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숨은그림찾기 5
* * *
거짓말 같은 침묵이 훈련장을 잠식한 순간, 발리안이 소리쳤다.
“우물물을 퍼라! 다 함께 어주를 나눠 마시자!”
잠시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군사들 사이, 마치 폭풍처럼 엄청난 함성이 일어났다.
“와아!”
“와아!”
“와아!”
훈련장을 메운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우물가로 몰려들었다.
“대칸이 내리신 어주다!”
“어주다, 어주!”
“내 생애에 어주를 마시는 날이 오다니!”
“기분 최고다!”
“대장,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대장!”
“크하. 맛 끝내준다!”
“그러게, 정말 꿀맛이다!”
발리안을 둘러싼 군사들이 잔과 바가지를 부딪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저기서 우물물을 퍼 나르느라 분주하고 시끌벅적했다.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흥분과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채운 그때. 효령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절실히 깨달았다. 발리안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인지, 얼마나 두려운 적인지.
그는 수하들을 단순히 힘과 실력으로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하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군사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주인을 위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 세상에 이처럼 강한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앞으로 발리안과 저들을 상대로 안야국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안야국의 어두운 미래가 너무도 또렷한 탓에, 효령의 가슴 한구석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 * *
짐수레를 앞세운 기나긴 행렬이 줄줄이 삭주를 향했다.
발리안의 군사들에 의해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삭주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외지인들이었다. 그들은 안야국 황실로부터 교역을 허락받은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말을 최고급 명마 값을 치르고 사라는 황실의 압력에 마지못해 나선 출행.
일부러 손해를 보고자 나선, 말도 안 되는 길이었다.
“…….”
“…….”
모두가 푹푹 새어 나오는 한숨을 애써 욱여넣을 때. 날카로운 눈초리로 기탄 군사들을 살피는 자들이 있었다.
상단의 호위로 위장한 그들은 단순히 말 거래를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형부 상서 맹유천. 그는 아직 효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태후로부터 효령 대신 얼굴이 반반한 무희와 궁녀 둘을 하사받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맹유천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장공주 효령이라는 고귀하고 기품 있는 황실 여인이었지,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흔해 빠진 미인 따위가 아니었다.
태후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직접 나서 이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맹유천은 수하 중 가장 눈치 빠르고 무예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뽑아 상단 호위무사로 위장시켰다. 위주 도독의 수하들이 길 안내를 맡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효령 장공주를 내 앞으로 데려오너라.」
「예.」
그들은 발리안과 그 군대의 동태를 살피고 기회를 보아 효령을 납치하는 임무를 안고 상단 행렬에 끼어들었다.
효령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면 잠시 소란이 일겠지만 다들 그녀가 더는 이곳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달아났다고 생각할 터. 백성들이 야만족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절대 장공주의 신분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그녀의 정체를 안 순간, 그 야만족 놈들이 장공주를 순순히 놔줄 리 없으니…….」
「알겠습니다.」
「자칫하다간 나라 간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니, 너희들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와 이 나라에 위험이 미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지엄했던 명을 떠올린 이들이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사방이 깊은 어둠에 잠길 즈음. 그들은 정해진 숙소에 도착했다.
* * *
그 시각.
처소 밖 계단에 앉아 발리안을 기다리던 효령이 마침 그 앞을 지나는 시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타, 대장은 언제 와요?”
볼일을 보고 자러 들어가던 시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효령에게 다가왔다.
“대장? 며칠은 못 돌아올걸? 내일 새벽부터 호시(互市)가 시작된다는 건 알지? 거길 살피러 갔거든. 말 상태도 점검하고. 왜? 혼자 자기 싫어? 그럼 날 따라오던가.”
“아, 아뇨. 괜찮아요. 그나저나 시타 일은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철광석 광산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삭주에 머무는 피난민들의 수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의해 산에 길이 닦이고 하나둘 필요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대로 가다간 채굴이 시작될 날도 머지않을 듯했다.
시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힘들지. 원래 광산 일이 하나도 쉬운 게 없거든. 그래도 기탄에 비하면 여긴 천상이야. 내가 있던 데서는 죽어야 거길 나올 수 있거든. 하지만 난, 아무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시타.”
시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네가 고마워하는데?”
“그야…… 나도 안야국 사람이잖아요.”
시타가 효령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넌 참 이상해.”
“예? 뭐, 뭐가요?”
“나 같으면, 누가 나 모르는 기탄 사람에게 잘해 준다고 고마워할 것 같지 않은데? 가끔 보면 넌 안야국 사람들 대장 같은 기분이 들어.”
정곡을 찔린 효령이 말을 더듬었다.
“내, 내가요?”
“어. 은근히 사람들을 잘 다룬단 말이야. 그거 쉽지 않은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아냐, 내 말이 맞아. 네가 말을 하면 묘하게,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꼭 대장이 그러는 것처럼. 큭, 내가 말을 하고도 좀 이상하긴 하다. 너랑 대장은 완전 딴판인데.”
