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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1화 (11/116)

11화. 재회 2

* * *

뒤에 배경처럼 둘러선 야만족과는 확연히 다른 용모의 사내. 그는,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기탄의 명마 산자(山子)를 탄 발리안이었다. 어깨에서 등 뒤로 늘어진 붉은 천 자락과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 천리준마와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

난데없는 미남자의 등장에 위주 도독은 물론 그의 수하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불과 조금 전 야만족을 보고 놀랐던 것도 잊고 다들 멍하니 넋을 잃었다.

딱.

어디선가 들려온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에, 위주 도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대는 누구요?”

그가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나?”

발리안이 위주 도독을 향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보통 자신을 먼저 소개하는 법 아닌가? 이러면서 우리더러만 야만인이라지.”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발리안의 말에 야만족 군사들이 왁자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기탄 말을 모르는 위주 도독만 바짝 입이 말랐다.

“나, 나는 위주 도독 방곽이라고 하오. 혹, 그대들 중 안야국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소?”

그가 울상이 되어 외쳤다.

“그냥 말해도 잘 알아들으니 굳이 그렇게 소리 지를 것 없소.”

그제야 발리안이 능청스럽게 안야국 말로 대꾸했다. 익숙한 언어에 위주 도독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그, 그대들은 누구요? 누구기에 감히 안야국 땅을 함부로 휘젓고 다니는 것이오?”

위주 도독이 제법 위엄을 갖추며 물었다. 그러나 그의 위신은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이 나라는 위나 아래나 한결같이 소식이 느린지 모르겠군. 이보시오, 도독. 다시 돌아가 황궁에서 온 공문이나 제대로 살펴보고 오는 것이 어떻소?”

“……?”

“삭주는 어제부로 기탄의 조차지가 되었소. 앞으로 10년간, 나 발리안의 관할이란 말이지. 그런데 감히 겁도 없이 내 코앞으로 군사를 끌고 오다니……. 도발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오만.”

“……!”

움찔. 위주 도독이 말을 잃고 얼어붙었다. 효령을 잡는 일에만 온통 신경을 기울인 탓에 그런 공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을 벌였는지 깨달은 그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미, 미안하오. 내 불찰이오. 큰 죄를 짓고 달아난 죄인들이 있어서 그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소. 그러니 화 풀고, 그쪽도 군사들을 물러주시오.”

“실수였다 하니 오늘은 우리도 그만 물러나지. 목숨이 여럿이 아니라면 앞으로 주의하는 게 좋을 거요.”

조롱과 함께 엄포를 놓은 발리안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좌우로 늘어선 야만족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순간.

“도와줘요, 발리안!”

위주 군사들 틈에서 그를 부르는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에 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 기억해요? 한경의 부용각. 거기서 내 비녀를 빌렸잖아요?”

군사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다시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한경의 부용각?’

발리안의 눈이 야릇하게 빛을 발했다.

‘비녀를 빌린 상대라……!’

그러고 보니…….

금세 그린 듯 또렷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짐승들을 단숨에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 우두머리뿐이에요. 당신은 상인으로 위장한 저 수상쩍은 무리의 대장이에요.」

아무도 감히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자신을 떡하니 붙들었던 겁 없는 하룻강아지.

사내 주제에 부러질 듯 가냘픈 몸집, 계집처럼 고운 얼굴을 한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 몸에서 났던 싱그러운 꽃향기가 되살아나며, 그날이 마치 어제인 듯 생생했다. 눈물을 머금은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친 순간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조여 당황했던 기억.

그래서였나……. 어울리지 않게 자비를 베풀었었지.

훗.

그때를 떠올린 발리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제길.’

이 상황에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위주 도독이었다. 설마 효령이 야만족에게 도움을 청할 줄이야. 그러다 저 무지막지한 놈들이 위주 땅에 발이라도 들인다면…….

“……!”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진 위주 도독이 뒤에 서 있는 군사에게 재빨리 고갯짓을 했다. 효령의 입을 막으라는 신호였다. 이제껏 상대가 장공주라 그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군사가 재빨리 창을 버리고 효령의 말 옆으로 다가붙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다급해진 효령이 두 손을 입에 모았다.

“그때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해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 옷을 걸치면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그건 네가 내 것이라는 증거니까.」

“그 말, 책임져……!”

