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달갑지 않은 손님 3
* * *
이미 모든 교섭이 끝나고 그 결과로 안야국 황제가 기탄의 대칸에게 보내는 칙서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공식 절차를 거쳐 완료된 일을 두고 딴지를 걸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모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구냐? 대체 어느 놈이 감히……!”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조금 떨어진 무대 위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
“세, 세상에!”
“어머나!”
태후를 시작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입이 무방비로 벌어졌다.
저녁 바람에 검고 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휘날리며 나타난 사내. 그는 놀라우리만치 섬세하고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눈을 닮은 새하얀 피부. 그 위에 얹힌, 마치 그림처럼 또렷한 이목구비. 거기 여느 사람을 능가하는 커다란 키와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
빛을 향해 걸어 들어오는 그는 마치 꿈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동물 가죽을 댄 거친 옷, 투박한 야만인의 차림조차 매력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 모두가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압도당해 넋을 놓았다.
“……!”
효령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입을 막았다. 눈앞의 그가 너무도 낯익어서였다. 그는 분명 효령이 부용각에서 만났던 사내였다.
‘저 사람이 여긴 왜……?’
당황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발타고의 얼굴에서도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빌어먹을! 저놈이 어떻게 여길……?’
모두의 눈이 한곳에 모인 가운데. 사내가 정면의 상석에 앉은 안야국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발타고나 다른 사신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정중한 태도였다.
“신, 기탄의 사신 발리안(跋利㷳), 안야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이렇게 늦게야 찾아뵙는 것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 그대가 기탄의 사신이라고?”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 생김새만으로 모두에게 충격을 안긴 사내는 안야국에 온 사신, 안야사(安邪使) 중 하나였다.
“이런 말 미안하지만, 그대의 외모가…….”
황제의 말에 발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모께서 마자란족 출신이십니다.”
마자란족. 서쪽을 향해 가다 보면 태양이 내려앉는 사막의 끝, 푸른 호수 곁에 산다는 전설 같은 민족이었다. 파란 눈에 하얀 피부, 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그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멀리 동쪽 땅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해를 넘기며 가야 닿는 먼 곳에 있는 탓에, 황제를 비롯하여 안야국 중신들 모두, 그 피를 이은 자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대도 사신이라면서 어찌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황제의 물음에 발리안이 정중히 대답했다.
“한경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나, 부득이하게 지금에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발씨라면, 혹 기탄의 황자십니까?”
성질 급한 안야국 중신 중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기탄에 존재하는 성씨는 단 5개뿐이었다. 황족인 발씨, 부족장으로 출발하여 이제는 번국(藩國)의 칸(왕)이 된 탁씨, 연제씨, 걸씨, 허씨. 나머지는 모두 성 없이 이름으로만 불렸다.
발리안을 두고 황자냐 묻는 말에 발타고가 발끈했다.
“화, 황자는 무슨? 저자의 성(姓)은 어미를 따른 것이다. 아비가 성씨 물려주는 것을 거부한 후레자식을 두고 황자라니?”
눈앞에서, 기탄의 태자가 같은 편을 모욕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느닷없는 구경거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웅성거렸다. 중신들의 재촉에, 여기저기서 말을 전하는 역관들만 바빠졌다.
“태자 전하. 저 역시, 저처럼 부족한 자에게 황족의 성을 허락하신 것이나, 사신의 중책을 맡기신 대칸의 뜻이 몹시도 궁금합니다.”
발리안은 발타고의 도발에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제 맡은 임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이제야 나타나? 쇳덩어리 같은 놈이 병은 무슨 얼어 죽을? 계집을 끼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겠지. 덕분에 여기 있는 우리만 고생을……!”
순간 발리안의 눈이 정면으로 그를 향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태자 전하. 제가 왜 이렇게 늦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흐윽. 대번에 발타고의 안색이 변했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인지, 발타고가 입을 다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간단하게 발타고의 입을 막은 발리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태후를 향했다.
“송구하지만, 태후마마. 전 예상 밖의 선물을 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그게 무슨……?”
“공무역에 참여했던 기탄의 상인 하나가 며칠 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제 처소에서…….”
