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숨은그림찾기 1
* * *
순간,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타. 그 사람 이름, 교염 아닌가요?”
“맞다, 교염!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효령이 대답을 하는 대신 발리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장, 그 사람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명국공부의 가신이에요. 분명 한유를 만나러 왔을 거예요. 그러니까 풀어줘요, 네?”
“명국공부의 가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발리안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시타, 가서 교염을 이리 데려오라고 해. 단, 그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알았어요, 대장.”
시타가 사라지자, 발리안이 효령에게 말했다.
“너는 잠깐 저기 들어가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그가 내실을 가리켰다.
“저긴 왜요?”
“교염이라면…… 그 녀석과 같은 성씨잖나? 늘 네 옆에 딱 붙어 다니는 놈.”
발리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교염 그자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할지 정말 궁금하군.”
“……!”
순간, 그 말뜻을 알아챈 효령의 등 뒤로 식은땀이 솟았다.
무서운 사람. 역시 발리안은 한시도 방심하거나 틈을 보일 수 없는 상대였다.
만약 교염이 효령 자신이 한 것과 다른 말을 한다면, 정체를 거짓으로 고한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스승님을 위태롭게 만든 건가?’
초조해진 효령이 내실 안을 서성이는 사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왔습니다, 대장.”
“들여라.”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교염을 데리고 들어왔다. 곧 그들이 물러나고 방 안엔 발리안과 교염 둘만 남았다.
효령은 두 사람의 목소리에 쫑긋 귀를 세웠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발리안이었다.
“날 보자고 했다면서?”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로?”
교염이 발리안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교염, 명국공부의 가신으로 명국공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이곳에 명국공의 막내 아드님께서 계시단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분을 만나게 해주실 수 없습니까?”
발리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교염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교염이라…… 설마 자네. 날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느닷없는 말에 교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딱 봐도 자넨 단순한 책상물림이 아닌데……. 그런 자네가 막내 공자를 빼돌리기라도 한다면 나로서는 큰 낭패가 아닌가?”
“오해이십니다. 전 그럴 생각이 전혀…….”
“그 정도 결심과 각오도 없이 야만족이 우글거리는 삭주에 들어왔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나?”
마른침을 삼킨 교염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공께서 믿든 믿지 않든 제 말은 사실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공자님 역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으실 겁니다. 평생을 살아온, 명국공과 그 가족분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이니까요.”
“…….”
“명국공께서는 단 한 번도 지켜야 할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도 저도, 이곳에서 삭주의 백성들을 지키고 돌볼 겁니다.”
“…….”
“그분과 삭주의 백성들을 모두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절 공자께 보내주십시오. 저희가 백성들을 돌본다면 공께서도 큰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습니까? 절대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교염이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랭한 조소였다.
“자네 말이 내게는 꼭…… 삭주 백성들을 선동해서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교염이 주눅 들지 않고 의연히 답했다.
“그럴 틈을 보일 만큼 공의 군대가 허술하다 생각하십니까?”
훗. 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날 도발할 생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실패다. 난 내 수하들의 능력을 믿는 것 이상으로,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을 경계할 줄도 알거든. 제아무리 커다란 둑도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질 수 있으니까.”
“역시…… 공은 예사 분이 아니시군요. 하지만 저 역시, 한 사람의 섣부른 객기가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늘 백성이고요.”
“…….”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닙니다. 태후마마와 추씨 일파,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만 급급한 탐관들로 인해 나라 곳곳이 도탄에 빠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
내내 삐딱하게 앉아 있던 발리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교염에게 자리를 권했다.
“지금부터 할 얘기가 기니…… 거기 앉지.”
교염이 의자에 자리를 잡자 발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둬라. 난 말로 설득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네가 날 설득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넬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야 해.”
“…….”
“하지만 신뢰라는 게 하루아침에 쉽게 쌓이는 게 아니지. 그러니 내가 자네 말을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다.”
“공……!”
발리안이 손을 들어 교염의 말을 막았다.
“이제부턴 내가 자네와 하려는 건…… 거래다.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응하고 아니면, 거절해도 좋다.”
“…….”
“나와 내 군대는 싸움과 흥정에는 능하지만, 정치는 처음이다. 삭주는 생각보다 너른 땅이고 문화와 생활 방식이 다른 우리가 다스리기엔 만만치 않지. 게다가…….”
“…….”
“알고 있겠지만 철광석 광산까지 개발하려면, 매일매일이 전쟁을 치르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울 게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릴 도와 일해 볼 생각, 없나?”
“……예?”
전혀 예상 밖의 제안에 교염이 벙하니 얼어붙었다.