그러나 효령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강제로 그녀의 말에 올라탄 군사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 젠장!”

당장 효령의 곁으로 향하려는 교기를 향해 창끝이 모여들었다. 물 샐 틈 없이 포위당한 그의 입에서 효령을 대신하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도와주시오, 제발!”

한 군사가 교기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으윽. 신음과 함께 교기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재빨리 달려든 다른 군사들이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과 다리를 꺾었다.

“……!”

효령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군사의 손에 막혀 사그라졌다.

위주 도독이 발리안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애써 잡은 죄인이 도망치려 해서 그만……. 그쪽과는 무관한 일이니 그냥 가 보…….”

위주 도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씨익, 야릇하게 웃어 보인 발리안이 말안장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둥글게 말려 있던 채찍을 집어 올리자, 곁에 섰던 야만족 군사들이 반사적으로 말을 뒤로 물렸다.

“……?”

영문을 모르는 위주 도독만이 발리안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흐윽.”

삽시간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휙휙.

발리안이 팔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난생처음 보는 기다란 채찍이 날렵한 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허공을 가르며 사납게 꿈틀대는 그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물에 불려두어 그 무게가 엄청나게 증가한 채찍에서 쉭쉭, 살벌한 파열음이 새어 나왔다. 거기 반응이라도 하듯 곧 엄청난 바람이 일며 주변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나른한 오후의 공기가 삽시간에 요동치며 천지가 진동했다.

“……!”

폭풍 같은 그 위력에 놀란 위주 도독과 군사들의 입이 사정없이 벌어졌다. 그들이 멍하니 넋을 놓은 사이.

쉭쉭.

이빨을 드러낸 독사와 같은 검은 채찍이 돌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으악!

아악!

예상치 못한 공격에 위주 도독과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섰다. 서로가 발에 걸려 넘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들 사이를 지나친 채찍이 마른 땅을 내리쳤다.

따악!

얼음이 깨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일자로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크고 작은 돌들이 사방으로 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발리안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채찍의 끝이 스친 자리마다 나뭇가지와 덤불들이 칼에라도 잘린 듯 동강이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 효령과 발리안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

그 엄청난 충격에 모두가 숨을 멈춘 찰나.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군. 어이, 오랜만이야.”

발리안이 효령을 보며 웃었다.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혹당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효령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 적인데,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인간인데 왜 이리 반가운 것인지.

그가 효령을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그쪽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린 효령이 자신을 붙든 군사를 밀치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가자, 교기야.”

효령의 외침에 교기 역시 주변 군사들을 뿌리치고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거침없이 삭주의 지표석을 향해 뛰었다. 일말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그들은 순식간에 위주의 경계를 넘었다.

“……!”

눈앞에서 효령이 야만족의 땅에 발을 들이는 것을 보고도, 위주 도독을 비롯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혹여나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채찍이 두려워서였다. 잘못하여 그것에 맞았다간 살이 패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물론 목숨마저 남아나질 않을 터. 모두가 겁에 질린 채 망연자실, 효령과 교기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앞으로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맙시다. 그게 당신에게 좋을 거요.”

효령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말에 태운 발리안이 위주 도독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다들 돌아가자. 하!”

“하.”

“하.”

“이럇!”

발리안을 필두로 교기와 야만족 군사들이 탄 말이 삭주의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들이 삭주 관사에 닿은 것은 해가 떨어진 깊은 밤이었다. 삭주 관사는 여기저기 밝힌 불들로 대낮처럼 환했다. 말에서 내린 발리안 일행이 마당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군사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야심한 시각에 훈련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오십니까, 대장?”

내내 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군사 몇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굴가.”

“예.”

발리안의 부름에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바윗돌처럼 굳게 닫힌 입술과 뚝뚝한 표정. 누구와도 비길 데 없는 큰 몸집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자였다.

발리안이 턱으로 교기를 가리켰다.

“데려가. 방을 일러줘라.”

“예.”

턱 아래 수염이 덥수룩한 아굴가가 힐끗 교기를 쳐다보았다.

“따라와라.”

무뚝뚝하니 거칠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교기는 그를 따르는 대신 발리안에게 물었다.

“우리 공자님은요?”

순간, 발리안이 보란 듯 효령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

효령은 순식간에 발리안의 품으로 딸려 들어갔다. 발리안이 교기를 보며 비소를 지었다.

“몰라서 묻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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