“……!”
그제야 그 말뜻을 깨달은 태후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제가 긴말로 태후마마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칙서의 내용을 바꾸십시오. 처음 대칸께서 원하셨던 대로…….”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태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발리안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발타고, 이 빌어먹을 놈.’
태후는 당장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발타고, 저 음흉한 놈에게 속다니.
그녀는 발리안이 선물 운운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죽이려던 상대가 그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칸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사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기탄에 전해진다면 안야국의 운명은 끝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중히 묻겠습니다. 태후마마.”
“…….”
“골치 아픈 협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쯤에서 모든 걸 웃으며 마무리 지으시겠습니까?”
끄응. 태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해 제가 당한 일은 모두 잊도록 하지요. 하지만 한 가진 꼭 받아야겠습니다.”
“그, 그게 무엇이오?”
묻는 태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게 삭주를 내주십시오.”
“……!”
삭주. 발리안의 입에서 나온 지명에 효령의 눈이 커졌다. 삭주, 삭주라니……. 그곳은 명국공부가 위치한 곳이었다. 그가 왜 하필 삭주를…….
‘설마……!’
순간, 어떤 깨달음이 효령의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흑야차가 명국공부를 습격했습니다.」
「검은 가면을 쓴 흑야차가 한유 공자님을…….」
흑야차. 구리쇠로 만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싸운다는 기탄의 장수. 그는 멋으로 가면을 쓴 것이 아니었다.
남보다 하얀, 그래서 어디서고 눈에 띄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쓴 것이었다. 게다가 부용각에서 보았던 그의 몸을 뒤덮은 상처들. 그건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맞은 화살 때문이었다.
맙소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한 흑야차는 다름 아닌,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발리안이었다. 그동안 효령이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기탄의 사신단 중 흑야차라 여겨지는 사람이 없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놀란 효령의 눈이 다시금 그를 향한 찰나.
형부 상서 맹유천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소. 우리가 기탄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많은 걸 양보하지 않았소? 한데 삭주를 내놓으라니? 세상에 그런 망발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대체 말이 됩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주변에 앉은 안야국 중신들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모두의 비난에도 발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소를 머금은 그가 맹유천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망발이라…… 그럼 댁이 명국공부에서 저지른 일은, 뭐라고 해야 하나?”
순간, 맹유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내내 여유를 보이던 발리안이 삽시간에 표정을 바꿨다. 가늘어진 눈에서 싸한 냉기가 흘렀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면…… 그만 뒤로 빠지시지. 난 시시한 하수인 따윈 상대하지 않으니까.”
“……!”
맹유천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일국의 형부 상서를 상대로 함부로 말을 놓은 오만불손함 때문인지, 아니면 제대로 정곡을 찔렸기 때문인지.
보란 듯 맹유천을 뭉개버린 발리안이 황제와 다른 중신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들 아십니까? 명국공부가 있는 삭주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큰, 큰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안야국 중신들이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여기까지 소문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조만간 알려질 일이니 제가 대신 전하지요. 얼마 전, 명국공과 그 가족이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뭐, 뭐요?”
황제를 비롯하여 안야국 중신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듣자 하니 기탄 군사들이 저지른 일이라더군요. 하지만 아닙니다. 명국공은 안야국 사람들 손에 죽었습니다. 얻는 것도 없이 우리 기탄이 누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안야국에는 명국공을 죽일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소이다. 대체 안야국 사람 누가 명국공을 죽였단 말이오?”
안야국 중신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명국공은 선황제 시절부터 온 안야국이 알아주는 충신이었다. 거칠 것 없는 태후조차 백성들의 반발이 두려워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관직을 떠난 지 오래인 데다 고향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명국공이 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한경으로 오는 도중, 명망 높은 명국공을 뵙기 위해 공부에 갔다가 수상한 자들을 붙잡았습니다. 그것도 꽤 여럿을요.”
“그들이 누구요? 어서 말해 보시오.”
“맞소이다. 정확한 증거를 대보시오. 그게 아니라면 기탄군이 한 짓이 아니라는 그대의 말을 믿을 수 없소이다.”
질문이 빗발치자, 발리안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자객들을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