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달갑지 않은 손님 4
* * *
발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 입으로 말해도 믿지 않으실 테니…… 직접들 확인해 보십시오.”
“직접 확인하라니. 어찌 말이오?”
“명국공의 가족이 몰살당한 지금. 그의 재산은 어찌 되었을까요? 듣자 하니 명국공에겐 밖으론 알려지지 않은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다던데…….”
“……!”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 그 재산을 가로챈 사람. 그가 바로 명국공을 죽인 범인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재상 어른?”
“……!”
느닷없는 불똥이 자기에게 튀자 태후의 오라비이며 황후의 아비인 재상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어느새 중신들의 눈은 모조리 발리안이 아닌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난 저, 전혀 모르는…….”
재상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삭주가 왜 필요한 것이요?”
궁지에 몰린 그 대신 태후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애써 감추며 벌인 일들이 모두 들통날 터. 재상인 오라비 뒤에 자신이 있다는 걸 짐작 못 할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발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 제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두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지요. 교역을 위해 매번 사신단이 오고 가는 것도 번거로울 테니…… 삭주에서 호시(互市, 두 나라 간의 교역)를 열었으면 합니다.”
“지, 진작 그리 말하지 그랬소. 그랬다면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않았을 것 아니요?”
“역시 태후마마는 말이 잘 통하는 분이십니다. 그럼 저희 쪽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지금 말씀드리는 사항은 모두 칙서에 명확히 기재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10년간…….”
“…….”
꿀꺽. 태후가 마른침을 삼켰다.
“안야국은 삭주와 호시에 관한 권한 일체를 기탄에 일임해야 합니다. 기탄은 삭주를 조차(租借, 일정 기간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빌려 통치하는 일)하여, 앞으로 이뤄질 양국 간 교역을 관리, 감독할 것입니다.”
“……아, 알았소.”
간신히 대답한 태후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지독한 놈. 네놈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눈앞의 사내는,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을 혹하는 발리안은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를 보는 순간, 태후는 이 모든 게 그의 계략임을 눈치챘다.
같은 사신이면서도 엄중한 호위를 받는 사신단과는 별도로 움직인 것. 그래서 발타고가 나쁜 마음을 먹도록 유도한 것. 중간에 나타나 책임을 물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섭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 것. 그래서 더는 자신과 발타고가 물러설 곳이 없도록 몰아붙인 것까지. 아니, 겨우 그것뿐이 아니었다.
처음 안야국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을 때.
[미약한 힘이나마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안야국 같은 대국을 도울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저희로서는 크나큰 영광일 것입니다.]
전혀 예상 못 한 달큼한 제안을 해온 것 역시 그 치밀한 계산의 일환이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제껏 발타고가 부린 패악은 발리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앞으로 안야국이 갈 길은 어둠뿐이었다. 기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안야국과 자신의 미래가 너무도 암담하여 태후는 그만 눈을 감았다.
“그럼 내일, 새로운 칙서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승자의 웃음을 입에 건 발리안이 황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늦게 나타나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이 불청객은 그만 물러날 테니 남은 이야기 마저 나누십시오. 그럼…….”
발리안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모두의 시선을 붙든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빠져나간 연회장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난 폐허 같았다.
* * *
사방이 저녁 어스름에 잠기기 무섭게, 화려한 건물 곳곳에 등롱이 불을 밝혔다. 십자로 갈라지는 회랑을 바삐 지나쳐 온 그림자가 맹유천의 처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접니다, 요희. 잠시 들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마치 춤을 추듯 나긋하고 가벼운 발걸음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지난번 연회에서 발타고를 비롯하여 기탄 사신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성락 장공주. 아니 성락을 대신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편한 차림임에도 사람을 매혹하는 색기는 쉬이 감춰지지 않았다. 요희는 맹유천이 아끼는 애첩인 동시에 가장 유능한 수하였다.
“어서 오너라!”
이제껏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초조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맹유천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분위기가 어떻더냐?”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명국공이라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듯싶습니다. 평소 침묵만 하고 계시던 황제 폐하까지도 크게 역정을 내신 바람에……. 백성들에게까지 이 일이 알려진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겁니다.”
요희가 심각한 얼굴로 맹유천에게 다가왔다.
“중신들의 반응 역시 심상치 않습니다. 태후마마나 재상께서 명국공부의 이권을 두고 자신들만 따돌렸다는 데 분개한 이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
“기탄과의 교섭 결과를 두고도 말들이 많습니다. 중신들 모두가 이 일을 문제 삼는다면 이번만은 태후마마라도 쉽게 넘기지 못하실 겁니다. 이러다 자칫 그 불똥이 상서 어른께 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빌어먹을!”
쾅. 맹유천이 불쾌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게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어쩌다 발리안 같이 비열한 놈에게 그 일을 들켜서는…….”
요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잖아도 혹시 몰라 기탄 사신들을 구슬려 발리안 그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만…….”
