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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9화 (19/116)

19화. 집착

* * *

태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효령 그 계집은 그만 잊어라.」

「누, 누님!」

당황한 맹유천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계집이 발리안의 손에 넘어갔다면, 이 상황에서 너나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안 됩니다, 누님! 제가 얼마나 효령을 원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태후인 누님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 해도 효령은 이미 제 것이 아닙니까?」

「누가 그걸 모르느냐?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래도!」

「누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일이다. 놈이 효령처럼 반반한 계집을 가만 놔두었겠느냐? 벌써 몇 번은……. 지금쯤 효령은 놈의 계집이 되었을 게다.」

맹유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누님.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 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효령 그 계집이 무어라고 이러는 것이냐? 그 정도 반반한 계집은 쌔고 널렸다. 무희든 궁녀든 네가 원하는 계집은 몇이든 주마. 그러니 더는 그 얘긴 꺼내지 마라.」

평소 맹유천의 말이라면 깜빡 죽던 태후가 여느 때와 달리 안면을 바꾸었다.

「너도 보았잖느냐? 발리안, 그놈이 얼마나 교활하고 지독한지. 만약 그놈이 제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 장공주란 사실을 알았다간…….」

태후가 불쾌함에 진저리를 쳤다.

「이미 놈에게 빼앗긴 것만으로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한데 놈이 효령을 인질로 또다시 우릴 협박하거나 부마도위(장공주나 공주의 남편)랍시고 제 권리를 주장한다면…….」

태후가 못마땅한 얼굴로 맹유천을 바라보았다.

「효령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계집이라면, 먼저 나서 제 정체를 밝히진 않겠지. 그것으로 되었다. 더는 이 일을 키우지도 입에 담지도 마라. 그냥 잊어. 그게 모두를 위해 최선이다.」

태후의 태도가 너무도 단호하여 더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물러 나온 상태였다.

아직도 울분을 이기지 못한 맹유천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젠장! 내가 효령을 갖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장공주, 진효령. 그녀는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봉호(封號) 대신 이름으로 불리는 장공주였다.

선황제의 스무 번째 딸인 효령은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어미를 잃고 명국공부로 비접을 나갔다. 이후 선황제가 몸져눕는 바람에 제때 작위와 봉호를 받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장공주로 인정하고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 태후였다.

선황제가 죽고서야 겨우 황궁에 발을 들인 효령과 처음 마주쳤을 때. 맹유천은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로 절 올려다보던 사슴을 닮은 눈동자. 총기로 반짝이면서도 때 묻지 않은 순수. 그의 주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아름다움이 예고 없는 칼날처럼 맹유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물리도록 안은 탓에 계집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그의 심장이 난생처음 불같은 욕망으로 달아올랐다.

저 눈빛이 나로 인해 흐트러진다면…….

그날 이후, 맹유천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지독한 가슴앓이에 시달렸다. 눈을 감아도 떠도, 심지어 다른 계집을 품고 있을 때조차 효령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효령 넌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널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효령이 머무는 장공주 궁에 철마다 진상된 아름다운 의복들. 그것은 완벽한 그녀의 모습을 위해 맹유천이 직접 고른 비단들로 만들어졌다.

효령이 사용한 향료와 화장용품, 장신구와 신발 역시 그가 시간을 들여 손수 구한 것들이었다. 모두가 태후, 황후나 사용할 법한 최고급품들이었다.

외지에서 왔다며, 뒷배가 없다며 그녀를 무시하는 궁인들을 죽여 없앴고 그 주변을 새 궁녀들로 채웠다. 오직 효령을 위해 최선을 다할 사람들로. 그녀의 일과는 물론 만나는 사람들까지. 맹유천은 효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었다.

‘이 황궁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넌 줄곧 내 것이었어.’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단장한 효령을 보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기분이었는지. 그녀가 입었던, 그래서 그녀의 향내가 밴 옷들은 효령을 대신하여 늘 맹유천의 침상을 지켰다. 그 옷에 얼굴을 묻고 그녀와 함께 할 밤을 꿈꾸고 또 그렸다.

혼인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는 오롯이 맹유천 자신의 여자였다.

‘널 지키기 위해 난 아무 죄도 없는 성락 장공주를 죽이기까지 했단 말이다, 효령.’

성락 장공주는 자신을 담당하는 태의를 좋아했지만, 그와 관계를 맺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 성락에게 애먼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것이 바로 맹유천이었다. 자신의 애첩인 요희를 장공주들 틈에 끼워 넣기 위해서였다.

타고난 살수인 요희는 사내들을 다루는 데도, 죽이는 데도 능했다. 처녀 행세를 하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맹유천의 기대 대로 그녀는 단숨에 발타고를 사로잡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다, 기뻐했는데…….

‘빌어먹을!’

혹 효령의 눈에 거슬릴까 싶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딱히 거슬릴 것 없는 조강지처마저 가차 없이 해치웠건만. 철없는 소년처럼 가슴이 부풀어 신방을 새로이 꾸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러게 조금 더 일찍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 맹유천의 원망은 교기에게까지 달했다. 진작 그놈을 없앴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효령이 혼자서 궁을 탈출할 엄두는 내지 못했을 터.

