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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25화 (25/116)

25화. 드러난 비밀 1

* * *

시타가 다정히 효령의 어깨를 두드렸다.

“궁금하면 참지 말고 대장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그걸 물어본다고 대장이 화낼 것 같지는 않으니까.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고. 응?”

“고마워요, 시타.”

효령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들었네요, 바람이 찬데……. 잘 자요, 시타.”

“그래. 너도 잘 자.”

시타가 효령에게 손을 흔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발리안의 처소로 들어온 효령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던 걸까. 안야국이 기탄에게 빼앗기는 것은 이곳 삭주가 마지막이기를 바란 것은 부질없는 소망이었나.

철광석의 생산과 제련이 시작되면 기탄과 발리안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와 무력을 가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한유는 발리안과 손을 잡은 자신을 배신자 취급이지만 효령에게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

발리안은, 이제껏 가지고 있던 야만족에 대한 편견을 한 번에 깨버릴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 하지 않던가.

특히나 위험한 적일수록 지척에서 그 동향을 살피고 경계함이 마땅하다 여겼다.

그런데 오늘은, 발리안의 곁에서 안야국의 멸망을 늦출 방법을 찾겠다고 생각한 자신의 다짐이 왠지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에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지. 용기라 여겼던 것이 실은 교만이며 객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

“…….”

침소로 향하는 효령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툭. 생각에 잠겨 걷는 그녀의 발끝에 무언가가 차였다. 여기저기 발리안이 읽고 내던져 둔 두루마리와 서책 중 하나였다.

이전에 삭주 도독이 처리했을 공문서들. 매일 밤 발리안이 늦게까지 무얼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곳 삭주 관사에 있는 문서란 문서는 모조리 끌어다 읽은 모양이었다.

‘지독하네, 진짜.’

발리안,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미 뛰어난 사람임에도 그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효령은, 머릿속에 삭주에 관한 모든 지식을 통째 집어넣은 발리안의 다음 계획과 행보가 두려워졌다.

그는 이곳 안야국에 왜 왔으며 무얼 하려는 것일까.

“……!”

그러고 보니 문득 다른 의문이 생겼다. 발리안은 어떻게 그렇게 안야국 말에 능숙한 것일까.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고 싶어 했다더니 그래서 일부러 배운 것일까.

효령이 기탄 말을 배우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명국공부에는 멀리 기탄에 끌려갔다 탈출한 안야국 사람이 있었다.

명국공은 갈 곳 없는 그를 거두어 주었다. 한때 그가 명국공의 육촌 형님이 지휘하던 군대에 있었다는 인연 때문이었다.

어린 효령과 한유는 자주 그를 찾아갔다. 그는 다른 이들은 모르는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기탄의 여름은 이곳의 봄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덥지도 않고요. 여름이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에 바람꽃이라 불리는 하얀 꽃이 가득 핀답니다. 기탄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지요.」

「바람꽃? 이름이 특이하다!」

「그렇죠? 차가운 겨울바람과 봄바람을 이겨내고 핀다고 그렇게 부릅니다. 바람꽃이 피어 있는 동안이 기탄에서는 가장 살기 좋은 계절이지요. 가을부터 겨울만큼 추워지거든요.」

「아…….」

「겨울이면 십여 년에 한 번씩 무시무시한 한파가 몰아닥치는데 그땐 추위가 얼마나 심한지 가축들이 선 채로 그대로 얼어 죽습니다. 꽝꽝 언 소꼬리가 뚝 떨어지기도 하고요.」

「와! 정말? 그럼 사막은? 사막도 봤어?」

「아쉽게도 사막을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만. 거긴 끝도 없는 모래 언덕과 돌산이 이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에게서 초원과 사막의 이야기를 들었고 기탄 말을 배웠다. 그땐 그저 재미난 놀이에 불과했던 것들이 오늘날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정말 사람의 운명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두루마리들을 잘 말아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효령이 이번에는 탁자로 다가갔다. 한눈에 보아도 중요한 것들만 모아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공문서들과 서책들을 정리하던 효령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살짝 열린 탁자의 서랍 안에서 무언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종이도 아니고 배접한 비단도 아닌 것이 분명 양피지였다.

끼익. 효령이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양피지와 함께 발리안을 흑야차라 불리게 만든 밋밋한 검은 가면이 들어 있었다.

효령의 코끝으로 훅하니 오래 묵은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종이가 널리 사용되는 까닭에 이제는 찾아보기 드문 양피지 두루마리가 왜 여기 있는 걸까.

효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피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펼쳐보았다.

“……!”

순간,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양피지 속에는 말에 탄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것 같은 그녀는 햇살처럼 환히 웃고 있었다.

