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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2화 (12/116)

12화. 재회 3

* * *

“그 손 놓지 못……!”

효령이 발끈하는 교기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지 마, 교기야.’

너무도 단호한 눈빛에, 교기는 불끈 쥔 주먹을 애써 밑으로 내렸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으면 그만 꺼져.”

차갑게 내뱉은 발리안이 효령의 손목을 잡고 관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발리안과 효령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 아굴가가 교기의 턱밑으로 주먹을 날렸다.

“……!”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힘에 교기는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나마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봐, 애송이.”

교기의 곁으로 다가온 아굴가가 멱살을 움켜쥐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굴가는 건장한 체격의 교기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

“대칸의 조카이며 삭주의 주인인 우리 대장에게 어디서 감히 말대꾸야? 다시 한번 그따위로 굴었다간 네놈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주마.”

교기는 아굴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주인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탁. 아굴가가 교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따라와.”

“…….”

금세 일어선 교기가 입에서 새어 나온 피를 닦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장공주님.’

효령은 무사할까. 어째서 그녀는 저항도 하지 않고 발리안을 따라간 것일까. 그녀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목숨이지만, 아까 자신을 바라보던 효령의 눈빛은 결코 포기도 좌절도 아니었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인 건지…….

‘만약을 대비해서 난 이곳 구조부터 익혀 둬야겠군.’

몸을 돌린 교기가 급히 아굴가의 뒤를 따라갔다.

* * *

발리안이 들어간 곳은 예전에는 삭주 도독이 사용했을 커다란 방이었다. 탁자와 의자가 놓인 곳을 지나친 안쪽에 침소가 있었다.

입구를 가린 긴 휘장을 걷고 들어가니, 한쪽에 와탑이라고도 불리는 커다란 침상이 보였다.

자단(紫檀)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대모(바다거북 등딱지)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평소 보던 비단 이불 대신 커다란 양털 이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툭.

침상 앞에 선 발리안이 효령을 그 위로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곧 옷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

그제야 효령의 온몸으로 더럭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우린 고운 건 계집이건 사내건 그냥 놔두는 법이 없거든.」

이전에 발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당황한 효령이 무릎을 모으며 침상의 한구석으로 달아났다.

어느새 윗옷을 벗어 던진 발리안이 침상 위로 올라왔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이내 효령을 삼켜버렸다.

“저, 저기요. 뭐, 뭔가 오해를…….”

눈앞을 가득 채운 발리안의 맨몸을 감당할 수 없어 효령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나 발리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앞으로 돌려놓았다. 효령의 눈썹이 파르르 가늘게 떨렸다.

“이제 와 두려운 건가? 그러게 내 분명 경고했지. 야만족과 얽혀서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그가 다시 효령을 이불 위로 쓰러뜨렸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깊은 눈과 마주치자 그만 온몸이 얼어붙었다.

야릇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발리안이 천천히, 효령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 하얗고 섬세한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오소소 전율이 일었다.

“이제껏 이 맛이 궁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미치도록 궁금하군.”

발리안이 효령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과 숨결이 뺨에 닿은 순간, 효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

갖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발리안은 적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만난 어떤 자들보다 악랄한 적. 밀쳐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렷이 떠오르는 장면.

그는, 태후와 형부 상서 맹유천, 위주 도독의 손에서 자신을 구한 은인이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손짓했을 때. 발리안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신에게는 얼마나 완벽한 구원이었는지. 그 순간, 그의 품으로 달려가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

갈피를 잡지 못한 효령의 마음이 입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릴 틈을 놓쳤다. 효령은 자신도 모르게, 먼 길을 오느라 갈라진 입술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훗.”

웃음소리와 함께 얼굴에 부딪히던 숨결이 사라졌다. 발리안이 몸을 돌리는 기척에 효령이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었다.

“정말 나에게 반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어느새 그녀 곁에 두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발리안이 침상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야만족에게 몸을 더럽히는 수모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효령이 얼른 옷섶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내, 내가 책임져 달라는 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당신……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지? 난 네가 경멸해 마지않는 야만…….”

“그래요, 당신은 야만족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들과는 달라요.”

효령이, 겁도 없이 발리안의 처소로 따라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부용각에서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는 분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안야국 최고의 기녀들로 넘쳐난다는 곳에서 여인의 향내가 나지 않다니. 기탄의 상인들을 상대하느라 밤 내 기녀들이 애를 먹었다는 것은 발리안과는 무관한 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발리안의 몸에는 상처와 흉터가 가득했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입술이나 손톱이 만들어낸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난 바보가 아니에요. 아무리 다급하다고 날 해칠 자를 따라올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발리안이 그제야 효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 가득 비소가 걸려 있었다.

“그럼 내가 무슨 목적으로 널 구했다고 생각하지? 널 내 방으로 데려오는데 단 한 사람이라도, 내 부하 중에 놀라는 자가 있던가?”

“……!”

“그러니까 나에 대해 속단하지 마. 네가 무사한 건 오늘 밤뿐일지도 모르니까.”

다시 천장을 향해 얼굴을 돌린 발리안이 눈을 감았다.

둘 사이 곧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효령의 가슴으로 물밀듯 슬픔이 몰려들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명국공부를 떠난 이후, 그녀의 삶에 더는 행복은 없었다. 숨 막히는 황궁만 벗어나면, 삭주에만 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는데……. 발리안을 만난 순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불행은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구원이라 여겼던 발리안이 실상은 가장 두려운 적이란 현실만 다시 확인한 꼴이었다.

낙심한 효령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제 어리석음에 진저리가 나며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곁에 누운 발리안에게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효령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잠이 든 발리안은, 그래서 잔인한 미소가 사라진 그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만약 누군가가 발리안을 죽이려 한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정체불명의 자신을 곁에 두고 이렇게 쉬이 잠들다니…….

이것은 자신을 믿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여유일까.

효령은 잠시, 발리안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만 없다면 안야국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밝을 터. 그럼에도 발리안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한유는 지금 어디 있을까…….’

장공주의 신분을 버린 지금, 한유는 효령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속히 발리안의 신임을 얻고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한유를 찾는 일이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은 효령이 발리안을 피해 슬그머니 침상 끝으로 갔다. 혼례도 올리지 않은 사내와 한 침상을 쓰는 것은 그녀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침실 밖 탁자에서 밤을 보내리라 생각한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하필 그 순간, 수명을 다한 초가 긴 연기를 남기며 꺼져버렸다. 침상 모서리를 붙든 효령이 그것을 길잡이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몇 발 떼지 못하고 발리안이 던져둔 옷에 발이 걸렸다.

“아아!”

효령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녀가 허우적대며 벽에 부딪히려는 순간.

“……!”

침상을 박차고 나온 발리안이 그녀의 뒷덜미를 붙들어 잡아당겼다.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한 효령은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커다란 두 손이 효령의 머리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처음 발리안에게 안겼던 부용각에서의 그날처럼, 그의 가슴은 넓고 단단했다. 그땐 두렵기만 했던 품에서 처음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제 머리 위를, 뺨을 간질이는 긴 머리카락에 안도가 되면서 왈칵, 눈물이 치밀었다.

효령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태후 앞에서도, 교기 앞에서도, 아니 이제껏 그 누구의 앞에서도 차마 보이지 못한 모습이었다.

모든 흉허물을 감추어주는 어둠 때문인지, 오래도록 참아온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울고 싶었던 것뿐인지. 효령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발리안은, 고개를 주억이며 쏟아 놓는 효령의 흐느낌이 잦아들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그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아나려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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