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새로운 세상 2
* * *
“당연하지. 한꺼번에 칠십 명이 같이 잔 적도…… 야!”
시퉁하게 대답하다 말고 아굴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효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제야 눈치챈 까닭이었다.
“너 그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 음흉한 놈아!”
열이 잔뜩 오른 아굴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난 그냥…….”
“이래서 난 너처럼 편히 산 놈들이 싫어. 저희 놈들도 깨끗하지 못한 주제에 우리만 짐승 취급이지. 네놈들이 진짜 짐승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나 해?”
아굴가의 눈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당황한 효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순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그들 틈으로 시타가 뛰어들었다.
“적당히 해요, 아굴가. 얘가 무슨 죄예요? 우리가 워낙에 추잡하고 더러운 걸로 악명이 높은데 뭘.”
후우. 한숨을 내쉰 시타가 효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 눈엔 우리가 죄다 짐승처럼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지는 마라. 너희들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땅에서 나고 자란 놈들은 절대 우릴 이해 못 해.”
“…….”
“우리가 사는 곳은 힘없는 놈은 아예 살아남지를 못하는 땅이야. 먹을 거며 입을 거, 뭐든 모자라. 겨울이면 궁려(穹廬, 활처럼 굽은 반원형의 천막) 하나 없어 얼어 죽는 놈 천지라고.”
“…….”
“힘이 센 놈, 윗대가리일수록 큰 궁려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거기 들이지 않아. 언제 돌변해서 자길 죽일지 모르니까.”
큭. 시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우리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이긴 하지. 저 살자고 남을 쉽게 죽이니까. 안 그래요, 아굴가?”
아굴가는 시타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린 대장의 궁려에서 다 함께 등을 비비며 겨울을 보냈어. 다리 한 번 제대로 못 뻗었지만 그래도 죽는 놈은 없었다고. 이젠 알았냐? 아굴가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민망해진 효령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젠 궁려도 많고, 여긴 방들 천지인데도 가끔 대장이 자기 방에 들이는 놈들이 있어. 그게 누구냐? 너나 나처럼 힘없는 놈들. 스스로를 지키기엔 한참 모자란 놈들 말이야.”
“…….”
“아까 말했지? 윗대가리들은 아무나 궁려에 들이지 않는다고. 부인과 첩, 연인도 허락 없인 마음대로 못 들어가. 거기 드나드는 건 신임을 받는 최측근들, 친위대만 가능해. 그들이, 호위는 물론이고 말이며 옷, 무기, 말, 요리나 술, 모든 것을 담당하지.”
“…….”
“그런데 한 궁려에서 같이 먹고 자기까지 한다? 그건 엄청난 영광이야. 믿고 목숨을 맡긴다는 뜻이니까. 뒤를 이을 후계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
“대장은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이놈은 내가 침소에 들일만큼 믿고 아끼는 놈이니 절대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우릴 지키는 거지. 너 같은 다른 나라 놈들은 딱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뜻밖의 말에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두려움에 떨던 지난밤이 사실은 가장 안전한 밤이었다니. 겉으로 보이는 위협적인 말과 행동 때문에 발리안을 완전히 곡해하고 말았다.
“그럼 아까 말고삐를 준 게…….”
“맞아. 내가 이제까지 대장의 말 담당이었어.”
시타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딱 봐도 나보다 약해빠진 데다 얼굴까지 너무 위험하게 생겨서 할 수 없이 말고삐를 양보하려고 했던 거지. 난 이미 동료들 사이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으니까.”
“시타.”
“사실, 대장 의도를 다 알면서도 괜히 심술이 나서……. 안야국에 와서는 나 말곤 아무도 침소에 들인 사람이 없었거든. 물론 내가 유난히 골골대서이긴 하지만.”
딱. 시타가 효령의 이마에 가볍게 알밤을 놓았다.
“그러니까 엉뚱한 상상은 그만하고 우리 대장에게 충성을 다해라. 알았냐, 꼬맹이?”
말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시타가 아굴가에게 소리쳤다.
“아굴가도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 덩치로 소리 지르면 얘나 나 같은 놈은 기절해 죽는다고요. 그러니까 맨날 성질 더러운 야만족 소리나 듣지. 찬찬히 설명해 주면 좀 좋아요?”
아굴가가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른 쫓아가 봐, 꼬맹이.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시타가 효령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네가 아굴가 마음에 든 것 같다. 여기서는 저 사람이 대장 다음이거든. 너 앞으로 살 만하겠다.”
효령이 시타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시타.”
인사를 마친 효령이 서둘러 아굴가의 뒤를 따라갔다. 문득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기진 않지만, 왠지 이곳이 좋아질 것 같았다.
