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달갑지 않은 손님 1
* * *
「장경각에서…… 꽤 불쾌한 장면을 보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효령 장공주님을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니까요.」
맹유천의 말을 떠올린 효령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혹 성락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라도…….
「정히 불쾌하셨다면…… 장공주님이 오늘 천위헌에서 저지른 일탈을 눈감아 드리는 값이라고 생각하시지요.」
맹유천의 비열했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더럭 숨이 막혔다.
우린 피할 수 없는 덫에 걸린 거야. 그렇지, 성락아? 미안해. 네 죽음을 제대로 슬퍼해 주지 못해서. 슬프지 않아서가 아냐. 우린 지금 너무 무섭거든. 그래서 그래, 그래서 정말…… 미안해.
또르르, 효령의 눈으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 가, 성락아.’
효령은 성락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적어도 그녀는 더는 고통 받지 않을 터. 이 참담한 상황에서 오직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그 옷을 걸치면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그건 네가 내 것이라는 증거니까.」
문득, 절 구해 준 야만족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로구나…….
늘 경멸하고 무시하던 잔인한 야만족에게 은혜를 입을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잔혹한 현실에, 그 낯설었던 친절함이 오히려 저리도록 뼈에 사무쳤다. 효령은 어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림 같던 하얀 얼굴이 또렷해지면서 점차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난 절대 죽지 않아. 살아서 반드시 한유를 찾아야 하니까.’
헝클어진 마음을 다잡은 효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그리고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장공주를 향해 다가갔다.
“언니, 이러다간 감기 걸려요.”
“고마워, 효령아. 덕분에 살았어. 네 덕분에…… 흐윽.”
그제야 살아 있음을 실감한 그녀가 자신에게 옷을 걸쳐주는 효령을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암담한 밤. 어둠은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두려운 내일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 * *
띵띠리 띠리리리리.
퉁소와 피리, 요고(腰鼓) 소리가 요란한 틈으로 비파의 흐드러진 음률이 봄날의 정취를 돋우었다. 따스한 밤바람에 꽃향기가 스미고, 탁자 위에선 그보다 진한 술 내음이 진동했다.
지금 안야국의 황궁에서는 기탄의 사신단을 맞아 대규모 연회가 한창이었다. 아름다운 무희들의 군무가 이어지는 가운데 요란한 웃음소리가 연신 공기를 뒤흔들었다.
“으하하하하.”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대가 잘 보이는 곳 상석의 중앙에 자리한 기탄의 태자, 발타고였다. 그는 휘어질 듯 낭창낭창한 몸매의 무희들을 안주 삼아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옆자리의 안야국 황제와 황후, 태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 시선은 노골적으로 무희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러나 그 불쾌한 꼬락서니에도 다들 발타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전전긍긍이었다.
크으. 기분 좋게 술잔을 내려놓은 발타고가 황제에게 말했다.
“이거, 내 눈이 오랜만에 엄청나게 호강을 하외다.”
나름 점잖게 한다고 애를 썼지만, 일국의 황제에게는 부적절한 언사였다. 말을 전하는 역관이 제대로 된 말을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
“거참, 어쩜 이리 계집들이 하나같이 고운지……. 참으로 탐이 나는구려.”
산만 한 덩치에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행동과 말. 황제가 언짢은 기색을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 저 아이들로 태자를 모시게 하겠소.”
태후가 재빨리 끼어들어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이 나라의 진짜 황제는 태후라더니,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 이왕 보내줄 거 하나 말고, 모조리 다 보내주시오. 내 저 예쁜 것들에게 제대로 된 사내 맛을 보여줄 테니, 하하하.”
발타고가 화통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하하.”
기탄의 사신들이 발타고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신이 난 것은 오직 그들뿐이었다. 안야국 쪽 분위기는 싸하니 얼어붙었다. 모두가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삼키느라 말없이 애꿎은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 따위, 발타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껏 기분이 들뜬 그가 제멋대로 입을 놀렸다.
“원래 내 아버지 대칸께서 원하신 건,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들이 아니라 바로 태후였소. 과부가 되어 오래도록 외로웠을 태후를 달래 주고 싶다 하셨지.”
도를 지나친 망발에 내내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태후의 얼굴마저 굳어버렸다. 대부분이 제 일가친척들이라고 하지만 중신들 앞에서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내가 태후의 처지를 생각하여 아버지를 뜯어말렸지 뭐요? 여자와 고기는 어린 것이 야들하니 훨씬 더 좋다고. 으하하하하.”
생각 없이 뱉는 말이 고의적인 말보다 더 지독했다.
이런 미친놈.
