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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5화 (15/116)

15화. 새로운 세상 3

* * *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교기는 겁에 질린 효령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효령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굴가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지금 우리 공자를 두고 뭐 하는 짓이야?”

검을 든 교기의 위협에도 아굴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도 생각이 있으면 끼든가. 대신 그 막대기는 치우는 게 좋을 거다. 너희 공자를 지키려면 적어도 살아는 있어야지.”

탁.

말을 채 마치기도 전, 아굴가가 교기의 손목을 쳐 검을 저만치로 날려버렸다. 연이어 턱을 치고 들어온 커다란 주먹에 교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주변의 야만족들이 들러붙어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몸으로 짓눌렀다.

“놔. 이거 놓으라고!”

“교기야.”

아굴가가 교기를 향해 달려가려는 효령의 손목을 붙들었다.

“네놈이 빠지면 말이 안 되지.”

강제로 효령을 붙든 아굴가가 교기를 향해 말했다.

“알아둬라, 애송이. 실력이 안 따라주는 용기는 죽음만 재촉할 뿐이다. 그렇게 함부로 나대기 전에 실력부터 키워.”

아굴가가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더는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끝내자.”

아굴가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냈다. 그 몸집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큰 칼이었다. 거기 대니 아까 교기의 것은 아굴가의 말마따나 막대기에 불과했다.

아굴가가 자신의 칼을 세 사람 앞으로 던졌다.

“이걸로 다리를 잘라라. 가장 빨리 자르는 놈이 이놈의 주인이다.”

허억. 세 사람을 비롯하여 둘러선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굴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뭘 그리 놀래? 나니까 다리 하나지, 대장에게 걸리면 사지가 다 떨어져 나갈 텐데…….”

그 말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너희들 정말 배짱도 좋다. 대장이랑 한 침상을 쓰는 놈을 탐내다니. 세상 살기 싫어졌냐?”

어느새 키가 큰 야만족의 목말을 타고 있는 시타였다. 그가 효령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었다. ‘대장’이라는 말에 둘러선 야만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 저놈이 대장과 잤다고?”

“저, 정말이냐, 시타?”

시타가 우쭐대며 말했다.

“그럼,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냐? 대장의 최측근인 내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오늘 아침 대장이랑 저 녀석이 한방에서 나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효령을 차지하겠다고 서 있던 세 사람이 아굴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굴가. 모, 몰랐습니다. 밤 내 새로운 놈들이 들어왔다고만 들었지 자세한 내용은…….”

“잘못했습니다. 아굴가.”

“용서해 주십시오. 대, 대장께는 아무 말도…….”

아굴가가 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야 좀 겁이 나는 모양이지?”

“처음부터 알았으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예?”

“좋다. 몰라 그랬다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주지. 대신…….”

아굴가가 그들을 험악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이 녀석의 이름은 효령이다. 앞으로 네놈 셋, 아니 거기 자빠진 놈까지 넷이서 잘 지켜라. 효령에게 추근대거나 건드리는 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알았나?”

“예.”

아굴가가 바닥에 억지로 눌려있는 교기를 향해 눈을 돌렸다.

“너. 어제도 느꼈지만, 내 주먹을 맞고도 기절하지 않다니 맷집이 제법이로군. 따라와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만족들이 교기를 붙든 손을 풀었다. 효령이 얼른 교기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다들 배 든든히 채우고 조금 있다 다시 모여라. 오늘부터 바빠질 테니 각오 단단히들 하고. 알았냐?”

“예.”

일사불란한 목소리가 아침의 찬 공기를 뒤흔들었다.

* * *

“대장.”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발리안은 수하들과 관사의 정청(政廳)에 모여 삭주의 현안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다 뒤져 봤지만, 명국공부를 제외하고, 삭주 도독을 비롯하여 방귀깨나 뀐다는 놈들의 집은 싹 다 비었습니다. 돈과 패물만 챙겨 급히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발리안의 수하 중 삼인자로 꼽히는 호독니가 말했다. 그는 뺨에 난 상처가 선뜩해 보이는 무시무시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아무래도 삭주 도독이 쉬쉬하면서, 아랫놈들에게는 우리가 삭주를 접수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반 백성들까지 알게 되면 혼란 때문에 자신들이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안야국 백성들은 어쩌고 있나?”

“우리가 이곳에 나타나자 겁을 먹은 놈들이 여기저기 산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젊은 놈들은 죄 달아나고 늙은이와 애새끼들, 계집이 대부분입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일러뒀겠지?”

“예.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장 명이라면 대가리가 깨져도 지키는 놈들 아닙니까? 그나저나 산으로 숨은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나서서 들쑤시면…….”

“제 발로 기어 나올 때까지 놔둬.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모개, 포고문을 만들라는 건 어떻게 됐나?”

“그게…….”

