가려다 잡혔다는 놈?”
효령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주로 돌려보냈다던데?”
“정말요? 그 사람 정말 무사히 돌려보냈어요?”
“어? 어…….”
시타가 어딘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인데요? 설마…… 돌려보냈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아니. 진짜 살려서 돌려보냈어. 두 번 다시 검을 들지는 못하겠지만.”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타? 네?”
효령이 시타의 팔을 붙들었다.
“듣지 않는 편이 좋아. 이럴 줄 알고 대장이 그동안 널 못 만나게 한 거라고.”
“아니, 알고 싶어요. 말해 줘요, 시타.”
“젠장! 왜 난 너만 보면 거짓말을 못 하겠는지 몰라.”
시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그냥…… 우리 식대로 벌을 받았어. 어쨌든 지금 삭주는 기탄 영토고 거기 무단으로 침입한 거니까. 원래 첩자는 살려두지 않아. 그나마 너 때문에 목숨을 건진 거야, 그 사람.”
“무슨 벌을 받았는데요?”
“채찍형. 대장이 직접 때렸어. 대장 아닌 사람이 때리면 바로 죽거든.”
예전에 발리안이 휘두르던 채찍을 떠올린 효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사람에게 휘둘렀다고요? 사람에게……?”
시타가 꾸욱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발리안의 채찍은 일반적으로 동물을 다룰 때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다.
끝에 쇳조각이 박힌 발리안의 채찍은 먼 거리에 있는 적을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뜨리고 뼈를 바스러뜨렸다. 거기 엄청난 수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그 채찍이 가장 두려운 건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였다. 그만한 길이와 무게의 채찍을 휘두르고도 상대를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원하는 강도로 맞추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대신, 그 채찍은 죽음 이상의 고통을 남겼다. 살가죽과 근육이 터지고 뼈가 갈라졌다. 핏줄이 삐져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창자가 드러나기도 했다.
발리안의 채찍에 맞은 자들은 열이면 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었다.
차마 그 말만은 할 수 없어 시타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효령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잡아가려던 자들이 고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죽거나 고통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들을 사주한 형부 상서 맹유천이 아니던가.
맹유천, 그는 사람도 아니었다. 효령 자신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것은 호시에 참가한 안야국 상인들이었다. 절 잡자고 그들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은 맹유천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말문을 잃은 효령을 두고 시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건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호독니가 왜 널 싫어하는 줄 알아? 호독니도 알아. 네가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너만 보면 질색하는 건…….”
“…….”
“호독니는 네가 대장을 변하게 만들까 봐 두려운 거야.”
효령이 힘없이 눈을 들었다. 시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대장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런데 넌 아냐. 넌 대장을 두려워하지 않아. 제일 약해 보이는 녀석이 대장 눈을 똑바로 들여다봐.”
“오해예요, 시타. 나도 대장이 두려운걸요.”
“아니.”
시타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넌 모르겠지만 우리 눈엔 보여. 너도 대장만큼이나 특별한 녀석이라는 게. 그래서 하는 부탁이야. 대장을 바꾸려고 하지 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면 대장은 초원에서 살 수 없어. 거긴 짐승들의 땅이야.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네가 원하는 게 대장의 죽음은 아니잖아?”
“시타.”
“이쯤에서 너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할지…….”
시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효령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타?”
“아마 대장은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거야. 언제든 초원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땐 어떡할래? 여기 남을 거야, 대장을 따라갈 거야?”
시타의 질문에 효령이 얼어붙었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초원은 여기와 완전히 다른 세계야. 모든 게 부족해. 초지는 적고 먹일 가축은 많아. 원하든 원치 않든 선택해야만 해. 내 식구들을 죽게 할 것인지 남을 죽일 것인지.”
“…….”
“대장은 우리 중 누구도 아파서 죽게 놔두거나 굶기지 않았어. 그럴 만한 땅도 지위도 없는 사람에게 그게 쉬운 일이었을 것 같아?”
“…….”
“초원에서의 삶을 겪어보고도 대장을 비난할 수 있다면 그땐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그전에는, 섣부른 기준으로 대장을 판단하지 마.”
시타는 이제껏 효령이 봐왔던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돌덩이처럼 효령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두운 낯빛의 효령을 보고 시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모르겠지만 대장…… 그자를 돌려보내고 난 후로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아. 왜겠어? 널 신경 쓰는 거야, 네 반응을.”
“…….”
“지금까지 대장은 단 한 번도 누굴 죽이는데 망설이거나 주저한 적이 없어. 그게 내 편이든, 적이든.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한 적도 없어.”
“…….”
“모개가 그랬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대장…… 상처가 너무 커서 메마르고 갈라진 사람이라고. 그 심장이 분노로 가득 차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
“그런 대장이 널 만나고 변했어. 요즘처럼 대장이 환히 웃은 적도, 편안해 보인 적도 없었어. 우린 그게 너무 낯설면서도 진심으로 기뻤어. 그러니까 효령아…….”
시타가 효령의 손을 붙들었다.
“네가 대장 좀 봐줘. 미워하지도 비난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어차피 얼마 후면 한동안 떨어져 있게 될 거야. 그런 맘으로 여길 떠나려면 대장도 편치 않을 거 아냐.”
“대장이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타?”
묻는 효령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