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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22화 (22/116)

22화. 숨은그림찾기 3

* * *

앗, 감 잡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효령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거렸다.

“뭐 지금도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기탄 남자는 땋은 머리죠. 뭐랄까, 야성적이면서도 강해 보인다고나 할까. 처음엔 낯설었는데 자꾸 보니까 멋있더라고요.”

“…….”

“대장은 잘생겼으니까 한 줄로 땋아서 옆으로 늘어뜨리면 정말 멋질 거예요. 나 대장 머리 꼭 한 번 땋아 보고 싶어요. 소원이에요. 네?”

“…….”

“머리만 땋게 해주면 앞으론 얌전히 대장 말 잘 들을게요. 그렇지! 내가 시타에게도 안 준 새 머리끈으로 묶어 줄게요. 네? 그래도 안 돼요?”

끄응. 인상을 한껏 구기고 있던 발리안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너 혹시…….”

“……?”

“시타놈 머리도 땋아주고 그러나?”

“딱 한 번요. 머리가 풀어진 것도 모르고 일하길래…….”

“땋아.”

“네? 뭐라고요?”

“소원이면 내 머리…… 땋으라고. 젠장!

발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정말요? 정말이죠?”

신이 난 효령이 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세라, 금세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정성을 다해 예쁘게…….”

“예쁘게는 안 돼!”

“알았어요. 예쁘게 말고 멋지게…….”

큭. 간신히 웃음을 삼킨 효령이 발리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모았다.

머릿결 참 좋다…….

효령이 감탄하고 있는데 발리안이 말을 걸었다.

“명국공과 먼 친척이라고 했지?”

“응? 네, 그런데요.”

효령이 조금 긴장하며 대답했다.

“혹…… 명국공의 친가에 대해서도 좀 아나?”

“친가요?”

“명국공에게 당숙이 한 분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 집안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해서…….”

“……?”

예상 밖의 이야기에 효령이 손을 멈췄다.

그러잖아도 발리안이 외숙인 명국공과 명국공부에 호의적인 것이 다소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가 명국공도 아닌 그 당숙에게까지 관심을 보이다니 전혀 뜻밖이었다.

“그분은 왜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분에 대해 알아봐 달란 부탁을 받았거든.”

“누구에게서요?”

“넌 모르는 사람. 아는 거 있어?”

순간, 효령은 발리안이 왠지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다시 발리안의 머리를 땋으며 말했다.

“글쎄요. 자세히는 잘……. 아마 돌아가신 지 오래되셨을 거예요. 일찍 부인을 잃고 슬하엔 외아들 한 분뿐이셨다는데, 그분을 전쟁으로 잃으셨거든요. 그 후에 몸져누우셨다가 안타깝게도…….”

“남은 가족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명국공께서 그 가족들의 제사를 지내고 묘를 돌보셨어요. 이제부터는 한유 책임이지만…….”

“그랬군. 말해줘서 고맙다.”

“아뇨. 자세히 알려주지 못해 미안해요. 나도 아는 게 없어서……. 교염 스승님은 나보다 더 잘 아실 텐데 물어볼까요?”

“아니, 됐다. 그보다 지금 한 얘기, 다른 사람은 모르게 해.”

“알았어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효령은 순순히 대답했다. 발리안이 몇 개의 두루마리를 읽는 사이, 드디어 효령이 일을 끝냈다.

“어디 봐요, 얼마나 멋진가.”

그녀가 들뜬 얼굴로 의자 앞으로 나왔다.

“와, 정말 근사하다. 이거 분위기가 완전 딴판인데요.”

“분위기가 바뀌어 봤자지, 호들갑은……. 이제 소원 풀었으면 그만 풀…….”

발리안이 자신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아, 안 돼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땋았는데……!”

효령이 머리를 풀려는 발리안의 손을 붙들었다. 발리안이 다른 한 손으로 효령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난 머리를 땋으라고 했지, 계속 이대로 둔다고는 안 했다.”

“싫어요. 조금만 더 있다가……. 나 아직 제대로 안 봤……!”

발리안의 품에 안긴 꼴이 된 효령이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쾅. 문이 열리고 모개와 아굴가가 들어왔다.

“대장 조금 전 기탄에서 전갈이……!”

“……!”

눈이 휘둥그레진 두 사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조금 있다 다시 오겠습니다.”

급히 고개를 숙인 모개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아굴가를 잡아당겼다.

“어, 어어!”

얼결에 그가 끌려나가고 다시 문이 닫혔다.

하.

아굴가가 망연자실 문 앞에 얼어붙었다.

‘효, 효령이 저놈.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조금 전 장면을 떠올린 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발리안 위에 겹쳐진 효령. 그 조그만 놈이 대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까지 누르고 있는 꼴이라니.

‘설마 저 삐쩍 마른 놈이 대장을 덮칠 줄이야!’

아굴가가 방 안 상황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사이. 그 옆에 선 모개의 입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왔다.

‘효령이 정말 대단한데……!’

세상에, 발리안이 저 머리 모양을 하다니. 천지가 뒤집어질 일이었다.

「내가 두 번 다시 이 머릴 하나 봐라!」

여덟 살의 어느 날 그렇게 선언한 이후, 발리안은 단 한 번도 머리를 땋은 적이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다른 부족 왕자들이 발리안을 여자로 착각하여 내기를 벌인 데서 시작됐다.

