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재회 1
* * *
“…….”
찻잔을 붙든 효령의 온몸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하루가 다 지나도록 지난 연회에서 받은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얼마 전, 명국공과 그 가족들이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것도 안야국 사람들 손에 말입니다.」
「명국공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 그 재산을 가로챈 사람. 그가 바로 명국공을 죽인 범인 아니겠습니까?」
발리안이 일개 상인이 아닌 기탄의 사신, 나아가 흑야차라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명국공부를 도륙 낸 사람이 태후와 재상, 맹유천이라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험지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사는 외숙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그녀가 도저히 삭일 수 없는 분노에 휩쓸린 사이. 교기가 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왔다.
“장공주님.”
효령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아봤어?”
“예. 잠시 귀 좀…….”
“……!”
다리가 풀린 효령이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교염이 교기를 통해 전한 말은 이랬다.
기탄군들이 반란군을 진압하며 벌인 학살에 겁을 먹은 백성들은 그들을 피해 다른 지역, 그중에서도 명망 높은 명국공이 있는 삭주로 모여들었다. 명국공은 공부를 개방하여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구휼에 한계가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곡식, 늘어나는 백성들에 고민하던 명국공에게 때마침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소유지인 산에서 철광석 광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철광석을 생산하여 팔 수 있다면 백성들은 일자리를 얻게 되고, 또 그 이문으로 남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문제를 상의하고 광산 기술자들을 구하기 위해 명국공은 교염을 급히 서경으로 보냈다. 아무래도 그 사실이 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외숙께서…….”
무기를 만드는 철광석은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그것만 있다면 태후는 기탄을 상대로 본 피해를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태후는 죄도 없는 명국공과 그 가족을 몰살한 것이었다. 그녀는 혹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백성들의 반발에 대비해 기탄 군사들의 짓으로 위장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럼 그때 그 사람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효령이 천위헌에서 만났던 맹유천의 수하들. 겨우 그녀 하나의 뒤를 밟았다고 보기엔 너무도 많았던 그들은 효령이 아닌 교염을 쫓고 있었다. 철광석에 관한 비밀을 은폐하기 위해 교염과 그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려던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너무도 참담한 진실 앞에 효령은 말을 잃었다. 자신이 사는 이곳 안야국이, 야만족들이 산다는 초원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조금 전 황제 폐하의 칙서가 새로이 내려졌습니다.”
태후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발리안의 주장을 모두 수용했다.
그 내용은 최악이었다. 앞으로 10년간 안야국은 꼼짝없이 기탄의 호구 노릇을 해야 했다. 게다가 예정에 없던 삭주까지 내주어야 했다. 태후가 그토록 탐냈던 철광석은 이제 모두 발리안의 차지였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과 탐욕이 발리안과 기탄을 배 불리고 안야국 백성들을 피할 길 없는 위기로 내몰았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태후는, 명국공의 죽음과 최악의 교섭을 둘러싼 중신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장공주들을 팔았다. 푸른 옷, 붉은 옷 할 것 없이 모든 장공주들이 당장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상대는 기탄 사신들과의 마지막 연회에 참가했던 주요 중신들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 혼인 상대는?”
“그게…….”
교기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말해. 너 아닌 다른 사람 입으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형부 상서 맹유천입니다.”
교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형부 상서가 직접 태후마마께 효령 장공주님을 청했다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나서 다른 중신들의 입을 확실히 막겠다고…….”
“잘됐네.”
뜻밖의 말에 놀란 교기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효령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덕분에 확실히 마음을 정했어. 나 궁을 떠날 거야, 교기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원수들이 내 인생을 흔들도록 가만있지 않겠어.”
“장공주님.”
“그렇게 불리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나라를 위해 기탄에 시집갈 각오를 했던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어.”
“…….”
“이제부터는 장공주 말고 내 이름 효령으로 살래. 내 인생 따위 관심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 참고 견디는 거, 더는 안 해.”
효령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말뿐이라도 태후마마는 내게 어머니가 되시니 그분을 상대로 원수를 갚을 순 없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는 태후마마나 이 황궁과 완전히 연을 끊는 거야. 이제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효령 아가씨?”
그제야 처음으로 효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삭주로 가자, 교기야. 한유는 분명 거기 있을 거야.”
