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덫
* * *
“……!”
처소의 계단 끝에 올라선 효령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얼굴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진용원에 가셨다 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장공주님.”
소름 돋는 목소리에 효령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형부 상서 맹유천. 태후의 이종사촌 동생인 그는 추씨가 아님에도 황궁 안에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일국의 법과 그 집행을 좌지우지하는 막중한 자리에 앉기에는 너무 젊었다. 윤기가 흐르는 미끈한 얼굴과 비열한 표정이 특징인 그는 태후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황궁 안에는 그가, 태후가 부리는 비밀조직의 수장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바쁠 텐데 형부 상서가 여긴 어쩐 일로…….”
“태후마마께서 장공주님을 찾으십니다.”
태후가 찾는다는 말에 효령의 등 뒤로 식은땀이 솟았다. 설마, 오늘 일을 벌써 들킨 건가.
“태후마마께서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로 날 찾으시는 겁니까?”
효령이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장공주님들께 이를 말씀이 계신 모양입니다. 효령 장공주님을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들 장경각에 모이셨을 겁니다.”
태후가 자신만 부른 것이 아니란 사실에 효령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전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
맹유천이 효령을 불러 세웠다.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제가 모시지요.”
그가 틈을 주지 않고 교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자넨 여기 있게. 특별히 장공주님들만 모셔오란 명이었으니. 가시지요, 장공주님.”
효령이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럼 부탁합니다, 형부 상서.”
교기를 뒤로하고 효령은 형부 상서의 뒤를 따라갔다.
저벅저벅.
효령의 처소를 빠져나와 장경각 앞 연화문에 이르기까지, 맹유천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대체 할 말이란 게 뭘까?’
효령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참다못한 효령이 먼저 말문을 열려는 찰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진용원 외에 들르신 곳은 없습니까?”
“……!”
당황한 효령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들킨 건가. 긴장한 그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비소를 흘린 맹유천이 효령 쪽으로 돌아섰다. 커다란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그의 안광이 매섭게 번득였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장공주님께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셨다면 저로서는 아마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그가 효령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오늘 저기 장경각에서…….”
그의 시선이 힐끗, 커다랗게 솟은 장경각의 지붕을 향했다.
“꽤 불쾌한 장면을 보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효령 장공주님을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니까요.”
“그게 무……!”
말을 하다 말고 효령이 바짝 굳었다. 맹유천이 그녀의 손을 붙들어 거기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효령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냈다.
“이런, 놀라셨습니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두운 곳에 장공주님과 단둘이 있으니 저도 모르게 흥분이 돼서 그만…….”
그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불쾌하셨다면…… 장공주님이 오늘 천위헌에서 저지른 일탈을 눈감아 드리는 값이라고 생각하시지요.”
“다, 당신…….”
너무도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기탄의 사신들이 떼로 몰려오든 장공주님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지켜드리겠다고…….”
“……!”
쫘악. 효령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나무함 속에 든 쪽지를 보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맹유천이었을 줄이야.
효령이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맹유천이 그녀를 두고 순순히 옆으로 비켜났다.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그만 들어가 보시지요. 아, 참. 제가 적당히 둘러댔으니 늦은 걸 탓하진 않으실 겁니다.”
“……!”
끔찍함에 몸서리를 친 효령이 달아나듯 연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장경각에 들어선 순간. 싸늘한 냉기가 효령의 전신을 휩쓸었다.
“……!”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낀 그녀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태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늦었습니다, 태후마마.”
장경각의 분위기는 자못 살벌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은 오직 태후뿐. 장공주들은 그녀의 눈앞에 두 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효령은 당장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각오했지만, 맹유천의 말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태후의 고갯짓에 효령은 얼른 자리를 찾아 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드디어 태후의 입이 열렸다.
“끌고 와라.”
“예, 태후마마.”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경각의 옆문이 열리고 반라의 여인이 궁녀들의 손에 끌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온전한 모습이었을 그녀의 옷은 모진 채찍질에 여기저기 찢어진 상태였다. 가슴이며 허벅지며, 몸 구석구석이 제멋대로 드러나 있었다.
“누군지 잘들 보아두어라.”
태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녀들이 여인을 장공주들 앞에 내던졌다.
“아악!”
“아아!”
장공주들이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처참한 모습의 주검이 되어 눈앞에 널브러진 이는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장공주 성락. 얌전하고 조용한 것이 별로 말이 없던 자매였다.
