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드러난 비밀 2
* * *
“……!”
장공주. 이제는 낯설어진 그 호칭을 듣는 순간, 효령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뭐,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난…….”
“착각을 하기에는 너무도 특별한 분이시라서요.”
그림자 중 하나가 어둠을 등지고 효령 앞으로 나섰다. 검은 복면으로 가린 탓에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누, 누구냐, 너희들은?”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몇 번 뵌 적이 있지만 고귀하신 장공주님께서 기억하시기엔 저흰 너무 하찮은 놈들이라서. 하지만 이 이름을 들으면 저희가 여기 왜 온 것인지 아실 겁니다.”
사내의 입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형부 상서, 맹유천. 그분께서 저희의 주인이십니다.”
“형부 상서가 왜 나를…….”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알면 무척 섭섭해하실 겁니다. 장공주님과 치를 첫날밤을 무척 고대하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장공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귀한 것들로 방을 가득 채웠는데 그 주인이 없으니……. 해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바짝 날을 세운 효령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난 가지 않는다.”
“형부 상서께서 이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순순히 따라오시면, 황궁 못지않은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실 것이라고요. 하지만 저항하신다면…….”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깐 사내가 효령을 향해 다가왔다.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장공주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희들이 장공주님을 상대로 무력을 쓰지 않도록 부디…….”
“아니.”
효령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난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너희들이 굳이 날 데려가겠다면, 그땐 내 시신을 가져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제아무리 쓸모없는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효령은 끝까지 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달아날 틈을 찾으려 뒤를 돌아본 순간. 이미 뒤도 막혀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그 말씀을 상서 어른께 그대로 전해드리지요. 뭣들 하느냐, 장공주님을 모시지 않고.”
앞뒤로 효령을 둘러싼 검은 그림자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깊어진 밤거리에 그들 외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더는 달아날 길도, 도움을 청할 방법도 없어진 효령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해야 할까. 어찌하면 이 난관을…….
바로 그때, 예상 밖의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었다.
“웬 쥐새끼들이냐?”
마치 나락에서 들려오듯 살벌하고 거친 음성의 주인공. 그는 가운데가 휘어진, 안야국 검보다 2배는 커 보이는 만곡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호독니였다.
뜻밖의 순간 그와 마주한 효령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도와줘요, 호독니!”
효령의 외침에 검은 복면의 사내가 그녀의 팔을 붙들며 뒤로 물러났다.
“없애라!”
열댓 명에 가까운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호독니를 향해 다가갔다. 호독니는 삽시간에 그들에게 에워싸였다.
“가소로운 것들!”
호독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챙챙, 챙챙.
검날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효령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호독니를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안야국 무사들이 겪을 일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쓰윽, 싹. 선득한 소리와 함께 곧이어 짓눌린 비명이 들려왔다.
“으, 으윽.”
그를 시작으로 털썩,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비, 빌어먹을!”
효령의 팔을 붙들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만족들의 실력이 여간 아니란 소릴 듣기는 했지만 이건 소문 이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내로라하는 동료들이 모두 시신으로 변했다. 호독니의 발 아랜 그들이 떨군 칼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당황한 사내가 효령을 이끌고 뒷걸음질을 쳤다.
“왜, 도망가게?”
호독니가 웃었다. 그냥도 험악한 얼굴이 더욱 무시무시했다.
“그깟 사내 같지도 않은 비리비리한 놈을 방패로 삼을 만큼 형편없는 실력으로 감히 어딜 들어와? 내 이 쥐새끼를 그냥!”
호독니의 엄포에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효령에게도 느껴졌다.
“난 대도위군의 천장 호독니다. 천장이 무슨 뜻인 줄 아나? 네놈은 천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수라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호독니가 살벌하게 눈을 빛냈다.
“그건…… 혼자서 천명을 끝장내는 장수란 뜻이다. 이얏!”
그가 들고 있던 만곡도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
겁에 질린 사내가 효령을 내팽개치고 달아나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순간, 그 뒤쪽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군사가 칼 등으로 그 목을 내리쳤다. 호독니가 효령의 뒤를 밟으라 심어둔 끄나풀이었다.
풀썩. 사내가 어이없게 검을 떨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호독니의 턱짓에 그의 수하가 다가가 사내를 둘러메었다.
그가 사내와 함께 사라지자 호독니가 효령에게 다가왔다.
“설명해라, 애송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째서 안야국 놈들이 널 잡아가려는 거냐?”
그가 위협적인 표정으로 효령을 노려보았다.
“그, 그게…….”
당황한 효령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발리안과 함께 호시가 열릴 장소를 점검하러 간 호독니가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인지. 그 덕분에 살았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사실, 낮까지만 해도 호독니는 발리안과 함께 호시가 열릴 삭주의 외곽 마장(馬場)에 가 있었다. 내일 호시에 참가할 안야국 상인과 상단의 무사들이 미리 그곳에 와 황실로부터 받은 통행증과 거래허가증을 보이고 등록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발리안의 눈이 누군가에게 꽂혔다. 그가 호독니를 보고 말했다.
