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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6화 (16/116)

16화. 새로운 세상 4

* * *

“똑똑하긴 한데 생각보다 성질이 급하군. 내가 왜 그들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 그건…….”

발리안의 질문에 효령이 살짝 당황했다.

“난 이익이 없는데 사람을 죽이진 않아.”

훗. 발리안의 입매가 이내 한쪽으로 비틀렸다.

“하긴, 너희 눈에 우린 사람 죽이는 데 환장한 야만족일 뿐이니까.”

팔짱을 낀 그가 삐딱한 표정으로 효령을 바라보았다.

“내가 포고문을 그럴듯하게 만들라는 건,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으면 ‘죽이지 않을 테니 나와라’, 하면 그 말을 믿고 순순히 기어 나올 텐가?”

이전에 발리안이 벌인 살육으로 안야국 백성들은 기탄이란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기탄군의 잔인함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많은 수의 피난민들이 있었다. 그들이 겨우 포고문 몇 줄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효령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숨은 자들을 밖으로 끌어내려면, 먼저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킬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얼마쯤 잘해 준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 대한 의심을 쉬이 풀 리 없으니까.”

“그 말은…… 정말 안야국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거죠? 일에 대한 삯도 줄 건가요?”

“빌어먹을 삯은 무슨? 원래 광산에서 일하는 건 약해빠진 노예들이야. 죽이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

호독니가 욱해서 끼어든 순간, 뒤에서 시타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광산 노예들이 가장 많이 도망치는 거라고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모두의 눈이 시타를 향했다.

평소 유쾌하고 반죽 좋기로 유명한 시타가 흥분해 숨을 씩씩거렸다. 그는 과거, 강옥 광산의 노예로 지낸 전력이 있었다.

“그러지 마요, 호독니.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몰라요. 거기 노예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다들 우리를 짐승이라고 부르지만, 광산 노예들은 짐승도 못 돼. 한 번만 밟아도 찍소리 못하고 죽는 벌레라고요.”

“…….”

“거긴 나락이에요. 멀쩡하던 사람도 금세 반송장이 돼요. 숨을 쉴 때마다 사람 속을 녹이는 독한 연기와 가루 때문에 목이 아파요. 아무리 벌레나 다름없는 노예라도 누구도 거기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

“나도 알아요. 초원에서는 약해빠진 게 죄라는 걸. 난들 그렇게 태어나고 싶었겠어요? 나도 호독니처럼 멋진 전사가 돼서 초원을 누비고 싶었다고요.”

시타의 외침에 호독니가 입을 다물었다. 날 때부터 머리에 박힌 생각이 쉽게 변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시타의 절규를 완전히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효령이 호독니를 보고 말했다.

“먹이도 주지 않는 주인을 위해 죽도록 달리는 말이 있을까요? 채찍에 맞는 노예가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 좋은 무기를 만들어 줄 것 같나요?”

“…….”

“이제껏 안야국 백성들은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반발이 일어나겠죠. 그땐 어쩔 거죠? 또 그들을 죽일 건가요?”

“…….”

“만약 그들을 죽이면 안야국과 맺은 약조는 깨지게 될 거예요. 그럼 그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 같나요?”

“…….”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나쁜 길을 택할 건 없잖아요.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해줘야 여러분들에게도 이익 아닌가요?”

끄응. 그를 것 없는 말에 호독니가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대신 발리안이 입을 열었다.

“여긴 초원이 아니니 우리 방식만 고집할 수는 없지. 시타.”

시타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왜요, 대장?”

“광산을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생각해 둬. 작업 시간, 일정, 배급, 삯, 운반, 전부…….”

“내, 내가요?”

당황한 시타가 눈을 끔뻑거렸다.

“널 빼면 여기 광산에 대해 아는 놈이 하나라도 있나?”

“그, 그야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큰일을……?”

“처음부터 큰일을 하도록 태어나는 놈은 없어. 나중에 관련자들을 찾아서 붙여줄 테니 겁먹지 말고 한번 해 봐.”

“잘됐어요, 시타. 시타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나도 힘껏 도울게요.”

“고, 고마워.”

효령의 말에 시타가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으로 큰일을 맡은 데 대한 벅참과 설렘,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넌…….”

발리안이 효령에게 말했다.

“여기 남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숨어 있는 자들을 제 발로 나오게 할 방법을 찾아. 삯을 치르겠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해”

효령이 발리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방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 * *

탁.

효령이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에서 거친 반응이 돌아왔다.

“꺼져. 네놈들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너희 대장을 만나게 해줄 게 아니면 차라리 날 죽여.”

“……한유야.”

“……!”

익숙한 목소리에 어두컴컴한 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소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 설마…… 효령 누님?”

“그래, 나야. 효령이야, 한유야.”