“이 계집이 감히 내 명을 어기고 외간 사내와 몸을 섞었다. 만에 하나 이년이 대칸의 후궁으로 선택되었다면…….”
태후가 부르르 치를 떨었다. 뒤늦게 기탄에 보낸 후궁이 처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으로도 뒤통수가 서늘했다.
“내, 약속대로 사내들의 옥사에 던져 넣으려 했건만. 독한 것이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 이년 때문에 하마터면 나라가 크나큰 위기에 처할 뻔했다.”
빠득빠득 이를 갈던 태후의 시선이 눈앞의 장공주들을 향했다.
“내일이면 기탄의 태자를 맞이해야 하는데 여기 너희들 중, 이년과 같은 경우가 없다 어찌 장담한단 말이냐?”
날카로운 눈초리가 장공주들을 내리훑었다. 겁을 먹은 장공주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내 더는 나라의 안위를 두고 모험을 할 수 없으니…… 벗어라.”
태후의 말에 장공주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어서 벗지 못하겠느냐? 뭣들 하느냐? 당장 이것들의 옷을 벗기지 않고…….”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둘러서 있던 궁녀들이 장공주들에게 달라붙었다. 무자비한 손길이 금지옥엽 장공주들의 몸에서 함부로 옷을 걷어냈다. 죄인을 다루는 것과 다름없는 처사였다. 장공주들의 공포에 찬 흐느낌이 장경각에 울려 퍼졌다.
궁녀들에 의해 몸이 휘둘리는 가운데, 효령의 눈은 태후를 향했다. 효령 역시 수치심을 지우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목욕 때면 여럿의 궁녀 앞에 드러내는 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수치보다 더한 것은 분노였다.
차라리 고이 죽일 것이지.
공식적으로 태후는 여기 있는 모든 장공주들의 어머니였다. 세상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딸들을 이리 취급한단 말인가. 장공주들의 삶에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옷을 벗겨낸 궁녀들이 매의 눈으로 장공주들의 몸을 살폈다. 궁녀들의 눈길에 은밀한 곳까지 모두 까발려졌다.
“여기 이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한 궁녀가 고자질이라도 하듯 요란하게 소리쳤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지적을 받은 장공주가 발가벗은 몸으로 태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 오해입니다, 태후마마. 며칠 전 몸이 좋지 않아 뜸을 떴는데 그 화상 자국이 남은 것입니다. 결코 사내를 가까이한 적은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야만족의 후궁이 되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눈앞의 죽음이었다. 며칠 전까지 얼굴을 마주하던 자매의 주검은 그녀의 공포를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오냐. 내, 믿어 주마.”
태후가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죽다 살아난 장공주가 태후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태후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몸단장을 소홀히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태, 태후마마.”
장공주의 얼굴이 다시금 사색이 되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태후마마.”
“여봐라. 당장 이 계집을 끌…….”
“태후마마.”
그 순간. 공포의 도가니가 된 장경각 안에 효령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성락이 죽었습니다. 선보이기로 한 장공주가 둘씩이나 줄어든다면…… 기탄에서 안야국 황실의 성의를 의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장공주 대신 끼워 넣을 계집은 얼마든지 있으니.”
“물론 태후마마시라면 그만한 대비쯤 하셨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예측불허의 야만족입니다.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라?”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면 누구든 장공주로 만드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연회는 당장 내일입니다.”
“…….”
“만에 하나 그녀가 실수라도 하여 장공주가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이 처녀가 아닌 장공주를 후궁으로 보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
“기탄의 태자께서 자신들을 야만족이라 얕본다, 노여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그 자리에서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효령이 일부러 말을 끊었다. 태후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 길게 말을 이었다간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며 도리어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것 없는 말에 태후의 미간이 흐려졌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가짜를 끼워 넣는 것은 역시 위험성이 높았다. 이 상황이 못마땅함에도 태후는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다, 내 이번만은 참고 넘어가마. 하나 내일 준비에 한 치의 소홀함이라도 있었다간, 모두들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죽는 것보다야 야만족의 후궁이 되는 게 백번 낫지 않겠느냐?”
끼익. 그녀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후의 뒤를 따라 궁녀들이 썰물처럼 장경각을 빠져나갔다.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성락 장공주의 시체가 다시 짐짝처럼 질질 끌려 나갔다.
버려지듯 남겨진 장공주들은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울기 바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스스로 옷을 벗은 적도, 입은 적도 없는 그들이었다.
“…….”
효령의 시선이 성락이 사라진 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