너무도 오래되고 많이 만진 탓에 낡아 흐물거리는 양피지 속에서 빛이 쏟아졌다.

한눈에 사로잡히는 기분. 저와 눈을 맞춘, 제 또래로 보이는 미인에게 효령은 완전히 넋을 놓고 말았다. 양피지의 아래에는 흐릿하게 글씨가 남아 있었다.

록산(祿山).

그 첫머리에 써진 글씨에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초원에 한 아름다운 여인 있어, 세상 홀로 빛난다.

그 하얀 미소에 마음을 잃고, 푸른 두 눈에 생을 바쳤다.

새벽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품 안의 그대가 꿈일까 두렵다.]

“……!”

뇌성벽력이 치듯, 효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록산, 로흐샨. 이제는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이었다. 그림 속 그녀는 효령이 그랬듯, 누군가에게 ‘빛’이라 불린 여인이었다. 그녀를 ‘빛’이라 부른 사람은 누구일까. 혹, 발리안일까.

“……!”

효령은 문득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 글의 끝에 적힌 마지막 세 글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겨우 보이는 흐릿한 글자에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효령은 힘을 다해 탁자를 붙들었다.

이, 이럴 수가.

설규한(薛圭翰)…….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닳고 닳은 그 글자는 효령에게 너무도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녀와 한유에게 기탄 말을 가르쳐줬던 아저씨가 그리움으로 간간이 불렀던 이름. 명국공이었던 외숙 설용한과 비슷한 까닭에 처음 듣는 순간 또렷이 뇌리에 박혀버린 이름이었다.

설규한. 그는 외숙에겐 단 하나뿐인 친척 형님으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민족의 침범을 받은 이웃 대현국을 돕기 위해 원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당시 대현국은 엄청난 이민족의 기세에 밀려 멸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른 초원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전투 끝에 설규한은 이민족을 대현국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투의 선봉에 섰던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시신을 대신한 건 피로 흥건하게 젖은 투구였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명국공의 당숙은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일가를 이루지도 못한 채 꽃다운 나이에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설규한을 위해, 외숙 명국공은 해마다 빠짐없이 그와 그 가족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무덤도 남기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흙이 되어 사라졌을 설규한의 이름이 여기 왜 적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가 록산이라 부른 이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인지.

효령이 양피지 속 그녀를 향해 파르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분과는 어떤 사이……!’

찰나의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효령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조모께서 마자란족 출신이십니다.」

「대장 어머님이신 장공주님도 그 어머니를 닮아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지셨었지. 머리카락은 검으셨지만.」

「그분이 미소를 지으실 때면 그 주변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효령은 다시 그림 속 여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빛바랜 그녀의 초상화는 검은 먹 하나만으로 그려진 까닭에 정확한 피부색도 눈동자 색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래 적힌 시가 대신 말하고 있었다.

[그 하얀 미소에 마음을 잃고, 푸른 두 눈에 생을 바쳤다.]

그림 속 여인은 기탄 제일의 미인이라던 발리안의 어머니, 발란주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설규한은…….

「저자의 성(姓)은 어미를 따른 것이다. 아비가 성씨 물려주는 것을 거부한 후레자식을 두고 화, 황자라니?」

「혹…… 명국공의 친가에 대해서도 좀 아나? 명국공에게 당숙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 집안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해서…….」

「대장은 옛날부터 여길 오고 싶어 했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북쪽 부족들을 점령하고 길을 만들면서도 늘 남쪽 하늘을 바라봤어. 언젠가 반드시 저기 가야 한다고.」

처음부터 이상했다. 안야국에 온 발리안이 굳이 명국공부에 들렀다는 것부터.

명국공은 안야국에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지만, 관직을 물러난 지 오래인 힘없는 원로에 불과했다. 그 명성이 안야국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지만, 그것이 발리안이 그를 보고자 찾아올 만한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마, 맙소사!’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발리안이 명국공을 보기 위해 삭주에 온 것도, 그래서 한유를 구한 것도. 모든 것은 다 여기 적힌 글씨의 주인공, 설규한 때문이었다.

“…….”

효령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 두루마리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유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설명해줘야 했다. 발리안 그가 누구인지를…….

그의 몸에는 한유와 같은 설씨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

밖으로 나오자 여느 때라면 금세 모습을 보였을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호시로 자리를 비운 군사들의 틈을 메우기 위해 다들 바쁜 모양이었다.

효령은 교기를 부를까 하다가 관뒀다. 명국공부가 여기서 멀지 않은 데다, 지금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한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고 온 물건이 있어 잠시 명국공부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효령은 미친 사람처럼 어두운 밤거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저 멀리 명국공부의 지붕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유야.’

효령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끌어안고 모퉁이를 돈 순간. 어둠 속에서 짙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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