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새로운 세상 1
* * *
“아, 아니요.”
효령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아니면…… 내겐 갈 곳이 없는걸요.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쫓기고 있다는 걸…….”
흐읍. 재빨리 눈물을 훔친 효령이 발리안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날 당신 수하로 받아줘요. 힘은 다른 사람만 못하겠지만, 난 기탄 말을 할 줄 알아요. 쓸모가 있을 거예요. 당신이 날 받아준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 자신 있어요. 대신…….”
“…….”
“내 몸엔 손대지 말아요. 난 당신 수하가 되고 싶은 거지 노리개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 절박한 애원에 발리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효령은 그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리안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 그 잠시가 마치 수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좋다, 널 받아주지. 하지만 몸에 손대지 않는다는 약속은 못 하겠는데…….”
“……!”
발리안이 갑자기 안아 드는 바람에 놀란 효령의 몸과 혀가 바짝 굳어버렸다. 그는 어둠 속을 능숙하게 걸어 효령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여기가 네 침소다.”
발리안이 제 옆으로 들어오는 것에 놀란 효령이 저만치 침상 안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는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아까 그 말…… 내가 널 받아준 걸 후회하게 되면, 덮쳐도 된다는 뜻인가?”
“아, 아니 그게…….”
“그럼 그때까지 즐거움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지.”
장난인지 위협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 발리안이 효령을 향해 양털 이불을 던졌다.
처음 덮어보는 양털 이불은 예상외로 너무도 보드라웠다. 비단 이불과는 전혀 다른 포근함에 효령은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쿵쾅쿵쾅.
이른 아침, 낭하를 달려오는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효령의 단잠을 깨워놓았다.
“……!”
어느 틈에 일어난 것인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효령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순간.
쾅. 요란하게 처소의 문이 열렸다.
“대장!”
“야, 시타.”
성마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연이어 아굴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그게 사실이에요? 침소에 나 말고 다른 놈을 들였다면서요? 누구예요? 대체 어떤 놈이길래…….”
“……!”
절 두고 하는 말에 효령은 남은 잠이 다 달아났다. 침상을 빠져나온 그녀가 가만히 휘장을 걷고 밖을 살폈다.
커다란 탁자 앞에 앉은 발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한 사내가 분을 못 이겨 발을 굴렀다. 야만족 중에도 저런 사람이 있나 싶게 마르고 작은 몸집을 한 사내였다.
그는, 겉모습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다른 야만족들과는 달리 수염조차 나지 않은 매끈한 얼굴이었다. 나이도 효령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럼, 내가 무슨 목적으로 널 구해줬다고 생각하지? 널 내 방으로 데려오는데 단 한 사람이라도, 내 부하 중에 놀라는 자가 있던가?」
어젯밤 발리안이 한 말을 떠올린 효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발리안이 무지막지한 다른 야만족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온몸에서 쫙, 힘이 빠졌다.
“미친놈. 대장이 왜 그러는지 뻔히 아는 놈이 그딴 소리를…… 잡소리 말고 당장 나와.”
아굴가가 시타의 목덜미를 붙들더니 짐짝 끌 듯 직직 끌어당겼다. 그러나 시타도 만만치 않았다. 아굴가가 붙들고 있는 옷의 허리띠를 풀어버린 그가 쑤욱, 미끄러지듯 옷 속을 빠져나왔다. 웃통을 벗은 그가 재빨리 발리안의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싫어요, 대장. 나 아닌 다른 놈은 안 된다고요. 누군지 내가 그 빌어먹을 놈을 당장 죽여 버릴 거야.”
시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어느새 다가온 아굴가가 그를 번쩍 어깨 위에 둘러메었다.
“아침부터 소란 떨어 죄송합니다, 대장. 시타 이놈이 워낙 생떼가 심해서…….”
“놔, 놓으란 말이야. 내겐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아굴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내겐 네놈 목숨보다 대장 뜻이 더 중요해.”
에누리 없이 대답한 아굴가가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섰다. 그들이 요란을 떨든 말든 발리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놔. 이거 놓으라고…….”
시타가 아굴가의 어깨 위에서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해댔다. 아굴가를 미친 듯 때리던 그가 급기야 그 어깨를 물어뜯었다. 그 행동이 너무도 절박한 것이 마치, 덫에 걸린 짐승 같았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효령은 휘장을 걷고 뛰어나갔다.
“오, 오해예요! 나와 발리안은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아굴가와 시타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타의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가, 당장이라도 효령의 목을 비틀어 버릴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젠 확실히 알겠지? 대장이 왜 저놈을 여기 들였는지…….”
아굴가의 말에, 시타는 대답 대신 한동안 효령의 위아래를 내리훑었다. 너무도 날카로운 시선에 효령이 어찌할 바를 모를 즈음. 시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분노와 원망 대신, 완전히 기가 꺾인 목소리였다.
“……내려줘요, 아굴가. 내 발로 걸어갈 테니까.”