발리안을 납치하여 먼저 자기 말에 태우는 사람이 나중에 그를 색시 삼기로 한 것이었다. 발리안에게 반한 어린 왕자들이 전사 흉내를 낸답시고 벌인 일이었다.

그 결과, 세 부족의 왕자들은 발리안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어른들이 달려와 그들을 떼어 놓은 후에도 발리안은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내가 여잔 줄 알았다니 니들 눈은 다 썩었냐?」

발리안이 유독 하얗고 호리호리하니 예뻤던 데다, 남녀의 머리 모양이 비슷한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개가 웃음을 참느라 애먹는 곁에서 아굴가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효령이 저놈이 감히 대장을…….”

“아서라, 아굴가. 모처럼 대장에게 봄날이 찾아왔는데 우리가 방해하면 쓰나?”

“모개!”

아굴가가 성난 얼굴로 모개를 노려보았다.

“대장은 우리 같은 놈들하고는 다르오. 이대로 끝날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귀한 자리에 오르고 좋은 여자 만나 줄줄이 자식도 낳고……. 효령이 저놈이 대장을 망치게 둘 수는…….”

모개가 아굴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이 최고의 여자를 만나기를 바란다면…… 가만있어라, 아굴가.”

“뭐요?”

“혼인해 본 경험자가 하는 말이니 날 믿고 조금만 기다려. 그럼 곧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게다.”

툭툭. 아굴가의 등을 두드린 그가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홀로 남은 아굴가가 힐끗 방문을 쳐다보았다.

「대장이 최고의 여자를 만나기를 바란다면…… 가만있어라, 아굴가.」

대체 모개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일 연장자인 데다 지혜로운 모개는 결코 섣부른 소릴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굴가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불쾌함을 애써 욱여넣었다.

“젠장!”

못마땅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낸 그가 이내 홱, 하니 몸을 돌렸다.

모개와 아굴가가 사라진 문틈으로 작게 효령의 한탄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망했다! 창피해서 나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지?”

* * *

“아, 배고파 미치겠다.”

“그러게. 나 좀 봐라. 아예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었다.”

저녁 훈련을 마친 군사들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훈련장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리안의 명에 따라 이곳에선 하루 두 번, 체력 훈련 후 전원이 함께 모여 식사를 같이했다.

기탄은 주로 초원과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곡류와 채소, 과일류가 귀했다. 때문에, 음식은 말젖이나 양젖 등 동물 젖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들과 고기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여기저기서 굽고 삶는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야, 거기…… 좀 빨리빨리 구워라. 사람 숨넘어가겠다.”

“그럼 네놈이 와서 하던가. 나도 배고파 죽긴 마찬가지다, 인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리는 가운데, 효령도 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 교기가 아굴가에게 불려간 탓에 오늘은 그녀 혼자였다.

“여기, 효령아! 오늘 고기 맛 끝내줘.”

그녀에게 다가온 시타가 나무 꼬치에 꿴 고기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시타.”

효령이 그를 향해 환히 미소를 지었다.

처음 효령은 군사들의 벗은 몸과 낯선 음식 때문에 애를 먹었다. 눈은 시선 둘 곳을 못 찾아 늘 허공을 헤맸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끼니는 말젖이나 양젖으로 간단하게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이제 효령은 군사들이 떼로 웃통을 벗어 던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타가 가져다준 잘 구워진 고기를 맛본 후 고기도 곧잘 먹게 되었다.

“정말 놀랐어요, 시타. 군사들이 이렇게 대장 말을 잘 따르다니. 이곳 삭주에서 여자와 아이들이 안심하고 돌아다닌다는 걸, 다른 안야국 사람들은 믿지 못할걸요.”

“그야 다 이유가 있지.”

시타가 부지런히 입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솔직히 우리 사는 덴 여자가 정말 귀해. 장가 한번 가려면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 보고 죽는 놈도 수두룩해. 그러니 서로 차지하려고 그 야단들이지.”

현실이 이렇다 보니 곱상한 얼굴을 한 사내들이 험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물론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윗대가리들에겐 드문 일이었지만.

“여기 있는 놈들더러 여자를 고이 바라보기만 하라는 건 죽으라는 얘기야. 가뜩이나 힘이 넘쳐나는 놈들이니 미쳐 환장할 노릇이지.”

“그런데 어떻게…….”

“안 믿기겠지만 우리 쪽에도 기녀가 있어. 대상(隊商)이 지나는 마을마다 빠지지 않고. 다들 거기 가. 여기서도 마찬가지고. 대장도 그 정도는 눈감아 주니까.”

시타가 효령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너도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예쁜 사람으로 소개해줄 테니까. 난 주근깨가 있고 볼살이 통통한 여자가 좋던데, 넌……?”

“아, 아뇨. 전 됐어요.”

괜스레 얼굴이 빨개진 효령이 손을 내저었다.

“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여잘 납치한다고 야만인이라고 하는데……. 그게 다는 아냐.”

“…….”

“높은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한 사람과만 혼인하고 아내에게 끔찍하게 잘해.”

기탄인들은 적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자비도 없이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면, 일단 자신의 울 안에 들어온 것은 놀랍도록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했다. 그건 아내도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그 내부 결속력에 관한 한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

“정말요?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효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맞긴 맞는데……. 기탄 남자에게 아내는 뒤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지거든.”

“동지?”

“생각해 봐. 우린 매번 전쟁으로 집을 비워. 그럼 가축과 땅, 재산은 누가 지키지? 어린아이들을 전사로 키워내는 건?”

“아.”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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