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새로운 세상 6
* * *
“세상 어디에도 한 번에 난 길은 없어. 특히,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특별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지.”
발리안이 허공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거 아나? 초원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말이야.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말이 없으면 꼼짝도 못 하지. 그 말을 돌보는 게 누구……!”
실컷 물을 때는 언제고. 효령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낮은 한숨을 내쉰 발리안이 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을 돌보는 자들을 우리는 ‘말치기’라고 부르지.”
너른 초원과 사막. 모래와 강이 수시로 길을 바꾸고, 다른 마을을 만나는 일이 꿈처럼 까마득한 곳. 오늘 있던 나라가 내일은 폐허가 되는, 생존을 위한 전쟁으로 해가 뜨고 지는 곳. 그 광활하고 척박한 땅을 지배하려면 말과 낙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말치기는 주인의 말과 낙타를 돌보는 자들이었다. 여름이면 좋은 초지를 찾아 말과 낙타를 배불리 먹이고 겨울을 대비하여 건초를 준비하는 것. 병에 걸리지 않게 사육 환경을 조절하고 독초를 먹었을 때는 적절한 조치를 하는 것. 훈련을 마친 말들의 발굽을 관리하고 흥분을 달래는 것.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은 탓에 숨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티를 내지 않는 낙타의 상태를 미리미리 파악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넉넉한 풀도, 병든 동물을 고칠 약도 구하기 어려운 땅에서 좋은 말치기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남쪽으로 가, 리안. 거기서 네 운명을 찾아.」
「그게 내 운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보면 안단다. 나도 그랬으니까. 운명은 그런 거야, 리안.」
오래전 들었던 목소리.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생생히 귓가에 되살아났다. 발리안은 쌔근쌔근 단잠에 빠진 효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뺨을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말씀이 맞았습니다, 어머니. 처음 본 순간 알았어요. 이 녀석이 내 삶을 바꿔놓을 거란 걸.’
발리안은 양털 이불을 끌어 효령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 동료들은 날 달리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넌…… 틀림없이 최고의 말치기가 될 거다, 효령.”
* * *
“그렇게 재미있어요?”
효령이 발리안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딱 봐도 발리안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는 다리가 풀려 당장 쓰러질 지경인데.
문제는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효령은 어느 순간, 인정사정없이 밀려오는 메스꺼움에 퍼뜩 눈을 떴다.
「‘미, 미쳤어!’」
화들짝 놀란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잠결에 한 짓이 탈이 난 속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효령은 원래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발리안의 품으로 기어든 것은 둘째 치고 그 허리를 보물단지 잡듯 꽉 끌어안고 있었다. 발리안은 두 손을 머리맡에 둔 채 그녀의 포로가 되어 일자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당황한 효령은 그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기 무섭게 여지없는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벌써 일어났나? 하긴, 그 속에 편히 자는 건 무리겠지.」
「미안해요. 나 때문에 깼죠?」
「너 때문에 깬 게 아니라, 아예 잠을 못 잤다.」
「……?」
「코 고는 놈, 냄새나는 놈은 수도 없이 겪어봤지만 너 같은 놈은 정말…….」
발리안이 말을 하다 말고 진저리를 쳤다.
「왜, 왜요? 내, 내가 어쨌는데요?」
당황한 효령이 말을 더듬었다. 조금 전 제 행동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낯이 뜨거운데 거기서 더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인지. 뜨끔하다 못해 모골이 송연해졌다.
「시타 놈은 늘 내 가슴에 발을 올려놓더니, 넌 날 끌어안고 뺨을 비벼대질 않나. 그것으로 모자라…….」
「……?」
「끊임없이 내 가슴과 배에 입을 맞추더군. 네 녀석 머리통이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걸 붙드느라……. 정말 오해하기 딱 좋은 행동만 골라 하던데?」
「서, 설마요!」
화르륵, 효령의 얼굴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후끈 달아올랐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던가. 이 입술 자국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아직 실내가 어둡다는 게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효령의 이마에 어느새 진땀이 솟기 시작했다.
「사내인 날 상대로 그런 행동이 자연스레 나오는 걸 보니……. 교기랬던가? 혹 그놈과…….」
「마, 말도 안 돼! 이상한 소리 말아요. 교기랑 난 그냥 친구…….」
너무 당황스러워 손을 휘저은 순간. 메스꺼움이 극에 달했다.
「우욱.」
효령은 입을 막고 방을 뛰쳐나갔다.
그 후, 날이 밝고 오전이 다 가도록 효령은 내내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온몸의 힘이 쫙 빠진 데다 머리가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녀는 지금 막 마지막으로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주의 세계에 입문한 걸 축하한다.”
“입문?”
효령이 발리안을 살짝 흘겨보았다.
“곧 믿기지 않을 만큼 속이 편안해질걸? 그러고 나면 앞으로 유주를 마시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을 거다. 탈도 나지 않을 거고.”
“설마요.”
“그 말 참 자주 사용하는군. 내가 언제 너를 상대로 거짓말한 적이 있던가?”
효령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여러 번요.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단둘만 있으면 위험할 거라고도 했어요. 또 늘 이길 때까지 싸운다고도 했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걸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군. 내내 먹지도 못하고 기운이 없을 테니 오늘은 들어가 쉬어. 좀 눕든가.”
“아뇨. 차라리 다 토하고 나니까 편안해요. 다들 일하는데 나만 쉴 수 있나요? 나도 내 몫은 해야죠.”
