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정체불명의 사내 2
* * *
“기탄의 태자께서 넘기실 말들은 그대들이 기대하는 명마가 아니다. 품질이 떨어지는 하급 말들이다.”
사내의 말에 상인들 사이 동요가 일었다.
“뭐, 뭐요?”
“딱하기도 하지. 지금 상황으로는 가진 모든 것을 공짜로 내놓으라 해도 안야국 황실이 거절하지 못할 판인데, 그럼 제대로 된 거래를 기대했다는 건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우리더러 모두 죽으란 거요?”
너무도 기우는 거래에 억울함을 느낀 한 상인이 겁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사내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맨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상인이 우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오? 어찌해야 이 난관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겠소? 제발 좀 일러주시오. 부탁이오.”
“부탁합니다.”
“부탁이오, 제발.”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두 손을 모으며 애원했다.
“그렇게까지 사정을 한다면야…….”
사내가 상단의 대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
사내가 물러나자 털썩, 상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를 향해 다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뭐랍니까? 우리가 살길이……?”
“말씀 좀 해보시오. 어서!”
“어서 말을 해보시오. 예?”
“지금 혼자만 알려고 이러는 것이오?”
다른 상인들이 반쯤 정신이 나간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제 별실은 야만인들이 아닌, 안야국 상인들이 일으키는 소란으로 시끄러웠다.
그 모습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지은 사내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지금 당장 안야국을 떠나라. 그대들이 살길은 그것뿐이다.」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 망연자실 넋을 놓은 상인은 모두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허공만 노려보았다.
* * *
탁.
급히 별실을 빠져나온 효령이 사내의 팔을 붙들었다.
“저기요.”
“……”
사내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를 섬뜩함에 효령은 얼른 손을 떼었다.
그녀의 뒤에 바짝 붙은 교기가 경계의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효령의 뒤를 쫓던 이들은 이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곳은 야만족의 소굴이었다. 오히려 아까 그자들보다 눈앞의 사내가 더 위험해 보였다.
“궁금한 게 있는 얼굴이군. 따라와라. 내가 빚진 것도 있으니. 단…….”
“……?”
“그쪽 혼자만.”
사내가 효령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기가 안 된다며 효령을 말리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효령이 급히 그를 쫓아갔다. 다행히 사내는 교기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멈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효령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탁.
‘……!’
문을 닫기 무섭게 효령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마치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렸다는 듯 효령의 허리를 낚아챈 사내가 다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놀란 효령이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품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할 만큼 압도적 힘의 차이.
사내는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 강했다. 그의 한쪽 팔에 붙들린 허리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아팠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교기는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
그녀의 두려움을 감지한 사내의 눈이 야수처럼 번득였다. 그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에 효령은 독침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겁내고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되었지만, 몸은 머리보다 정직했다.
사내와 마주친 효령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파르르 흔들렸다.
훗.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사내가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비녀를 빌린 값으로 특별히 일러주는 게다. 야만족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걸…….”
그가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효령을 보며 말했다.
“어제, 젊은 심부름꾼 둘이 반죽음이 되어 들려 나갔다. 아까 상인들이 당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
“우린 고운 건 계집이건 사내건 그냥 놔두는 법이 없거든.”
그가 효령을 향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생색낼 생각은 전혀 없다만……. 내가 조금만 늦게 나갔다면, 놈들이 싸움에 정신이 팔린 대신 조금만 더 일찍 너를 발견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정도는 상상할 수 있겠지?”
“……!”
효령의 등 뒤로 쫙,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에 들어왔는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한기가 든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몸을 감싸 안았다.
“짐승들을 상대하면서 그 정도 자각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내가 탁자로 다가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래, 묻고 싶은 게 뭐지?”
“……!”
그 질문 덕분에 효령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몸이 떨렸지만, 애써 얻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겨우 숨을 고른 그녀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이런 말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비단이 필요하죠? 종이나 철은 그렇다 해도 청동기와 도자기는 왜요? 거울, 향로, 예기(禮器), 악기들로 대체 무얼 하려고요?”
도자기는 물론이고 청동으로 만드는 주요 제품들은 결코 야만족들이 욕심낼 법한 물건이 아니었다. 철제로 된 무기류가 아닌 것은 그들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사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예술이나 문화 따위는 쥐뿔도 모르는 야만족 주제에, 제대로 쓰지도 못할 물건들을 왜 그리 욕심내느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효령이 입을 다물었다.
