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숨은그림찾기 2
* * *
효령이 의자에 앉기 무섭게 시타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교염 어른이 산에서 돌아온 피난민 중에 광산서 일한 적이 있는 십장(什長)이랑 야철장 몇 명을 찾아내셨대. 내일 소개해주신대.”
“정말 잘됐네요, 시타.”
효령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동안 너무 막막했는데 이제야 뭔가 제대로 굴러가는 거 같아. 오늘부터는 나도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다. 사실 그동안 걱정이 많았거든.”
“힘내요, 시타. 시타라면 잘 할 수 있어요.”
“그럴까?”
효령의 말에 시타가 상기된 얼굴로 밝게 웃었다.
“틀림없으니까 내 말 믿어요. 근데, 시타. 나도 시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있잖아요, 그게…….”
효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타에게 민망한 장면을 들킨 날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뭐야? 그게 그렇게 된 거였어?”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수다쟁이 시타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장난기 많고 개구진 그는 야만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냥하고 친절했다. 동료라 여겨서인지 효령에게도 매사 스스럼이 없었다. 덕분에 효령은 그를 통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기밀문서를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정색하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요. 혹시 기탄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해서요.”
“에에? 효령이 너 정말 모르는 거야? 대장이 왜 그러는지?”
“그럼 시타는 알아요?”
“당연하지. 사실은 말이야…….”
그가 살짝 효령의 눈치를 살폈다.
“같은 남자끼리 이런 말하긴 좀 뭐한데…… 너한테서 엄청 좋은 냄새가 나. 기탄 초원에 피는 바람꽃 비슷한 향기. 그래서 다들 저녁 먹을 때 네 주변에 앉으려고 그 난리라니까.”
“…….”
“저희한테는 밥맛 떨어지는 땀내나 고린내만 나는데, 네가 옆에 있으면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나? 아굴가가 너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안 놨으면 너 좀 많이 곤란했을걸?”
“…….”
“온종일 너만 껴안고 뒹굴고 싶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솔직히 나도 그런데 대장이라고 다르겠냐? 그럼 일할 때 방해가 되지 않겠어?”
뜨아. 당황한 효령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맙소사, 그런 거였어?
그동안 나 위험했던 거구나. 그, 그럼 대장도 그래서……?
이제야 자각이 됨과 동시에 효령의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또 궁금한 거 없어? 있으면 다 물어봐. 뭐든 가르쳐줄게.”
“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시타, 대장은 정확히 몇 살이에요?”
효령이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서둘러 물었다.
사실 발리안은 외모만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얼핏 교기, 시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무리를 이끌기 때문인지 태도나 행동이 훨씬 더 깊이 있고 노회한 분위기를 풍겼다.
“스물셋.”
“……!”
와, 그렇게까진 안 보이는데……. 발리안은 이제 막 열여덟이 된 효령보다 자그마치 다섯 살이나 위였다. 안야국에선 벌써 자식을 둘쯤 보았을 나이였다. 그럼 혹……?
“호, 혼인은요? 했어요?”
“안 했…… 아니, 못 했어.”
시타의 얼굴이 이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우리처럼 하찮은 놈들이라면 모를까. 원래대로라면 대장도 다른 높은 사람들처럼 열예닐곱쯤에 혼인을 했겠지. 저래 봬도 대장은 엄연한 왕자니까.”
“와, 왕자요?”
효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칸으로부터 황족의 성씨인 발씨를 하사받았으니 그 배경이 여느 사람과는 다르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발리안이 왕자일 줄이야.
놀란 효령을 두고 시타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대장 아버지가 기탄에서 대칸 다음으로 너른 땅을 다스리는 칸이거든. 아마 안야국보다 더 클걸?”
“근데 왜……?”
“나도 자, 자세한 건 몰라. 어린 나이에 왕자 자릴 버리고 나왔다는 것밖에는……. 대장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발도대(拔徒隊)부터 시작해서…….”
왠지 울컥한 것 같은 시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효령을 향한 시타의 눈이 감출 수 없을 만큼 불긋해져 있었다.
“미안. 발도대라는 건 말이야. 어느 부족에도 못 끼는 외국 놈이나 중죄인들만 모인 부대야. 전쟁이 일어나면 맨 앞에서 적진을 뚫는 돌격대. 말이 좋아 돌격대지 사실은 화살받이야. 격렬한 전투를 두어 번만 치르면 살아남는 놈이 없거든.”
“…….”
“거긴 갈 곳도, 희망도 없는 놈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치는 자리야. 나 같은 광산 노예들도 진저리를 치는 곳이라고. 적어도 광산에서는 몇 달, 몇 년은 살 수 있으니까.”
세상에, 그럴 수가. 말을 잃은 효령이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발리안의 여유롭고 느긋한 얼굴을 생각하면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안다면 전혀 부럽지 않을걸.」
「이길 때까지 싸운다는 건 거짓이야. 우리에겐 한 번 지면 다음이 없으니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게, 우리가 늘 승리하는 이유다.」
이제껏 무심히 흘렸던 말들. 아니 얄팍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던 그 말들이 새삼 쓰리게 다가왔다.
그 몸에 난 상처 하나하나가 발리안이 지나온 고통스러운 날들의 증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아굴가에게 들었는데…… 빗발치는 화살 속을 뚫고, 죽어 가던 아굴가를 업고 나온 게 대장이었대. 아굴가 덩치를 생각해 봐. 아니 덩치 때문이 아니라도 보통 사람 같으면 나 살기 바빠서 절대 그렇게 못 해.”
“…….”