구토와 설사로 허옇게 질렸던 효령의 얼굴에 어느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 *
해가 질 무렵, 모개가 빠른 걸음으로 정청에 들어섰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환한 표정이었다.
그가 발리안과 아굴가, 호독니가 앉은 탁자로 다가왔다.
“정말 대단한데요, 효령이…….”
“효령이가 왜?”
발리안의 질문에 모개가 눈을 반짝였다.
“그 녀석, 사람 다루는 수완이 보통이 아닙니다. 겁에 질린 피난민들에겐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빠를 거라더니…….”
“……?”
“당장 우리 군사들의 더러운 옷과 이불을 죄 걷어다 안야국 여인들 앞에 쌓아 놨습니다. 삯을 줄 테니 빨라고요.”
“그래서?”
“효령이 말마따나 처음부터 그 말이 먹히겠습니까? 겨우 한두 사람만 나서 이불을 빨았습니다. 한데 효령이 정말 그 사람들에게 삯을 지불하니…….”
모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많던 빨래가 순식간에 새하얘졌습니다. 효령이 녀석. 사람들이 제게 관심을 보이자 그제야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야국과 기탄 사이에 조약이 맺어져서 더는 살육과 약탈이 없을 거라고요.”
“…….”
“저처럼 힘없는 사람도 기탄 군사들 틈에서 아무 일 없이 잘만 지낸다면서……. 울며 떨 시간에 자식들을 위해 어떻게든 살 궁리부터 하라고요.”
“…….”
“그뿐이 아닙니다. 앞으로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어느 틈에 피난민들을 몇 무리로 나누고 그 대표까지 뽑아놨지 뭡니까? 거기다…….”
“……?”
“골치 아픈 포고문요. 효령이 여자들과 노인 중에서 글을 쓸 줄 아는 이들을 찾아내더니…… 해가 지기도 전에 수백 장의 포고문을 다 완성했습니다. 여기…….”
모개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쓰윽, 한눈에 읽어 내린 발리안의 입매가 휘어졌다.
“제법이군. 허세가 없는 것이 마음에 드는데. 내일 당장 삭주의 모든 거리에 붙이도록 해라.”
“예.”
포고문을 다시 받아든 모개가 말을 이었다.
“효령이…… 머리 쓰는 것이나 여기 이 글만 봐도 보통 녀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보물을 주운 것 같습니다.”
아굴가가 그들의 대화 틈으로 끼어들었다.
“근데 대장. 그걸로 먹히겠습니까?”
“아니.”
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포고문이 통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이건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우리가 그들을 달리 대할 거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들이 안정되면 숨어 있던 놈들도 알아서 기어 나올 테니까.”
“대장. 대장은 그 효령이란 놈을 믿습니까? 놈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런 큰일을 맡기는 겁니까?”
호독니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다 그 녀석이 안야국 놈들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날엔……. 놈이 안야국 놈들을 감싸고도는 것을 대장도 봤지 않습니까? 그놈은 우리가 아니라 안야국 편입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호독니, 그래서 효령을 믿을 수 있는 게다. 너 같으면 하루아침에 나라를 버리고 우리 같은 야만족에게 빌붙는 놈을 믿을 수 있겠나?”
“그, 그건…….”
아굴가가 할 말을 잃은 호독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놈 말고 대장을 믿어라, 호독니. 도적 떼가 버리고 간 너를 이 자리에 앉힌 것만 봐도 알지 않냐? 대장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는 걸.”
“…….”
“솔직히 대장이 처음 다친 네놈을 데려왔을 때,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도적질로 빌어먹던 놈이니 의리는 개뿔, 우리 뒤통수나 칠 거라고. 하지만 아니잖냐? 시타는 또 어떻고?”
“…….”
“그 비실비실한 놈이 흥정을 그렇게 잘할 줄, 너나 난 짐작도 못 했잖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죄 반값에 구해오잖아?”
발리안이 호독니에게 말했다.
“어차피 점령지에서는 그곳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이 필요하다. 효령은 명국공과 친척이니 이곳 사람들을 설득하고 움직이는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
“…….”
“하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으니 명심하지. 그런 의미에서 네가 믿을 만한 녀석으로 효령에게 사람을 붙여도 좋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순간, 호독니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물론. 너나 아굴가, 모개는 내가 누구보다 신임하는 수하들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내가 모를 리 없지 않나? 좋을 대로 해라.”
발리안이 시원스럽게 허락했다.
“고맙습니다, 대장.”
호독니가 허공을 향해 야릇하게 눈을 빛냈다.
‘효령이라고 했지? 어디 두고 보자, 네놈.’
* * *
“빌어먹을!”
처소에 돌아온 맹유천의 얼굴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어떻게 누님이 나에게 그러실 수가 있나? 응? 어떻게!”
조금 전, 자신을 향하던 태후의 냉랭한 눈빛을 떠올린 맹유천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모든 사달은 아까 늦은 저녁, 위주 도독으로부터 받은 서신에서 비롯되었다.
[면목 없습니다, 형님. 효령 장공주님을 발리안에게 빼앗겼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효령을 누구에게 빼앗겨?
분노로 눈이 뒤집힌 맹유천은 이 일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시간도 잊고 당장 태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남총(男寵)으로 들인 미소년과 막 잠자리에 들려던 듯 꽤 느슨한 차림이었다. 소년은 얼마 전 맹유천이 태후를 위해 새로 데려온 자로 요즘 한창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 밤중에 유천이 네가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누님.」
맹유천이 침을 튀겨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