* * *
“세, 세상에.”
교기와 마주한 효령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룻밤 사이, 교기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은 온통 피멍투성이에 잔뜩 부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교기야?”
효령이 얼굴로 손을 뻗자 교기가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어떻게 이게 별게 아니야? 어쩌다 이렇게 됐어? 누가 그런 거야?”
“그게…….”
교기가 계면쩍은 얼굴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게 여기 신참례(신고식)인 모양입니다.”
“신참례?”
“실력을 가늠하는 겁니다. 부끄럽습니다만, 다들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황실의 호위무사였던 교기가 애를 먹을 정도라면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문득, 효령의 등 뒤가 서늘해졌다. 어제 발리안이 데려가지 않았다면 자신도 겪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매일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거야?”
“아뇨. 이미 져서 더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뭐, 교기가 졌다고?”
효령이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교기는 명국공부에서도, 황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일곱 명은 어떻게 쓰러뜨렸는데 여덟 번째 붙은 자에게 졌습니다. 맨몸으로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네놈들이 진짜 짐승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나 해?」
아굴가의 말을 떠올린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매일매일이 전쟁인 자들이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안야국이 너무 안이했던 거야. 저들을 짐승이라며 무시만 했으니까.”
“맞습니다. 이자들, 겉으론 꽤 느슨해 보이지만 훈련 상태며 군기, 게다가 충성심과 결속력까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안야국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최선을 다해 그것만은 막아야지. 근데 이러고 여기서 버틸 수 있겠어?”
“아가씨, 아니 공자만 괜찮으시다면 전 끄떡없습니다.”
교기가 말을 이었다.
“여긴 기탄 사람 말고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출신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지위가 딱히 정해진 것 같지도 않고요. 아무래도 신참례를 통해 자연스레 서열이 결정되는 모양입니다.”
“그래?”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대현국 사람도 있으니 기회를 보아 이것저것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힘들면 내가 대장에게 말해 볼게.”
“발리안, 말입니까?”
“응. 생각처럼 무자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수하들의 신뢰도 대단한 것 같고.”
교기가 효령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자는 수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안야국을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한유 공자님을 포로로 붙들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그래. 알았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효령의 심장이 살짝 따끔거렸다. 발리안은 몇 번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어정쩡한 마음으로 어떻게 한유를 찾고 안야국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효령은 스스로를 나무라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 * *
효령이 교기를 만나고 나오자 아굴가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기다렸어요, 아굴가? 나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아굴가가 마땅찮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넌 아직 멀었어.”
“네?”
대답 대신 아굴가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느긋하고 느린 걸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속도에 맞춰주는 건가, 효령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이제 막 처소를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야만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휘익.
야릇한 휘파람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죽이는데. 저거 사내놈 맞아? 어떻게 된 게 계집보다 더 고와?”
“그러게. 진짜 사내놈이 맞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봤으면 좋겠는데, 흐흐.”
“어이, 이쁜이. 여기 한 번만 봐주라.”
쪽.
그녀를 향해 보란 듯 얼굴을 내밀며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효령의 등 뒤로 쫘악 소름이 돋았다. 서둘러 시선을 돌린 그녀가 아굴가의 곁으로 바짝 다가붙었다.
어느새 그녀와 아굴가 주변을 야만족들이 가득 에워쌌다. 그 눈빛이 하나같이 음흉한 것이 이전에 보았던 발타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놈이야? 어제 새로 들어왔다는 놈이?”
“안야국 놈인가? 끝내주는데?”
“딱 내 졸개 삼았으면 좋겠다. 그럼 많이 이뻐해 줄 텐데, 흐흐.”
우뚝. 아굴가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늘어선 놈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 그렇게 마음에 드냐?”
“예.”
“갖고 싶어?”
“예.”
아굴가의 물음에 모두가 입이라도 맞춘 듯,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당황한 효령이 아굴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는 놀란 효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모두의 앞에 밀어 보였다.
“여기서 제일 용감한 놈에게 이놈을 부하로 준다. 자신 있는 놈, 앞으로 나와.”
우르르르. 순식간에 수십 명이 몰려나왔다.
“너무 많다. 알아서 줄여!”
아굴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로가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툭툭, 사정없이 치고받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일각이 지나자, 실력이 판가름 났다.
눈을 빛내며 서 있는 것은, 싸움으로는 손에 꼽히는 세 명의 실력자들이었다.
“역시…….”
아굴가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 세 놈 중에서 뽑는다.”
“누구 마음대로!”
그 순간. 검을 뽑아 든 교기가 아굴가 앞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