“글쎄 왜일까?”
사내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조금 더 머리를 써 봐. 기탄의 태자께서 그걸 요구한다고 해서, 그 생각이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말똥이나 가득 들었을 머리에 무얼 기대하겠나?”
사내가 거침없이 자신의 주군을 씹어댔다. 만면에 조롱이 가득한 것이 주저함이나 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효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지금 이들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그 물건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야국의 값나가는 물건을 헐값에 강탈하여, 다른 나라에 비싼 값으로 팔아넘기려는 것이었다.
중계 무역. 손 하나 까딱 않고 순식간에 배를 불리려는 교활한 수작이었다. 이러다간 힘에서 밀리는 안야국은 앞으로 영영 이들의 상품 공급처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안야국의 상권과 부가 계속해서 이들에게 예속된다면, 기탄은 무력을 쓰지 않고도 안야국을 집어삼키는 꼴이었다.
허구한 날 싸움질이나 해대는 야만족의 머리에서 그런 기막힌 생각이 나올 수 있다니. 정말 기함할 노릇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걸 막을 방법은 없나요?”
효령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내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다들 그걸 나에게 묻지? 내가 그걸 일러 줄 만큼 좋은 놈으로 보이나? 아니면 그걸 해결할 만큼 대단한 놈으로 보이나? 난 너희들과 다름없는 일개 장사치에 불과해.”
“거짓말!”
효령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일개 장사치가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그렇게 간단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요? 저 무자비한 사람들이 감히 대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따른다고요? 당신 말마따나 짐승 같은 자들이잖아요?”
“…….”
“짐승들을 단숨에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
“그 우두머리뿐이에요. 당신은 상인으로 위장한 저 수상쩍은 무리의 대장이에요.”
사내의 입매가 한쪽으로 휘어졌다.
“제법이군. 꽤 그럴듯한 생각이었어. 하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냐. 난 저런 허접한 놈들을 수하로 둔 적도 없고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거든.”
“…….”
“저들이 내 말을 따르는 건 내가 저들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죽을 걸 알기 때문이지. 그게 짐승의 세계야. 하지만…….”
“…….”
“날 그렇게 대단하게 봐주니 기분은 썩 괜찮군. 그런 의미에서 하나만 더 일러주지. 이미 정해진 걸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을 조금 호전시킬 방법이 있긴 하다.”
“정말요?”
“누군가 한 사람이 죽는다면 기탄의 태자께서 안야국에 조금은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있지.”
“그게 누군데요?”
효령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를테면…… 나?”
사내가 효령을 향해 그림처럼 웃어 보였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효령이 그 의미를 물으려는 순간, 밖에서 교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그만 나오시지요.”
“잠깐만…….”
아직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흑야차……. 효령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는 분명 이곳, 한경에 있었다.
애초에 그토록 뛰어난 장수가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기탄이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지금. 그처럼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안야국의 핵심인 황궁과 주도를 직접 들여다볼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사신단으로 위장하여 이곳에 들어왔을 터. 효령은 가면을 벗은 그가 누구인지 꼭 알아야 했다.
이 사내가 과연 그를 알고 있을까. 아무리 가능성이 낮다 해도 효령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영리한 이 사내의 의심을 받지 않고 흑야차에 대해 알아낼 방법은 없을까.
그러나 재촉하는 교기의 목소리가 몹시도 다급했다.
“지금 안야국 상인들이 모두 떠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안야국 상인들의 틈에 섞여 나가지 않으면 더는 들키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가 없을 거란 뜻이었다. 효령이 머뭇거리는 사이.
휙. 사내가 자신의 옷을 들어 효령에게로 던졌다. 동물 가죽을 대어 만든 전형적인 기탄의 겉옷이었다.
“두르고 가라.”
“이, 이건 왜……?”
“내가 말한 걸 벌써 잊었군. 여긴 너희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야만족의 소굴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
“그 옷을 걸치면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그건 네가 내 것이라는 증거니까.”
화르륵. 불에라도 데인 듯 효령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자, 어서 나오십시오. 어서요.”
더는 어쩔 수 없어 효령이 몸을 돌렸다.
“고마워요. 오늘 일, 잊지 않을게요.”
겨우 그 말만을 남기고 효령은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