“그 큰 명국공부를 오래도록 섬겨 왔다면 웬만한 관리 못지않은 경험과 지혜가 있을 것 아닌가. 정치와 율령, 행정과 사무, 치수와 토목, 공물과 조세, 예법과 문화……. 안야국의 모든 걸 배우고 싶다.”
“…….”
“거저 가르쳐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 대가로 앞으로 10년간, 우리 기탄군은 삭주 백성들의 안전과 평화를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또…….”
“……?”
“한유 공자를 조건 없이 돌려보내는 것은 물론, 광산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을 명국공부의 몫으로 내주지. 백성들을 돌보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할 테니까.”
마, 말도 안 돼.
이건 교염에게도, 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효령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쓸어 간다는 발리안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발리안의 속내를 헤아리느라 교염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철광석 광산을 개발하는 비용을 우리 쪽에서 댄다는 걸 감안하면, 절대 손해나는 제안은 아닐 텐데…….”
“저, 저기요, 공.”
당황한 교염이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까지 명국공부를 봐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짐승이란 소리가…… 더는 듣기 싫어진 모양이지.”
발리안이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나와라, 효령.”
느닷없이 불린 이름에 교염이 다시 한번 놀라는 사이. 효령히 빠른 걸음으로 내실을 빠져나왔다.
“자, 장공…… 아, 아니 공자님.”
효령의 차림새로 상황을 눈치챈 교염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스승님.”
발리안이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효령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머진 네게 맡긴다. 회포도 풀 겸 저자를 잘 설득해 봐. 그럼 난 이만 빠져주지.”
효령의 어깨를 두드린 발리안이 이내 밖으로 사라졌다.
* * *
“후, 힘들다! 미안해, 교기야. 괜히 나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많이 피곤하지?”
이제 막 삭주 관사의 문을 넘어선 효령이 교기를 보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예전에 명국공부에 계실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
효령이 슬쩍 교기를 흘겨보았다.
“그거 내가 못 말리는 달랑쇠였단 소리지?”
“그럼 아닙니까? 중심 잡기를 해 보이신다면서 지붕 위를 걷다 떨어지시질 않나, 대련 중에 제 목검에 한 대 맞았다고 며칠 동안이나 저를 쫓아다니며 기습 공격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런 걸 다 기억하다니 너무해!”
얼굴이 빨개진 효령이 재빨리 교기를 앞질러 가버렸다. 순간, 무뚝뚝한 교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전의 그 밝은 모습을 되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장공주님.’
요즘 효령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삭주 관사의 일을 돌보는 것은 물론 명국공부와 피난민들 사이를 오고 가느라 하루 12시진이 빠듯했다.
「발리안 그자가 명국공부에 보이는 호의가 지나치다 싶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닌 것 같군요. 제게 했던 약속을 모두 문서로 만들어 줬습니다. 한유 공자님도 놀라는 눈치셨습니다.」
교염은 발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명국공부의 가신 여럿과 함께 이른 아침이면 삭주 관사에 나와 늦은 오후까지 모개와 함께 행정 업무들을 처리했다. 같은 중년으로 나이대가 비슷한 교염과 모개는 이내 좋은 벗이자 동료가 되었다.
한유와 교염이 돌아오면서 피난민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명국공부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산으로 숨어들었던 사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다. 농군은 다시 밭을 갈았고, 굳게 닫혔던 상점들도 문을 열었다. 마을과 거리가 일상을 되찾으면서 삭주는 거의 이전의 모습과 기능을 회복했다.
“효령아,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효령과 교기가 관사의 너른 마당을 지나치는 순간. 멀리서 나타난 시타가 두 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가 막 효령을 안으려는 순간, 교기가 잽싸게 그 앞을 막아섰다. 얼결에 시타는 교기의 가슴을 덥썩 끌어안았다.
“우이씨! 뭐야, 너? 왜 우리 사이를 방해해? 내가 뭐 치한이라도 되냐?”
시타가 이내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안야국에선 사내들끼리 끌어안는 민망한 짓, 안 한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닭살 돋는 행동은 삼가라.”
“야, 효령아! 이 기분 나쁜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냐?”
스무 살 동갑내기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하아. 한숨을 내쉰 효령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야국에선 남들 보는 데 끌어안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이놈이 지금 너랑 나 사이를 질투한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웃기지 말라 그래. 네놈이 아무리 어째도 효령인 네 거 안돼. 이미 우리 대장이 침 발랐거든?”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시타.”
효령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껏 내내 저 재수 없는 놈이랑 놀았으니까 이제부턴 나랑 놀아. 메롱!”
교기에게 혀를 내밀어 보인 시타가 효령의 손목을 붙들고 냅다 건물 안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