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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7화 (17/116)

17화. 새로운 세상 5

* * *

“아버지가 굶주린 백성들을 책임지려고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겠죠. 그럼 광산 문제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쯤 우리 가족은…….”

한유가 성난 얼굴로 효령을 노려보았다.

“난 그자가 날 구했다는 말 안 믿어요, 누님. 처음부터 날 이용하려는 계산으로 살려뒀을 거라고요. 누님도 정신 차려요. 그자가 누님과 날 오래 살려둘 것 같아요?”

“한유야.”

“아니지. 무기를 생산할 철광석이 그자 손에 들어갔으니 어차피 이 나라는 그들 손에 끝장날 거예요. 살아 있어도 우린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요. 어떻게 그런 자와 손을 잡을 수 있어요?”

“그게 아니라, 한유야. 내 말 좀…….”

“나더러 그자 앞잡이가 되라고 말할 거면 그만 가세요, 누님.”

한유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한유야!”

“…….”

효령의 팔을 붙든 교기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효령은 그 손을 떼어 내고 한유 앞으로 다가섰다.

“난 태후마마께 복수하기 위해 그와 손을 잡은 게 아니야. 내가 여기 온 건, 널 구하기 위해서였어. 넌 내 유일한 혈육이니까, 동생이니까.”

“…….”

“가족이 죽었는데 우리만 살아남은 거, 나도 마음이 아파. 가슴이 찢어져. 그렇다고 언제까지 자기연민에만 빠져 있을 순 없어. 이대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살 거야. 살아서 행복해질 거야. 그게 복수라고 생각해. 태후마마를 파멸시키자고 내 영혼을 부수는 게 아니라 태후마마가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

“그러기 위해 난…… 반드시 너와 이곳, 삭주를 지켜낼 거야. 내 방식대로 백성들과 안야국을 지킬 거라고. 여기, 그 사람 곁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으니까.”

그녀가 침통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만 갈게. 나중에 또 보자, 한유야. 그땐 꼭 널 여기서 빼줄게.”

효령이 교기에 앞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자. 장공주님은 흑야차와 손을 잡은 게 아닙니다. 그의 곁에서 기탄이 폭주하는 걸, 그래서 안야국이 멸망하는 걸 막으시려는 겁니다.”

한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국공과 장공주님을 생각하셔서 몸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공자.”

그의 등에 고개를 숙여 보인 교기가 효령을 따라 방을 나섰다.

* * *

효령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발리안의 처소로 들어섰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발리안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군. 애썼다. 고단할 테니 먼저 들어가 자.”

“저기요.”

효령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탁자에 팔을 기댄 그녀가 발리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좀 물어도 돼요, 대장?”

효령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장’이란 말에 발리안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가 애써 태연을 유지하며 물었다.

“뭐가 궁금한데?”

“어떻게 그렇게 매번 이겨요? 흑야차가 졌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

순간, 발리안이 지도를 덮으며 효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넌 늘 날 놀라게 하는군. 내가 흑야차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간단해요. 저거…….”

효령이 한쪽에 놓인 갑옷을 가리켰다. 기탄의 갑옷은 기동성을 위해 금속이 아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훨씬 가볍고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투구가 없잖아요.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끄는 대장에게 투구 없는 갑옷이라니 이상하잖아요.”

“이런, 엉뚱한 데서 정곡을 찔렸군.”

그가 멋쩍게 웃으며 턱을 쓸었다.

“대답해 봐요. 어떻게 그렇게 매번 이겨요?”

“내 대답도 간단해. 이길 때까지 싸우면 되니까.”

“정말 김새는 대답이네요.”

후우. 효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대장이 ‘싸움에는 타고난 천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니면 타고난 전사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겁이라고는 모른다거나.”

“실망시켜 미안하군.”

“대장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요. 이길 때까지 싸우는 사람을 어떻게 당해. 차라리 천재를 상대로 싸우는 게 낫지. 그럼 포기하기 쉬우니까. 져도 변명할 말이 있으니까.”

“…….”

“그러고 보면 하늘은 참 불공평해요. 대장같이 뛰어난 사람이 그렇게 노력까지 하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어쩌라고요. 정말 세상 살기 싫어지게…….”

갑작스러운 불평에 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효령은 아까 낮에 봤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말도 스스럼이 없는 데다 눈빛도, 자세도 느슨해져 있었다.

“혹시…… 취했나?”

효령이 손사래를 쳤다.

“지금 이 상황에 술이 말이 돼요? 그게 뭐라더라? 양젖으로 만든 거라던데……. 시타가 기운 없어 보인다면서 마시라고 줬어요. 먹으면 힘이 나는 음료라면서.”

“예락 말인가?”