분노에 질려 태후의 눈썹과 입술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성정대로라면 당장 발타고의 목을 비틀어 죽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모욕을 견뎌야 할 만큼 안야국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길게 이어진 반란과 번번이 패한 싸움으로 국력이 바닥이었다. 이 야만족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나라가 동강 나거나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오직 자신의 오랜 영화를 위해 태후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리 마음을 써주니 고맙구려. 맞소이다. 이미 쇠한 나보다야 어리고 예쁜 장공주들이 백번 낫지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타고가 눈을 빛냈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어여쁘다는 안야국 장공주들 구경 좀 합시다.”
아직 남은 순서는 많지만, 지금은 발타고의 말이 곧 법이었다.
태후의 눈짓에, 장공주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운명의 시간이 앞당겨졌다.
주르르.
궁녀들의 인도를 받은 장공주들이 무대 위로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 무희들이 채웠던 자리에 푸른 옷과 붉은 옷의 장공주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금지옥엽 귀한 신분의 그녀들이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
안야국 역사에 유례없는 참담한 광경. 황제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이들을 지킬 힘은 없으나 적어도 그는 양심적인 사내였다. 어머니인 태후의 기세에 눌려 큰 소리 한 번 못 내는 자신이 오늘처럼 원망스러운 날이 없었다.
태후가 장공주들에게 베푼 유일한 자비는 눈 아래를 가리게 한 것이었다. 겨우 그것으로 장공주들의 수모와 치욕이 덜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여기, 태후 한 사람뿐이었다.
“뭣들 하는 게냐? 기탄의 태자께 예를 올리지 않고.”
태후의 재촉에 장공주들이 몸을 떨며 간신히 인사를 올렸다.
“안야국의 장공주들이 기탄의 태자마마를 뵈옵니다.”
“그래, 그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으하하하하.”
발타고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원래 아버지인 대칸은 안야국에 후궁을 보내라고만 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장공주들의 얼굴을 보고 선택하겠다 통보한 것은 발타고 본인이었다.
그에게는 꿍꿍이가 있었다. 기탄에는 대칸이 죽고 나면 차기 대칸이 그 후궁을 물려받는 풍습이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면 어차피 자신의 것이 될 여인이니 직접 보고 취향에 맞는 사람을 고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럼 어디 제대로 살펴볼까.”
발타고가 술내를 풍풍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쿵쿵. 집채만 한 몸집이 바닥을 울리며 장공주들을 향해 다가왔다. 겁에 질린 장공주들의 눈썹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흔들렸다.
술 냄새에 섞인 정체 모를 역한 냄새. 구질구질하니 제멋대로 솟은 수염과 누런 이. 손등을 가득 채운 문신. 온몸으로 야만족임을 드러내는 발타고는 존재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장공주들이 울지 않으려, 까무러치지 않으려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제발, 제발…….
오늘처럼 간절히 누군가에게 빌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내를 앞에 두고 제 얼굴이 못나 보이기를 바라는 것도.
“…….”
효령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야국에서 붉은색은 혼인을 상징하는 길한 색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피눈물을 대신하는 고통의 색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는 비굴해지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마침 바로 옆에 선 발타고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장공주의 턱을 들고는 손가락으로 그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창부를 대하듯 하는 음란한 손길에 장공주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쓰읍.
발타고가 보란 듯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상대를 희롱하려 일부러 하는 행동이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장공주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
효령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모든 장공주들이 얼음처럼 얼어붙은 가운데 나타난 최초의 움직임. 거기 발타고가 관심을 보였다.
그가 효령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효령은 그 방탕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흐흐. 제법 배짱이 있는 계집이로구나.”
“기탄에는 계집이 있을지 모르지만, 안야국에는 여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역관이 전하는 말에 발타고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이내 조롱이 가득 찼다.
“확실히 여느 계집과 다르긴 다르구나. 내 앞에서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니.”
“송구합니다. 명성 높으신 기탄의 태자께서 어떤 분인지 너무도 궁금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효령이 지긋이 고개를 숙였다. 절대 상대를 자극해서도, 태후에게 밉보여서도 안 되었다. 그녀의 목표는 결코 자신을 나락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었다.
장공주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키는 것. 그 불가능한 일을 이뤄내려는 것이었다.
“눈이 고운 것이, 천 쪼가리로 가린 나머지 부분도 궁금하구나.”
어느새 발타고의 눈은 입 아래를 가린 천을 지나 효령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몸이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효령은 감정을 감추며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뻘 되실 분을 선택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시겠지만, 이것이 안야국의 법도라서 더는 보여드리기 어렵습니다.”
“……!”
순간, 발타고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의 하는 꼴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찌 비치는지를 겨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후궁을 고른답시고 와서 그녀들을 희롱한다? 아들이 나서서 아버지를 욕보이는 꼴이었다.
후끈, 얼굴이 달아오른 발타고가 나머지 장공주들을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지나쳐 자리로 돌아갔다.
“오, 오늘은 내가 너무 취해서 다음날 다시 봐야 할 것 같소.”
그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발타고의 곁에 앉은 일행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 이상합니다. 장공주님의 숫자가 모자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