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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7화 (7/116)

7화. 달갑지 않은 손님 2

* * *

“으응?”

뜻밖의 말에 발타고가 고개를 들었다. 과연 늘어선 장공주들의 숫자가 아는 것과 달랐다. 조금 전의 민망함도 잊고 발타고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야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후.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소? 난 모든 장공주들을 본 후에 기탄에 데려갈 사람을 고른다 했는데. 하나는 어디로 빼돌린 것이요?”

거친 언사에도 태후는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조금 늦는다 연락이 왔소. 태자가 서두르지 않았다면 제때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아! 마침 저기 왔군요.”

그녀의 눈이 무대 위를 향했다.

사뿐사뿐.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나긋한 발걸음의 여인이 푸른 옷을 입고 걸어 들어왔다.

“……!”

효령을 비롯한 장공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죽은 성락을 대신하는 이. 그러나 그녀는 평범했던 성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겨우 눈만 드러내고 있음에도 그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매력과 요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굳어 있는 장공주들과는 달리 그녀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발타고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그녀는 노골적으로 눈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향해 태후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락 장공주. 네가 늦는 바람에 기탄의 태자께서 몹시 기분이 상하셨다. 사죄드려라.”

“송구합니다, 태자 전하. 몸이 불편하여 조금 늦었습니다. 어찌하면 이 무례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교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 저 아이가 어찌해야 태자의 화가 풀리겠소?”

“그, 글쎄 뭐가 좋을지…….”

좀 전의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발타고가 한 발 빼고 나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느새 확 누그러져 있었다. 입이 헤벌쭉 벌어진 것이 상대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녀가 태자 전하께 한 잔 올려도 실례가 아닐는지요, 태후마마?”

“그 정도로 네 결례가 무마될 수 있다 생각…….”

태후의 지청구 사이로 발타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너그러운 아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럼…….”

성락을 대신하고 있는 여인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태자 전하.”

그녀가 보이는 행동으로, 거기 자리한 안야국 사람들은 그녀가 진짜 장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눈치챘다. 그러나 야만족들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발타고를 필두로 기탄의 사신들은 하나같이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발타고는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기막힌 향기에 당장 몸이 달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냉큼 낚아채고 싶은 것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술을 따른 그녀가 매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제 되었다.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라.”

태후의 명에 그녀를 비롯한 모든 장공주들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발타고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조금 전, 그 장공주는 누구요?”

“성락이라 하오. 안야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그 어미를 닮아 미색이 단연 으뜸이지요.”

장공주들이 물러난 후.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무희들이 다시 무대를 채웠다. 술잔을 들이켜는 발타고의 눈빛이 새로운 계산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훗.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태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양국 간 본격적인 교섭은 내일부터였다. 그러나 태후와 발타고 사이, 거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 * *

“간밤 즐거우셨소, 태자?”

태후의 물음에 발타고의 입매가 야릇하게 휘어졌다. 뜨거웠던, 아니 광란에 가까웠던 지난 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모처럼 즐거웠소이다, 태후.”

“즐거웠다니 다행이오. 오늘 밤도 기대하시오.”

“내 직접 이곳에 오기를 잘했군. 태후의 대접이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소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지만. 그래, 날 은밀히 보자 한 이유가 뭐요?”

제법 배포가 큰 척, 능글맞게 구는 발타고를 향해 태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 태자 앞에 무얼 감추겠소. 일국의 태후가 되어 이런 말 하긴 정말 민망하지만…… 지난 몇 년간 반란군 놈들과 싸우느라 황실 창고가 텅텅 비어 버렸지 뭐요.”

“…….”

“이번에 기탄에 곡식이며 술이며 토산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황실 재정이 빠듯하다오. 한데 여기에 비단이며 다른 물품들마저 헐값에 가져간다면…….”

태후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시오, 태자. 난 태자가 대칸이 되어서도 오래오래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소. 그러기 위해 조금만 우리 사정을 봐주면 안 되겠소?”

“안야국 사정이 어려운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소이다. 허, 이것 참 난처하군.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날 정성껏 대접한 태후의 사정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발타고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놈.’

역관이 전하는 말에, 태후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발타고가 선심이라도 쓰듯 거들먹거렸다.

“좋소. 태후가 보인 성의를 생각해 내 최대한 안야국 사정을 보아주겠소. 아버지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지.”

“역시 태자는 도량이 남다르시오. 고맙소. 나와 황상, 안야국 백성들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잠깐!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소.”

발타고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단 말이지.”

“그게 무엇이오?”