「저기 푸른 옷을 입은 놈. 낯이 익다.」
「예?」
「효령과 교기를 구해오던 날. 위주 도독의 곁에 서 있던 놈이다.」
「위주 도독이라면…….」
호독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가 위주 도독의 끄나풀이라면 이건 안야국 황실이 우릴 감시하고 있단 뜻이 아닙니까?」
「그럴지도. 저자와 일행의 뒤를 밟아라. 놈들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아야겠다.」
그때부터 호독니는 내내 그들의 뒤를 쫓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그들이 삭주 관사를 염탐한 것도, 그러다 거기서 효령이 나오는 것을 보고 뒤를 쫓는 것까지 하나 빠짐없이 모조리 지켜보았다.
마침, 효령을 감시하러 나오는 자신의 수하와 만난 그는 둘이서 이들을 따라온 것이었다.
“어서 말해라, 애송이. 저들이 왜 널 쫓은 것이냐?”
“그게…….”
효령이 호독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 내가 모시던 주인의 수하들이에요. 다들 내가 말도 없이 달아난 것에 화가 났나 봐요. 그래서…….”
호독니가 효령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부디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길 빈다. 저놈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면 그땐 이 손으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휙. 돌아선 호독니가 앞장서 걸어갔다.
효령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명국공부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가서 한유를 만나야 하는데……. 아쉬움을 접은 효령이 서둘러 호독니의 뒤를 쫓아갔다.
* * *
효령이 호독니를 따라 들어선 것은 삭주 관사의 감옥이었다.
효령이 도착하니 며칠간 오지 않을 것이라던 발리안이 거기 있었다. 잡혀 온 사내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힐끗 효령을 한 번 쳐다보는가 싶던 발리안의 눈이 곧 사내를 향했다.
“깨워라.”
촤악. 사내를 향해 물이 끼얹어졌다.
흐억.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막 깨어난 그가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내 상황을 깨달았는지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을 풀어 줘라.”
발리안의 명에 사내의 입이 자유로워졌다.
“왜 효령을 노린 것이냐?”
“…….”
여러 가지를 물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발리안은 그것 하나만을 물었다. 게다가 답을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다. 사내를 고문하거나 겁을 주는 일 없이 발리안이 호독니에게 말했다.
“오늘 들어온 안야국 상단 놈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군사들을 무장시켜라. 당장 위주를 공격한다. 위주 도독이라면 금세 입을 열 테지.”
발리안의 말에 효령과 사내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효령이 발리안의 팔을 붙들었다.
“말할게요. 내가 말…….”
그러나 발리안은 효령의 손을 거둬냈다.
“넌 입 다물어. 내가 물은 건 저놈에게니까. 그것도 이미 대답할 시간을 지났다. 난 참을성이 별로 없는 사람이거든. 다들 뭣들 하느냐? 당장 전원 무장시키…….”
“마, 말하겠소.”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리안이 이미, 위주 도독이 자신들의 일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이었다.
사내가 턱으로 효령을 가리켰다.
“주인께서 저자를 데려오라 하셨소. 저자가 말도 없이 달아난 탓에 진노하시어…….”
발리안이 호독니를 바라보았다. 호독니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소. 다만 저자를 데려오라는 명이 하도 지엄하기에……. 저, 저자만 내주면 조용히 물러가겠소.”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발리안이 사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너와 네 주인 사정이고……. 너는 불순한 의도로 신분을 위장하여 기탄의 영토에 들어왔다. 죽어 마땅한 일이지.”
“그, 그건…….”
“주인의 명으로 여길 왔다, 라…… 그럼 난 태후께 항의부터 해야겠군. 고위 관리씩이나 된 자가 감히 두 나라 간의 약조를 이렇게 우습게 여겨서야. 위주 도독의 배후라면 꽤 높은 자겠지?”
마치 모든 사정을 훤히 꿰는 듯한 발리안의 말에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일행 중에 위주 도독의 사람이 있었으니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짐작한다 해도 그 뒤에 누군가가 더 있을 것이란 생각은 어떻게 한 것인지. 그건 위주 도독과 죽은 동료들 외에는 아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소름이 돋은 사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위주 도독은 감히 나를 상대로 일을 벌일 만한 담력이 없는 자거든.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 일에 태후가 직접 관여했는가인데, 네놈 표정을 보니 아니로군.”
꿀꺽. 사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너나 네 주인은 내게 효령을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칠 때가 아니라 제발 살려달라 자비를 구해야 할 때이다.”
“이, 이보시오. 내가 자, 잘못했소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주인께만은…….”
“눈물겨운 충성심이군.”
효령이 발리안의 앞으로 나섰다.
“대장. 저 사람은 아무 죄가 없어요. 저 사람은 주인의 명을 따랐을…….”
순간, 호독니가 효령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네놈은 여전히 낄 때 못 낄 때를 가릴 줄 모르는구나.”
힐끗 그 모습을 쳐다본 발리안이 말했다.
“이자는 살려 보낸다.”
“대장.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호독니가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놈을 살려주면 안야국 놈들이 우릴 만만하게 볼 겁니다. 다시는 이딴 짓을 못 하도록…….”
“호독니.”
“빌어먹을! 효령이 때문입니까? 효령이 이놈 때문에…….”
“호. 독. 니.”
발리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