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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23화 (23/116)

23화. 숨은그림찾기 4

* * *

“척박한 땅에서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도 아내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아. 신붓값이 비싸다고 불만인 사람도 없고.”

시타가 고기를 한입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기탄에서는 중요한 일은 다 아내와 상의해. 온통 아내 말 잘 듣는 남자들 천지라고. 쥐여사는 놈들도 많고.”

“…….”

“뭐, 그렇다고 우리가 야만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 이해 못 할 때가 있어. 너희 안야국 사람들은 아내를 왜 함부로 대하지? 우린 다들 없어서 난린데…….”

효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래서 선입견이 무서운 거구나. 그러고 보면 누구에게나 좋은 점만 있는 것도,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늘 두렵게만 여겨졌던 기탄 땅이 조금은 궁금해졌다.

“……아!”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효령이 시타에게 물었다.

“시타. 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로흐샨이 무슨 뜻이에요?”

효령이 언젠가, 발리안에게 들었던 알 수 없는 말에 대해 물었다.

처음 유주에 취했던 날 밤. 기억이 토막 난 와중에도 그 단어만은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늘 궁금해했으면서도 번번이 다른 일에 밀려 잊고 말았다.

“글쎄…… 나도 처음 듣는 말인데?”

시타의 반응에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모른다고요? 그거, 기탄 말 아니에요?”

“아닌데? 이제껏 그런 말은 한 번도 못 들어봤어.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거야?”

시타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대답하기 난처해진 효령이 머뭇거리는 사이, 앉을 자리를 찾고 있던 모개가 무심히 대답했다.

“록산(祿山), 말이구나.”

“록산?”

효령이 작게 중얼거렸다. 로흐샨은 아니지만 발음이 비슷했다. 시타가 효령에 앞서 지청구를 놓았다.

“록산이 아니라 로흐샨이라잖아요, 모개.”

“나도 안다, 이 녀석아. 둘이 같은 거라 그래.”

유주가 담긴 잔을 든 모개가 그들 옆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로흐샨을 안야국 말로 적으면 록산이 된다. 물론 그 의미는 글자와는 전혀 달라. 그저 로흐샨에 가까운 말을 찾아 적은 것뿐이니까.”

“음차(어떤 언어의 소리를 다른 문자로 적은 것)란 말이군요.”

모개가 효령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 대장에게 들은 것일 게다. 맞지?”

효령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대장에게 들었다고? 모개, 빨리 말해 봐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시타의 재촉에 모개가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빛.”

빛……. 뜻밖의 말에 효령은 숨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 수도 있었다.

「넌 로흐샨이야. 나와 같은 어둠이 없어.」

발리안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줬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시타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그거 대체 어느 나라 말이에요? 그리고 모개는 그게 안야국 말로 록산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건 아마 마자란족 말일 게다. 대장 조모님께서 거기 출신이셨지.”

“마자란족이라면…… 하얀 피부에 푸른 눈,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그 예쁜 사람들 말이에요?”

“그래. 대장 어머님이신 장공주님도 그 어머니를 닮아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지셨었지. 머리카락은 검으셨지만.”

“발란주 님은 엄청난 미인이셨다면서요? 지금도 기탄 제일의 미녀로 꼽히시잖아요.”

시타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미인이면서 재주도 뛰어나신 분이었지. 활 솜씨로는 기탄 안에 그분을 당할 자가 없었단다.”

“직접 보셨어요?”

효령의 질문에 모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그분을 모신 적이 있었지. 너무도 아름다운 분이셨다. 특히 미소를 지으실 때면 그 주변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분이 미소 짓는 건 별로 보지 못했다.”

“왜요?”

대답 대신 모개는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분이 처음 웃는 것을 보았을 때가 바로 대장이 태어나던 때였어. 그때 대장을 보고 말씀하셨지. ‘나의 로흐샨’이라고.”

어딘지 슬퍼 보이는 모개가 얼른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대장 이름이 록산이 될 뻔했다. 사실 대장 이름은 안야국 식으로 지은 거거든.”

“정말요? 난 이제껏 대장 이름이 ‘용기’를 뜻하는 ‘리야르’에서 따온 건 줄 알았는데요?

시타가 놀라는 것을 보니 모개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지. 기탄 사람이 안야국식 이름을 갖는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원래는 무슨 뜻이에요?”

“이로운 불빛(利㷳). 로흐샨과 비슷한 의미…….”

모개가 말을 끝내기 전, 갑작스레 소란이 일었다.

“말이다. 기탄에서 말이 도착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웅성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호시에서 팔 말이 도착한 모양이다. 난 그만 가봐야겠다.”

모개가 빈 잔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커다란 군사들 틈에 낀 시타와 효령은 앞이 안 보여 까치발을 하며 풀쩍 풀쩍 뛰었다.

“안 되겠다, 앞으로 가자. 넌 목말도 못 타잖아.”