아굴가가 내려놓기 무섭게 시타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향해 다가갔다. 축 처진 어깨를 한 그가 소매 속에서 말고삐를 꺼내왔다.
“자. 이제부터 네놈 거다.”
시타가 효령의 손에 억지로 말고삐를 쥐여 주었다.
“이걸 왜…….”
효령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대장. 그럼 전 이만 물러…….”
“거기 서.”
발리안의 목소리가 힘없이 돌아서는 시타를 붙들었다.
“내가 그 고삐를 내줄 때 뭐라고 했지?”
“‘내가 내놓으라고 하기 전까지는 네가 맡아라’라고…….”
“그런데?”
“예?”
시타가 알딸딸한 표정을 지었다.
“명령을 어길 시에는 죽음이란 걸 모르나?”
“예? 그게 무슨…….”
아굴가가, 여전히 헤매고 있는 시타에게 지청구를 놓았다.
“이런 덜떨어진 놈을 봤나? 그 고삐 넣어두라는 말씀이잖아, 이 멍청아!”
아굴가의 말에 다 죽어 가던 시타의 얼굴에 급히 화색이 돌았다.
“저, 정말이에요, 대장?”
“그만 꺼져.”
툭 하니 인정머리 없이 던지는 발리안의 말에도 시타는 싱글벙글거렸다. 그가 재빨리 효령의 손에서 고삐를 낚아챘다.
“이건 평생 꿈도 꾸지 마라, 꼬맹이. 그럼 전 이만 물러갑니다, 대장.”
혹시나 발리안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시타가 재빨리 옷을 집어 들고는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이어 아굴가마저 물러날 기색을 보이자 효령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기, 발리안…… 교기를 볼 수 있을까요? 어제 나랑 같이 온 사람요.”
“좋을 대로. 아굴가, 안내해 줘라.”
“예, 대장. 따라와라.”
고갯짓하는 아굴가를 따라 효령이 방을 나섰다.
아굴가는 그 커다란 덩치에 맞게 보폭도 여느 사람의 두 배였다. 효령은 뛰다시피 하여 그와 겨우 보조를 맞췄다.
“저기요. 아까 그 시타라는 사람, 이젠 괜찮을까요? 나와 발리안에 대한 오해가 풀렸……!”
내내 앞장서 걷던 아굴가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앞을 가로막고 선 바람에 놀란 효령도 따라 멈췄다. 효령에게로 돌아선 아굴가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 아까부터 몹시 거슬렸는데…….”
“……?”
“매끈하니 계집처럼 생겨 먹은 게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 모르겠다만, 오래 살고 싶으면 그 말버릇부터 고치는 게 좋아. 안 그랬다간…….”
아굴가가 효령의 눈앞으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 주먹이 어찌나 큰지 효령의 얼굴을 다 가리고도 남았다.
아굴가의 기세에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주먹에 맞았다간 뼈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같은 잔챙이가 어디서 감히 우리 대장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 네놈 주둥이를 비틀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줄이나 알아.”
“……!”
그제야 효령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장공주의 신분을 버렸다는 것은 말뿐, 몸에 밴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발리안은 지금 이곳 삭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감히 이름을 부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정직하고 순순한 사과에 아굴가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저기…… 그럼 당신은 뭐라고 불러야 해요?”
“그냥 아굴……!”
말을 하다 말고 아굴가의 눈이 커다래졌다. 효령이 덥썩, 그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아굴가. 난 효령이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지금처럼 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요.”
아굴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효령과 제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껏 절 처음 보는 놈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잔뜩 겁을 집어먹거나 경계하거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놈을 봤나?”
아굴가가 거칠게 효령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효령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실 나, 처음엔 아굴가가 많이 무서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뭐?”
“아까 시타에게 하는 걸 보고 알았어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 그 사람을 많이 걱정한다는 걸요.”
아까 시타가 무슨 짓을 해도 아굴가는 그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시타를 제압하는데 주먹 한 방이면 끝날 텐데도.
「이런 덜떨어진 놈을 봤나? 그 고삐 넣어두라는 말씀이잖아, 이 멍청아!」
효령은, 내내 무뚝뚝하게 굴던 아굴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말은 과격했지만 거기 담긴 마음만은 양털 이불처럼 따스했다.
“미친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아굴가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가 다시 너른 보폭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효령이 종종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저, 시타의 오해가 풀렸을까요? 나랑 발, 아니 대장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야!”
아굴가가 또 멈춰선 바람에 그 등에 얼굴을 부딪친 효령이 코를 감싸 쥐었다.
“너랑 대장 사이가 어떤지 일일이 떠들 필요 없다. 여기 그걸 모르는 놈은 아무도 없으니까.”
“예?”
효령이 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는 놈들 중에 대장이랑 한 번도 안 자 본 놈이 있는 줄 알아?”
“……!”
효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늘은 정말 충격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 아굴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