그날 밤, 구름이 달을 가린 사이. 그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효령과 교기는 물이 들고 나는 수문을 통해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두 필의 말이 인적이 드문 산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 요란한 소리에 나뭇가지에 앉아 졸던 산새들이 푸드득, 놀라 하늘로 흩어졌다.
짐이라고는 거의 없는 단출한 차림으로 말을 재촉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효령과 교기였다.
묵고 있던 객잔에 이른 아침부터 관군이 들이닥친 바람에 제대로 된 요기조차 못 하고 나온 길. 아침, 점심은 물론이고, 휴식도 거르고 달린 탓에 두 사람 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만 힘을 내십시오, 아가씨. 이 속도라면 오늘 중으로 삭주에 도착할 겁니다.”
“아, 알았어.”
효령과 교기가 지나고 있는 곳은 안야국의 북부 지역 중 가장 큰 치소(治所, 행정 기관이 있는 곳)를 두고 있는 위주였다. 여기서 삭주까지는 사십여 리 남짓. 이 마지막 고비만 잘 넘기면 며칠 동안 이어진 고단한 여정도 곧 끝이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연달아 만나길 수차례. 오래도록 달린 말의 몸에 어느새 하얀 거품처럼 보이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말이 막 야트막한 고갯길 위로 올라선 순간, 그들의 눈앞으로 커다란 지표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기야, 저것 좀 봐. 저기……!”
삭주. 그 선명한 글자에 효령이 저도 모르게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이제 곧 한유를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그간의 고생도 잊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교기가 말고삐를 움켜쥐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가씨!”
바스락, 바스락.
뚝, 뚝.
풀과 나뭇가지가 밟혀 뭉그러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표석 주변 덤불에서 무장한 안야국 관군들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 효령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던 곳이었다.
“……!”
“……!”
앞이 가로막힌 효령과 교기가 말을 돌리려는 순간. 어느 틈에 나타난 것인지 뒤마저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삭주를 고작 몇 발 앞에 두고 이런 지경을 당하다니…….
안타까움에 입술을 사리무는 효령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교활하고 약삭빠른 인상의 그는 위주를 다스리는 위주 도독(지방관 관직)이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효령 장공주님.”
그는, 남장을 했음에도 효령을 쉽게 알아보았다.
“알 만하신 분이 이럼 곤란하지요.”
애석하게도 위주 도독은 형부 상서 맹유천의 의형제였다. 맹유천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그는 효령을 잡기 위해 관내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삭주로 향하는 어느 길 하나, 군사들이 매복하지 않은 장소가 없었다. 효령과 교기는 반드시 잡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태후마마와 형님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시니…… 고생 좀 하실 겁니다.”
그가 효령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딱 맹유천을 연상시키는 비열한 웃음이었다.
“자비를 베풀어 우릴 보내줄 수는 없겠소?”
효령이 헛된 줄 알면서도 물었다.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돌에 새겨진 ‘삭주’라는 글자가 너무도 또렷했다.
“자비라…… 그건 저 말고 태후마마와 형님께 구하십시오. 저는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라서…….”
마지막 희망마저 잔인하게 짓밟은 위주 도독이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그들이 효령과 교기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효령이 검을 뽑으려는 교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교기야.’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목숨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교기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상대하기엔 군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미안해, 한유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널 꼭 구하고 싶었는데……. 이걸로 모든 게 끝…….’
더는 희망이 없다 생각한 효령이 낙심하여 눈을 감았다. 순간.
두두두두. 땅바닥이 흔들리며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
“……!”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소리는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히이이이잉.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수십 필의 말이었다. 삭주임을 알리는 지표석 주변을 어느새 기탄의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저기 흉한 상처가 난 그은 얼굴, 목과 손에 가득한 문신. 제멋대로 땋아 늘어뜨린 머리, 손에 든 어마어마하게 큰 칼과 도끼. 사람과 짐승의 송곳니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 그 모습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
말로만 듣던 야만족과 마주한 순간, 위주 군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제껏 그들의 잔인함과 그들이 저지른 참상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
내내 기세등등하던 위주 도독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어렸다. 그 역시도 기탄의 군사들에게 에워싸이는 이런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그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따각 따각.
순간,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군사들의 틈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