“이제 알겠지? 아굴가가 왜 대장이라면 깜빡 죽는지?”
“…….”
“그렇게 몇 년을 버티며 번 목숨값으로 우리 용병대를 꾸렸어.”
흐읍. 시타가 재빨리 눈을 훔쳤다.
“쳇. 창피하게 이게 무슨 꼴이람. 사내놈이 찔찔 짜기나 하고.”
어색함을 감추려는지 그가 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결론은…… 지금 대장은 혼자다, 이거야. 그러니까 마음 놓고 좋아해도 돼. 사실 여기 있는 놈들도 다 대장을 환장하게 좋아하거든. 대장은 정말 남자가 봐도 멋지지 않냐? 내가 여자였으면 진작 그 품에 뛰어들었다.”
“시타도 참.”
애써 웃는 시타를 향해 효령도 하릴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니 아파서,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음에도 차마 더는 입을 떼지 못했다.
* * *
“여기요. 이거 모개가 대장에게 전해주래요.”
발리안 앞에 두루마리 뭉치를 한 아름 내려놓은 효령이 은근슬쩍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났다.
“이유가 뭐야?”
발리안이 미간을 구기며 효령을 바라보았다.
“네? 뜬금없이 이유라뇨?”
“며칠 전부터 너…… 이상하게 굴고 있잖아. 나만 보면 슬슬 피하고 근처에도 안 오고, 잘 땐 침상 끝으로 달아나고.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무슨……. 그냥 대장 말을 따르는 건데요.”
효령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부, 불쑥 치고 들어오지 말라면서요.”
순간 발리안의 입꼬리가 위로 움직였다.
“이제야 겨우 말귀를 알아들었군. 누굴 대하든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 유지해. 대신…… 난 빼고.”
피. 효령이 입을 내밀었다.
“사람 무섭게 겁준 사람이 누군데 대장을 빼요?”
“잠자는 동안은 네 마음대로 날 주무르고 끌어안으면서 낮에만 정색하는 거 우습잖아? 게다가 난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지, 도망가라고 한 적 없어. 이건 너무 극단적이야. 기분 나빠.”
“내, 내가 언제 주무르고 껴안았다고! 술 때문에 한 번 실수한 걸로 맨날 놀리기나 하고. 나야말로 기분 나쁘다고요. 흥? 내가 대장 가까이 가나 봐라. 절대 안 가.”
얼굴이 빨개진 효령이 불만스럽게 앙알거렸다.
“이봐. 말로 할 때 얌전히 듣는 게 좋을 텐데. 내가 직접 나서면 그땐 순순히 가르쳐 주는 걸로 안 끝나.”
“안 끝나면요?”
“다시는 말대꾸나 반항은 꿈도 못 꾸도록 무시무시한 교훈을 안겨 주지.”
“무시무시한 교훈 뭐……!”
기세 좋게 대들던 효령이 이내 말끝을 흐렸다. 이전의 숨 막혔던 순간을 떠올리니 더는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 또 무슨 민망한 꼴을 당하려고? 그렇다고 금세 꼬리를 내리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지금 나 겁주는 거죠?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걸 이제 알았나?”
발리안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악취미야, 정말. 원래 이렇게 못됐어요?”
“날 때부터. 천성이야.”
하…….
할 말을 잃은 효령이 발리안을 한껏 흘겨보았다.
어떡해야 저 능글맞은 대장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지?
잠시 고민하던 효령이 그를 향해 깜찍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무슨 상이라도 있어요? 상 줘요. 억울해서 그냥은 못해요.”
“반항 대신 앙탈이라……. 것도 귀엽군. 그래, 뭘 원하는데?”
“대장 머리…….”
“……?”
뜻 모를 소리에 발리안의 이마가 구겨졌다.
“내가 잠잘 때 대장 몸을 막 주무르고 끌어안는다고 했죠? 이왕 몸을 내준 김에 머리카락도 내줘요. 그것도 마음대로 주물러 보게.”
순간, 내내 여유롭던 발리안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그, 그건 안 돼.”
어쩐 일인지 발리안이 그답지 않게 딱딱하게 굴었다.
어라? 이 반응 뭐지? 역시 저 머리만 하고 다니는 데엔 이유가 있는 거야.
효령의 눈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기탄은 봄, 여름이 짧고 가을부터 겨울 같은 추위가 시작되는 땅이었다. 때문에, 남자들도 자연스레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안야국 남자들이 상투를 틀어 관을 쓰거나, 뒤로 묶어 단정히 빗어 내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되는대로 흐트러뜨리고 다녔다.
가장 흔한 것이 땋은 머리인데 아굴가처럼 하나로 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타처럼 나머지 머리는 길게 푼 채 양쪽 귀밑머리만 땋은 사람, 여러 개로 땋아 늘어뜨리거나 그걸 뒤에서 하나로 묶은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발리안은 유독 길게 푼 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여자들도 부러워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다니는 모습이 멋지기는 했지만, 간혹 그 머리를 묶거나 땋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 무섭게 정색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니까 더 해보고 싶다고요, 대장.’
효령의 투지가 불타올랐다.
“시타처럼 귀밑머리를 땋으면 어때요? 그럼 일할 때 덜 불편할 텐데.”
“지금도 안 불편해.”
“그럼 교기처럼 묶는 것은요?”
“나더러 그놈 흉내를 내라는 건가? 사양하지.”
“그럼 아굴가처럼은요? 남자답고 멋지던데…….”
“그 말은…… 지금 이 상태로는 내가 사내답지 않다는 건가?”
발리안의 눈썹이 발끈하며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