시타가 효령의 손을 붙잡고는 군사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기뻐해라. 호시에서 팔 말들과 함께 대칸의 조서가 도착했다. 모개, 모개 어디 있소?”

아굴가가 글을 읽을 줄 아는 모개를 급히 찾았다.

“나 여기 있다, 아굴가.”

군사들 틈에서 모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읽어 주시오.”

으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모개가 큰 목소리로 조서를 읽었다.

[나, 기탄의 대칸은 안야국 황제가 보낸 칙서를 받아보았다. 안야사 발리안이 이룬 성과가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발리안 그대는 나, 대칸의 이름을 널리 떨치고 기탄의 백성과 가축들을 배부르게 만들었다.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오늘부로 그대를 정식으로 내 양자로 삼고, 5천의 중앙군을 이끄는 대도위(大都尉)에 봉한다. 또한 그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앞으로 10년간 삭주를 그대의 영지로 인정하고, 명마 20필과 어주(御酒)를 하사한다. 그대와 그대의 군사들은 중앙군으로서의 특권과 영예에 걸맞게 앞으로도 나와 기탄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와아!”

“와아아!”

“와아아!”

순식간에 군사들 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하늘로 내던지며 발을 굴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효령이 귀를 막으며 시타에게 물었다.

“이,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

그녀가 말을 멈췄다. 세상에, 시타가 울고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시타의 뺨으로 줄줄 눈물이 흘러내렸다.

효령이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시타.”

물론 이 일이 좋은 일이란 것 정도는 효령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과 시타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흐읍.”

효령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시타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피하게 웬 눈물이람. 네가 이해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 생전에 이런 날을 보게 되다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시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울먹이며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이제껏 우린 제대로 된 군대도 뭣도 아니었어. 기탄에서는 군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용병대 따윈 인정해주지 않거든.”

사람 좋은 시타의 목소리에 오랜 울분이 서려 있었다.

“이젠 아무도 대장을 무시 못 할 거야. 그동안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대장한테 반말을 찍찍거릴 때 우리 속이 어땠는지 알아? 내게 아굴가 같은 힘만 있었음 전부 목을 비틀어 버렸어.”

“시타…….”

“처음 우릴 주웠을 때 대장이 말했어. 자기도 우리와 다를 게 없다고. 갈 곳도 가진 것도 없는 빈털터리라고. 그러면서 보여주자고 그랬어. 밑바닥을 뒹구는 놈들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

“대장이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쯤 초원의 풀이 되어 있을 거야. 버려지고 밟혀서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라고. 대장을 위해서라면 우린 몇 번이고 죽을 수 있어.”

시타는 진심이었다. 그 눈에 깃든 결연한 의지에 효령이 감탄할 즈음.

발리안이 모개로부터 넘겨받은 두루마리를 하늘 높이 들어 보였다. 아굴가를 시작으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대도위님 만세!”

“대도위님 만세!”

“만세!”

“대도위님 만세!”

그들 틈에서 효령과 시타도 누구 못지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발리안의 목소리에 모두가 순식간에 숨을 죽였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 없는 군대가 아니다. 대도위의 군사이며 대칸의 중앙군으로 병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

감격한 군사들이 울컥한 표정으로 발리안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호독니, 막해, 복기이, 취륙, 두귀를 천장(千長, 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는 장)으로, 아굴가를 그들을 이끄는 도위(都尉)로 삼는다.”

발리안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간 우리 군의 행정을 총괄했던 모개를 단사관(행정, 법률을 관장하는 관리)에, 시타를 그를 보좌할 계사관으로 임명한다. 나머지 군사들에게도 그간의 공적에 합당한 직위를 내릴 것이다.”

다시금 폭풍 같은 함성이 훈련장을 뒤덮었다.

“와아!”

“와아!”

“와아!”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 아굴가가 발리안에게 어주가 든 술병을 내밀었다.

“이제, 어주를 드시지요. 대도위.”

군사들이 눈을 반짝이며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대칸이 내리는 어주를 받는 것은 기탄의 전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 꿈의 순간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

“……!”

발리안은 어주를 마시는 대신 그것을 든 채 군사들 틈으로 발을 옮겼다.

쫘악.

물결이 갈라지듯 군사들이 길을 비켰다. 발리안은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술을 들고 지금 무얼 하는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두의 시선이 그 등 뒤에 꽂혔다.

한참을 걷던 발리안이 마침내 발을 멈췄다. 훈련장 맨 끝에 놓인 우물 앞이었다. 그제야 그가 군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의 이 영광은 내 것이 아니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여 얻은 결과다. 그러니 이 술은…….”

탁. 병의 마개를 걷어낸 발리안이 대칸이 내린 귀한 어주를 인정사정없이 우물에 쏟아부었다.

콸콸콸콸콸.

그 술이 수면에 부딪히며 첨벙첨벙, 우물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의 행동에 군사들이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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