발리안군의 행정 책임자인 모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10년간, 삭주가 기탄의 영토가 되었음을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남아 있는 안야국 백성들이 전혀 협조하려 들질 않습니다. 하나같이 글을 모른다며 울기만 하고…….”

“…….”

“마침 우리 쪽에도 같은 글을 쓰는 대현국 출신이 있어서 물어보니 보고 읽는 것만 가능하다고……. 그래서 제가 직접 해보려니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대장.”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기탄은 오래전부터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전쟁과 유목으로 떠도는 일이 많다 보니 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안야국을 비롯하여 주변 나라들이 기탄을 무시하는 데는 그 영향이 매우 컸다.

발리안의 수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굴가를 비롯하여 거의 모두가 까막눈이었다. 때문에,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을 아는 모개가 오히려 희한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모개는 기탄의 관리 출신으로 이들 중 최고 연장자였다.

“하는 수 없군. 이따 내 방으로 와라. 초안을 써줄 테니.”

순간, 아굴가가 발리안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대장. 효령이 놈 여간 아니게 보이던데 그놈한테 맡기는 게…….”

“효령이 누군데?”

발리안의 반응에 아굴가가 뻥한 표정을 지었다.

“밤새도록 데리고 있었으면서 그놈 이름도 모릅니까?”

그제야 효령이 누구인지 눈치챈 발리안의 미간이 흐려졌다.

“그 이름, 어떻게 알았어?”

“말해줬으니 알지 어떻게 압니까?”

“밖에 시타 있으면 들어오라고 해.”

모개가 시타를 불러왔다.

“나 찾았다면서요, 대장?”

“너 가서 내 방에 있는 비실비실한 놈 불러와.”

“효령이요?”

시타의 입에서까지 효령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발리안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너도 알아, 그놈 이름을?”

“그런데요.”

시타가 무슨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기분 나쁜 한숨을 내쉰 발리안이 시타를 노려보았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빨리 가서 그놈 안 데려오고.”

“알았어요, 대장.”

시타가 잽싸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정청에 불려온 효령은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다. 좀 전에 겪은 일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서였다. 오가는 길에 낯선 야만족 군사만 보아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이, 너.”

발리안이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효령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효, 효령이에요, 제 이름.”

“퍽도 일찍 알려주는군.”

발리안이 툴툴거렸다.

“그래, 효령. 모개를 따라가 포고문 만드는 걸 도와라.”

“포고문요?”

“그걸로 숨어 있는 안야국 백성들을 밖으로 끌어낼 거다.”

“숨어 있는 자들이 어떻게 포고문을 보죠?”

“달아나지 못하고 남은 사람 중에 그들과 연락하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 그럴듯하게 만들어, 의심받지 않도록.”

효령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안야국 사람들을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만약 그들을 죽일 생각이라면 미안하지만, 난 협조 못 해요.”

쾅. 호독니가 탁자를 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너 지금 대장 말에 반항하는 거냐?”

그 험악한 얼굴에 효령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반항이 아니라…… 네, 맞아요. 반항이에요. 그럼 날 죽일 건가요? 내게 정당한 이유가 있는 데도요?”

“이놈이……!”

아굴가가, 주먹을 움켜쥐는 호독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다 들어본 다음에 어째도 늦지 않아. 대장도 가만있는데 일단 앉아라.”

호독니가 눈을 부라리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아굴가에게 눈으로 감사를 표시한 효령이 입을 열었다.

“그들을 다 죽이면 철광석은 누가 캐죠?”

효령의 입에서 튀어나온 철광석이란 말에 발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의심 가득한 시선이 효령의 얼굴에 꽂혔다.

이곳 삭주에 엄청난 양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일부였다. 한데 효령이 어떻게……. 발리안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게 위주 도독이 날 쫓던 이유예요. 내가 명국공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난 어려서 명국공부에서 자랐어요. 명국공은 제 먼 친척이 되세요.”

효령이 자신의 배경을 에둘러 설명했다.

“철광석을 캐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건 여러분들도 잘 알죠? 캐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나르고 관리할 사람도 필요해요. 그건 누가 하나요? 여러분이 할 건가요?”

“…….”

호독니가 효령의 시선을 피해 어물쩍 고개를 돌렸다.

“그 철광석이 제대로 된 가치를 발휘하려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해요. 제련을 위해서는 야장(冶匠)은 물론 야로(冶爐)와 철장(鐵場)을 만들 기술자, 거기서 쓸 나무와 물을 나를 사람.”

“…….”

“그뿐인가요? 생산된 것을 운반할 길을 닦아야 하고, 수레와 소도 필요하죠. 일꾼들의 식사와 잠자리, 빨래를 해결할 사람, 공사 중에 다친 사람을 치료할 건물과 인력도 있어야 해요. 이제 아시겠어요? 왜 그들을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되는지?”

효령의 말이 끝나자 아굴가가 놀란 표정으로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이놈 엄청 똑똑한데요,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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