뭐가 재미있는지 시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말하고 보니 생각난 건데…… 내가 어떻게 대장이랑 만난 줄 알아?”
“어떻게 만났는데요?”
시타는 기탄 북쪽에 있는 소부족, 홀로족 출신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기탄 군사들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좋은 주인에게 팔려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상인 출신인 주인을 따라다니며 흥정하는 법을 배웠다. 눈치 빠른 시타가 제법 장사에 수완을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주인에게 변이 생겼다. 속임수와 기만, 배신과 살육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테지만 물자가 부족한 기탄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오늘부터는 여기가 네놈 자리다. 허튼짓하다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시타는, 노예에게는 무덤이나 다름없다는 강옥 광산에 팔렸다.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고, 죽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도 없다는 나락.
모진 채찍질을 더는 견디다 못한 시타는 일 년 만에 목숨을 걸고 그곳을 탈출했다.
퀭하니 꺼진 눈, 너덜거리는 온몸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길도 모르는 낯선 곳을 달리기를 며칠. 목마름과 배고픔에 눈이 뒤집힌 시타는 말린 양고기 한 덩이를 훔치다 그 주인에게 걸렸다.
「이런 빌어먹을 도적놈 같으니라고!」
도둑질을 한 자는 그 가산을 몰수하거나 노예로 삼는 것이 초원의 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재산이나 노예로서의 가치가 있는 자에게나 통하는 일이었다.
몸집이 작은 데다 뼈밖에 없는 시타는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쓰러져 죽을 것처럼 생겼다. 양고기의 주인은 시타를 노예로 삼는 대신 양 잡는 칼을 들고 와 그 손을 자르려 했다.
“겨우 광산을 빠져나왔는데 이대로 죽는 건가…… 눈앞이 정말 캄캄했지. 그때 다행히 대장을 만났어. 거길 지나던 대장과 수하들이 양고기를 사러 들렸거든.”
“그래서요?”
“대장이 열 배의 양고기 값을 치르고 날 샀어. 그러잖아도 잘생긴 대장이 그때 내 눈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으로 보였지. 고맙다는 말도 잊고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는데…….”
“……?”
“대장이 날 보며 씩 웃는 거야. 젠장, 너무 좋아서 심장이 어찌나 두근대던지.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지 뭐야. 근데 그때, 대장이 이러는 거야.”
시타가 발리안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난 저자처럼 자비롭지 못해서, 다시 한번 도둑질을 하면 그땐 손목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거다. 아예 저 양처럼 잘게 썰어서 말려 주지’…….”
“예에?”
“와, 그 말에 갑자기 소름이 쫙 돋더라고. 이거, 거짓말이 아니구나. 이 사람은 정말 그러고도 남겠구나, 하고.”
시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정작 더 무서운 건 이거야. 대장이 왜 날 구했느냐……. 3년쯤 전이었다나. 내가 전 주인을 따라다니며 물건 사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거야. 말을 타고 지나는 길에.”
“저, 정말요?”
믿기지 않는 말에 효령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그때 본 내 재주가 예사롭지 않아서 날 구했대. 쓸 만할 것 같아서. 웃긴 건…… 광산에서 지지리 고생을 하느라 내가 예전 모습이 아니었거든. 근데 날 어떻게 알아봤느냐고 놀라 물으니까…….”
“……?”
“내 눈빛을 기억한대. 그게 말이 되냐? 완전 사람 뒷골 때리지? 근데 말이야, 그게 다 진짜야. 대장 눈이 얼마나 예리한데……. 그러니까 너도 대장한테 죄지으면 안 된다, 알았지?”
시타가 동생을 다루듯, 효령을 얼렀다. 순간 효령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궁에서 발리안이 자신을 못 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 혹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효령이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시타. 철광석을 채굴하고 무기 생산이 시작되면…… 대장이 안야국을 공격할까요?”
“응?”
“난 내가 안야국을 멸망시키는 걸 돕게 될까 봐 겁이 나요.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아요.”
“네 마음 이해해. 근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대장은 옛날부터 여길 오고 싶어 했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네? 오래전부터요?”
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부족들을 점령하고 길을 만들면서도 대장은 늘 남쪽 하늘을 바라봤어. 언젠가 반드시 저기 가야 한다고.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했어.”
효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발리안이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고 싶어 했다면 더욱 절망적이지 않은가. 기탄처럼 척박한 나라 사람들에게 이곳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온화한 기후와 사람. 풍부한 물자와 곡식. 그리고 거기 이어진 많은 나라들. 그들이 이곳을 탐내는 것은 당연했다.
“이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여기서는 철광석으로 무기 대신 철정(鐵釘, 덩이쇠)을 만들 거야. 물론 그게 나중에 무기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