“맞아요, 그거. 처음엔 시큼하고 비린내도 심해서 코를 막고 마셨는데 끝에 가니 고소한 게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커다란 그릇으로 두 잔이나 마셨지 뭐예요?”

효령이 동작까지 취해가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발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취한 거 맞군.”

“취한 거 아니라니까요.”

“그거 술이야. 유주(乳酒)라고. 우리에겐 물이나 다름없지만…….”

유주는 말, 염소, 야크, 양 등 초식 동물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기탄 사람들이 물 대신 마시는 음료였다.

그중 예락(䍲酪)은 특별히 양젖으로 만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이 귀한 데다 오염된 경우도 많아 생겨난 풍속이었다. 유주는 아이나 여인들도 마시는 만큼 대체로 순하지만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독한 것도 있었다.

거친 사내들만 득실대는 이곳에 순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평생을 마셔온 탓에 독하다고 취하는 놈도 하나 없었다. 말 그대로 이들에게는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세상에 그렇게 고소한 술이 어디 있어요? 시큼해서 그렇지 술 냄새도 안 나던데. 이래 봬도 나도 술은 꽤 마셔봤다고요.”

“술을 먹으면 고집이 세지는군.”

한숨을 내쉰 발리안이 고갯짓으로 탁자 옆, 의자를 가리켰다.

효령은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의자로 다가갔다. 순간순간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용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가 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번엔 뭐?”

“……왜 죽였어요?”

“……?”

“이전에 사람들이 숨은 절에 불을 놓은 일 말이에요. 힘없는 백성들이었잖아요. 아까 낮에 그랬죠? 이익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백성들을 죽여서 대장이 얻은 이익이 뭐였는데요?”

팔짱을 낀 발리안이 시퉁하게 물었다.

“뭐였을 거 같나?”

“안야국 황실과 조정을 겁먹게 만드는 거? 그래서 당신 마음대로 휘저으려고요?”

“…….”

“말해줘요. 꼭 알고 싶어요.”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

“대장에겐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내겐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니 얘기해 줘요.”

“‘그냥 재미로……’, 라고 했다간 더는 내 얼굴을 안 볼 기세로군.”

“말 돌리지 말고요.”

훗. 발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아주 간단해. 나와 내 동료들, 우리가 살기 위해서였다.”

“살기…… 위해서요?”

“기탄의 태자 발타고는 의도적으로 안야국에 들어오는 걸 늦췄어. 우리, 아니 내가 죽길 바라서지. 날 아주 싫어하거든. 원군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 반란군의 잔당들만 따로 골라낼 시간이 없었다.”

“…….”

“우린 수적으로 한참 열세였어. 내 군사들은 겨우 오천에 불과한데 반란군은 그 열 배가 넘었으니. 그러니 반란군의 잔당들에게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줬다간 우리가 위험하지. 게다가 태후에게 질린 백성들이 그들에게 동조하고 나선다면…….”

“…….”

“가장 빠르게 적을 제압하고 더불어 안야국 백성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미리 단속하는 것. 나아가 황실과 조정까지 위협하기 위해서였다면……. 설명이 됐나?”

털썩, 탁자에 엎드린 그녀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해했어요.”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부러워요. 대장도, 시타도, 아굴가도…… 모두가 강해요. 우리 안야국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살아온 삶을 안다면 전혀 부럽지 않을걸?”

“…….”

“이길 때까지 싸운다는 건 거짓이야. 우리에겐 한 번 지면 다음이 없으니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게, 우리가 늘 승리하는 이유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말속에서 느껴지는 지난한 삶의 무게.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서 효령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저기요.”

한동안 머뭇거리던 효령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왜 날 받아줬어요?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죠? 내가 한유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걱정도 안 돼요? 내가 안야국이 보낸 첩자일 수도 있잖아요.”

발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날 우습게 보는군. 역시,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무지한 야만족 취급인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난 그저…….”

“내가 사는 곳엔 이런 말이 있지. 초원의 전사는 눈이 밝아 놓치는 것이 없다……. 난 네가 못 보는 걸 봐. 매의 눈을 가졌거든.”

자리에서 일어선 발리안이 효령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 앞에 멈춰 선 그가 효령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넌 로흐샨이야. 나와 같은 어둠이 없어.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놈이 첩자라니, 말이 안 되잖아?”

말을 마친 발리안이 예고도 없이 효령을 번쩍 안아 들었다. 효령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코앞에서 보는 그의 옆모습이 너무도 근사해서 핑하니 현기증이 일었다.

침소로 들어간 발리안이 효령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만 떠들고 자. 너 지금 많이 취했어.”

발리안이 커다란 손으로 효령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툭툭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가슴이 울컥했다. 효령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 왜 날 받아줬어요? 이렇게 간단한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해내는데……. 나 받아준 거 후회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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