“나나 아버지는 애초에 안야국에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이 없었소. 곡식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발타고의 얼굴에서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데 장사치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리 아버지를 부추기는 놈이 있단 말이오.”

“장사치?”

“우리 사신단과 함께 들어온 상인 놈이오. 이번에 기탄이 주장한 모든 계획이 놈의 머릿속에서 나왔소. 아직 안야국은 가진 것이 많으니 한껏 고삐를 죄어야 한다고 말이오.”

“잠깐. 고작 장사치 하나 때문에 우리 안야국이 이 고생을 하게 되었단 말이오? 대칸께서는 어찌 그런 장사치의 말만 믿고…….”

“워낙 수완이 좋은 놈이라 그렇소이다. 갖은 입에 발린 소리로 내 아버지를 구워삶았지, 그 빌어먹을 놈이……!”

말을 하다 말고 발타고가 이를 갈았다.

천하의 재수 없는 놈. 물론 놈은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었다. 반쪽짜리이긴 했지만, 그 몸엔 엄연한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놈이 그저 이문에만 밝은 놈이었다면 태자인 자신이 나서 굳이 제거하려 들 필요조차 없을 터.

놈의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 대칸의 눈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 의견은 쉬이 뭉개버리는 아버지가 놈의 말이라면 단 한 마디도 허투루 흘리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을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놈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어떻소? 놈을 해치울 수 있겠소? 만약 그놈만 해결해준다면 내, 태후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겠소.”

발타고가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태후의 말처럼 난 차기 대칸이 될 몸이오. 우리가 좋은 인연을 맺는다면 앞으로 두 나라는 오래도록 평안할 것이 아니오?”

태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둔한 놈이 못 죽여 안달인 자라……. 발타고가 죽여 달라는 상대는 그와는 다르게 머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적 가운데 머리를 쓰는 자가 있다는 것은 태후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태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안야국에서 기탄의 상인이 죽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질 않겠소?”

“후환이 없도록 아예 시체째 없애버리면 될 것이 아니오? 아버지껜 내가 적당히 둘러댈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하리다. 대신 태자도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오.”

“물론.”

두 사람 사이, 드디어 은밀한 거래가 성사되었다.

* * *

어둠이 내렸음에도 황궁은 대낮처럼 환했다. 오늘은 기탄의 사신단을 환송하는 마지막 송별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첫 연회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태후와 안야국 중신들의 표정이 매우 밝다는 것이었다. 이 밤만 지나면 저 고약한 야만족들의 꼴을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태자께서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깊이 마음을 써준 덕분에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었소. 부디, 돌아가는 길도 평안하기를 빌겠소.”

“고맙소이다, 태후. 그간 잘 지내다 가오. 내 가서 대칸께 안야국 사정에 대해 잘 설명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발타고가 으스대며 말했다.

처음, 태후가 받아든 대칸의 칙서는 거의 위협에 가까웠다. 상인들과 백성들을 아무리 쥐어짠다 한들, 몇 년을 버티지 못할 만큼 무리한 요구였다. 그러나 발타고를 구워삶은 덕분에 안야국의 부담은 절반 이상 줄었다. 양쪽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참으로 기꺼운 밤이었다.

그 자리에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황제와 장공주들 뿐이었다. 누가 대칸의 후궁으로 갈 것인지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까닭에, 그들에게는 연회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장공주들 틈에 조용히 앉아 있던 효령이, 문득 절 향한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

형부 상서 맹유천. 그가 효령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제가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절 믿으십시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태후가 장공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실컷 즐겨 두어라. 이 밤이 모두가 함께하는 마지막 연회일 테니. 기탄 대칸의 후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사람은…… 장공주 성락이다.”

“……!”

“……!”

기탄의 사신단이 오고 처음, 황제와 장공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늙은 야만인의 첩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모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효령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런 뜻이었어? 성락이 죽은 게 차라리 나에게는 잘된 일이란 게?’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자매의 죽음을 빌미로 얻은 자유라니. 미안하고 죄스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효령이 홀로 죄책감을 다스리려 애쓰는 사이.

“명성 높은 기탄의 대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락으로 위장한 여인이 태후와 발타고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이 불행이 싫지도 않은지 밝은 목소리였다.

“내가 친딸처럼 아끼던 아이이니, 대칸께 잘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내 특별히 신경을 쓸 테니.”

태후와 발타고가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이로써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성락 장공주가 준비를 마치는 대로 우리 쪽 사신들과 같이 보내겠소. 혼수품들과 더불어 칙서에 약속한 물품들도 그때…….”

태후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막 다시 입을 연 순간.

“송구합니다만, 그 칙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둠을 뚫고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일시에 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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