맹유천의 눈이 날카로이 번득였다.
“그래, 대체 놈의 정체가 뭐라 하더냐?”
“그것이…… 아주 묘합니다.”
“묘하다니?”
“발리안 그자……. 어미는 대칸의 누이인 장공주이고 아비는 기탄의 네 왕 중 하나인 하투 칸 탁후연이라 하는데…….”
요희의 말에 맹유천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쩐지. 발리안 그놈, 일개 사신이라 보기엔 너무 겁대가리 없이 군다 했더니……. 그는 왕족인 동시에 대칸의 조카이며 발타고와는 사촌지간이었다.
“하투 칸이라면, 기탄의 남동부 지역을 다스린다는 왕이 아니냐?”
기탄은 다섯 부족이 연합하여 이룬 나라로, 각 부족을 다스리는 왕인 칸이 있고 그 위에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황제, 대칸이 존재했다. 통치 형태만 두고 보자면 안야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예. 영토며 군사력이며…… 그 세력이 대칸에 버금간다는 자입니다.”
“그럼 발리안 그놈이 왕자란 말이 아니냐? 한데 어째서 성이 탁씨가 아니라 발씨란 말이냐?”
“그래서 묘하다 말씀드린 겁니다.”
요희가 바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투 칸이 그에게 성(姓)을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기탄은, 성을 붙여 부르던, 빼고 부르던 큰 의미가 없는 안야국과는 사정이 달랐다.
기탄에서 성은, 황족 또는 왕족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높은 사람들의 이름은 성을 붙여 말하는 것이 상례였다.
한데 그토록 중요한 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코 예사로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자로 삼는 것을 내내 미룬 바람에 부족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합니다. 그것에 앙심을 품어서인지 발리안 그자…….”
“…….”
“어미의 장례 날, 하투 칸의 다른 아들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뭐라? 배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예. 한데 그 방법이 여간 무자비하고 잔인한 게 아니어서…….”
평소 대범하고 겁을 모르는 요희가 그녀답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했기에?”
“형제들을 하나같이 목을 그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든 후, 고통 속에 죽어 가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본 데다…… 그들의 피를 잔에 담아 어미의 시신 앞에 뿌리기까지 했답니다. 해서…….”
“……?”
“관을 모신 곳이 역한 피비린내로 진동했다나요. 그 일로 부족은 물론 기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합니다.”
“그, 그런 미친놈을 봤나?”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완전히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세자가 되었다더냐?”
“아니요. 장례가 끝나자마자 왕자 자리를 버리고 부족을 떠났다 합니다.”
“뭐라? 부족을 떠나?”
맹유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발리안 그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기껏 형제들을 죽여놓고 스스로 왕자 자릴 버려?”
“그러니 모두가 기함할 수밖에요. 아무리 못마땅하다 해도 하투 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지금까지도 그자가 하투 칸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이랍니다. 아무튼…….”
요희가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행방이 묘연해서 모두가 죽은 줄 알았는데……. 기탄이 북쪽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느닷없이 수천의 용병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합니다.”
“하……!”
고작 용병대 대장 노릇이나 하려고 맡아놓은 세자 자리를 차 버렸다니.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때부터 기탄이 치른 굵직한 전쟁마다 선봉에 섰다는데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답니다. 워낙 교활하고 머리가 좋아 다 진 싸움도 뒤집어놓기 일쑤라나요. 아무튼 그 공을 높이 사 대칸이 어미의 성씨를 잇도록 허락했다 합니다.”
“그래서 발씨가 되었다?”
“예. 교섭과 거래에 있어서도 감히 그를 따를 자가 없어 대칸이 안야국에 보낼 사신으로 직접 뽑았다 하고요. 그것 외엔 아직껏 이렇다 할 지위도 관직도 가져본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
“워낙 대칸의 신임과 총애가 큰 탓에 태자인 발타고가 그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답니다.”
“빌어먹을!”
발끈한 맹유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필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적이 ‘머리가 좋으면서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어쩌다 그런 놈과 엮여서는. 이렇게 되면, 나중에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삭주를 되찾아 오려는 계획은 애초부터 물 건넌 간 셈이었다.
하……. 맹유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떡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이냐?”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맹유천을 향해 요희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도 다 방법이 있게 마련입니다. 일단 중신들부터 달래야 합니다. 그들이 입을 닫으면 제아무리 큰 문제라도 결국 유야무야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맹유천이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요.”
“간단한 방법이라니?”
“세상에 미인과 명예를 마다할 사내는 없다 했습니다. 중신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원래 진행하려던 상서 어른의 계획을 조금만 더 키우면 될 일입니다.”
“그 말은……!”
맹유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풀어졌다.
“과연, 요희 네 머릴 따를 자가 없구나!”
맹유천의 입꼬리가 이내 하늘을 향해 솟았다.
“지금 당장 태후마마를 뵈어야겠다.”
얼굴 가득 야비한 미소를 지은 맹유천이 금세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