“누님!”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한유가 효령을 향해 달려왔다. 미친 듯 효령의 품에 안긴 그가 상처받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누님. 아버지, 어머니, 승유 형님이 돌아가셨어요! 빌어먹을 흑야차가 모두 다 죽여버렸다고요.”

무시무시한 야만족 틈에 갇혀 두려움과 분노로 보낸 시간들. 효령의 등장에 그간 꾹꾹 눌러 온 한유의 감정이 일시에 폭발했다. 그가 폭포수처럼 가슴에 담긴 울분을 토해놓았다.

“왜 나만 살려뒀는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그때 나도 죽었으면. 눈만 감으면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님이 보여요.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나 미칠 것 같아요. 어쩌자고, 어쩌자고 나 혼자만 살아서…….”

한유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족의 원수를 갚겠다며 기탄 군사들에게 무모하게 덤볐다가 이곳에 갇혔다.

“한유야.”

효령이 울먹이는 한유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나이 열다섯. 모든 걸 홀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나이였다. 그간 한유가 겪었을 고통과 공포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상처를 다독이듯 효령은 몇 번이고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한바탕 감정의 폭풍이 지나고 난 후에야 한유가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근데 누님.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설마 누님도 놈들에게……?”

효령이 고개를 저어 다시금 흥분할 것 같은 한유를 안심시켰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 한유야.”

한유를 의자에 앉힌 효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한유야. 외숙을 죽인 건 흑야차가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님? 그자가 아니면 누가……?”

“……태후마마.”

순간, 한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 누구요?”

“네 가족을 죽인 건…… 태후마마와 재상 추엽, 형부 상서 맹유천이야.”

효령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한유의 얼굴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쾅쾅쾅. 분노에 찬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요, 절대!”

“한유야.”

“철광석이 그렇게 욕심나거든 차라리 그냥 달라고 할 것이지. 그걸 뺏자고 죄 없는 우리 가족을……. 그간 아버지가 얼마나 이 나라에 충성을 다했는데…….”

“그래, 네 말이 맞아. 그걸 알고 나니 끔찍해서 더는 황궁에 못 있겠더라. 그래서 널 찾으려고 궁을 빠져나왔어. 설마설마했는데 이렇게 널 다시 만나다니…….”

효령이, 부르르 떨고 있는 한유의 손을 붙들었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다친 데 없이 무사해서…….”

한유가 어금니를 사리물며 물었다.

“그럼 흑야차는…… 누님 말마따나 우리 가족을 도륙 낸 게 태후라면, 그럼 흑야차는요?”

“그 사람이 널 구했어.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불가능했을 거야.”

“말도 안 돼. 그 작자가 왜 날 구해요? 그 살인마가 왜요?”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몰라. 외숙께 인사차 들렀다가 널 구했다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죠.”

막 문을 열고 들어서던 교기가 말했다.

“형님!”

한유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기는 죽은 형 승유의 동무인 데다 어려서부터 다 함께 어울려 자란 까닭에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탁자 곁으로 다가온 교기가 자신을 끌어안는 한유의 등을 토닥였다.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교기가 탁자에 자리를 잡자마자 한유가 다급히 물었다.

“형님, 조금 전 한 말이 뭐예요? 흑야차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니요?”

힐끗, 효령을 한 번 쳐다본 교기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흑야차는 처음부터 태후마마의 계획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태후마마를 협박하고 삭주를 빼앗을 증거로 삼고자 공자를…….”

“아니.”

효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계획이었다면 애초부터 기탄에서 보내는 칙서에 삭주를 내놓으라는 말이 적혀 있었겠지. 하지만 아니었어. 발리안이 태후마마께 삭주를 청한 건 즉흥적인 결정이야. 그가 그 말을 꺼냈을 때 기탄 쪽 사신들도 다들 놀랐으니까.”

“발리안?”

“그래, 발리안. 그게 흑야차의 이름이야. 날 여기 보낸 것도 바로 그 사람이야.”

한유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효령을 쳐다보았다.

“그자가 누님을 왜 여기 보낸 건데요? 설마, 가족 상봉을 하라고 보낸 건 아니겠죠?”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장공주라는 것도, 여자라는 사실도. 너와 내가 먼 친척인 줄만 알아.”

“그런데요?”

“널 설득하라고 날 보냈어.”

“설득?”

“삭주가 이전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해. 네가 있으면 달아난 백성들이 안심하고…….”

“오호라.”

한유가 비틀린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누님이 여기 왜 왔는지 알겠네요. 태후에게 복수하려고 그자와 한편이 됐다는 얘기잖아요, 지금.”

“한유야.”

“미안하지만 난 빼줘요, 누님. 난 태후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자도 믿을 수 없으니까. 그자가 사람들을 몰살하지만 않았어도 백성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지도 않았을 거고, 아버지가…….”

그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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