소꿉친구인 그마저 없다면 효령이 너무도 외로울까 싶어 마지못해 살려두었던 것이 끝내 이런 화를 부르고야 말았다.

‘이쯤에서 내가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효령. 넌 절대 날 못 벗어나. 내가 널 되찾을 때까지 부디 몸가짐을 똑바로 하기 바란다. 만약 그 몸을 함부로 굴려 날 실망시킨다면…….’

맹유천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땐 날 피해 달아난 것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 * *

“흐음.”

두루마리를 읽고 있던 발리안의 미간이 흐려졌다. 모개가 유능한 것이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와 자신 단둘이 감당하기엔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다른 녀석들과 일을 나누자니 글은 둘째 치고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백성들의 대부분이 산으로 달아난 지금 상황이야 어떻게 버틴다 해도, 언제까지 이 상태로 지낼 수는 없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삭주를 다스리려면 제대로 된 아전과 관리들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싶었다.

“왜요, 무슨 고민 있어요?”

막 방에 들어선 효령이 그를 보고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발리안에게 다가온 효령이 그의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읽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은 발리안이 슬그머니 그녀의 머리를 밀어냈다.

“이렇게 불쑥 치고 들어오는 거…… 안 할 수 없나?”

피. 민망해진 효령이 입술을 내밀었다.

“이게 뭐 기밀문서라도 돼요? 나 믿어 주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설마 너, 나 아닌 다른 놈들과도 이렇게 바짝 붙어서 얘기하나?”

“내, 내가 언제 바짝 붙었다고……. 아니, 그거 말이 좀 이상하네.”

효령이 대꾸하다 말고 콧살을 찡그렸다.

“그럼, 사람이 말을 할 때 가까이서 하지 멀리 떨어져서 해요? 왜요? 내가 가까이 있음, 무슨 문제 있어요?”

후. 발리안이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는 좋은 녀석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둔하니. 대체 언제까지 일일이…….”

옆으로 몸을 돌린 발리안이 느닷없이 효령의 손과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 엄마야!”

순식간에 그녀는 탁자 위에 눕혀졌다.

효령이 바둥대지 못하도록 누른 발리안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때, 지금 기분이?”

당황한 효령이 그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하, 하나도 재미없어요. 놔줘요.”

발리안이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려놨다.

“이제 알겠나?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오지 말라고 한 말…….”

“그, 그게 이,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몰라?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이지?”

“……!”

발리안이 효령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한쪽 무릎이 효령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붉은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내려왔다.

“저, 저기…… 바, 발리안!”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느닷없이 문이 열렸다.

“있잖아요, 대장. 밖에 대장을 찾……!”

호들갑스럽게 방에 들어서던 시타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입에서, 내내 씹고 있던 양고기 육포가 툭, 하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 시타!”

당황한 효령의 얼굴이 빨개진 것과는 달리, 발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차가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시타가 황급히 눈을 감았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대장. 나 아,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니, 봤어도 다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하, 하던 거 마저 해요, 두 사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시타가 요란하게 문을 닫고 후다닥 사라졌다.

“나 몰라. 어쩜 좋아!”

귀까지 달아오른 효령이 발리안의 가슴을 사정없이 밀쳐냈다.

“그러게 왜 이런 장난을 쳐서는……. 앞으로 시타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요. 대장 미워, 정말 미워 죽겠어!”

효령이 창피함을 이기지 못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 장난? 하…….

발리안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효령을 내려다보았다.

야만족은, 고운 건 사내라도 가만 놔두지 않는단 말을 그새 잊은 것인지. 동료가 된 지금도, 효령만 보면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는 놈들이 적지 않았다.

한데, 당장 뼈에 새겨도 시원찮을 이 무시무시한 교훈을 겨우 장난으로 받아들이다니……. 이 경계심 꽝에 눈치도 없는 토끼를 대체 어떡해야…….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그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순간.

으흠. 밖에서 소심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대장.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모개가 전하란 말이 있어서……. 좀 전엔 너무 놀라서 깜빡했지 뭐야? 대장을 꼭 만나야 한다고 사정하는 사람이 있…….”

“저기요, 시타!”

미끄러지듯 탁자에서 내려온 효령이 문으로 달려갔다. 벌컥, 문을 연 그녀가 시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타. 조, 조금 전 그거 오해예요. 대장이 짓궂은 장난을……. 어서 들어와요.”

“정말?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시타가 미적거리며 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발리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히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음. 시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진짜 장난이었다고? 대장이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뭐지? 이거 꼭 사랑싸움하는 분위긴데…….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리안과 효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발리안이 시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그거, 무슨 얘기야?”

“아, 맞다!”

그제야 용건을 깨달은 시타가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경계를 나갔던 놈들이 수상한 사람을 붙잡았대요. 지금 옥에 갇혀 있는데…… 거, 이름이 뭐라더라? 교 뭐라고 했는데. 암튼…… 그 사람이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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