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3화 (3/116)

3화. 정체불명의 사내 1

* * *

“예? 정말이십니까? 그게 어디…….”

교염이 물으려는 순간, 밖을 지키고 섰던 교기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장공주님, 꼬리를 밟힌 것 같습니다. 당장 가셔야 합니다.”

효령과 교염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어디 피할 만한 곳이 있으세요?”

“제 걱정은 마십시오.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교기야, 어서 장공주님을 모셔라.”

“예, 아버지.”

교기가 효령을 재촉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장공주님.”

지금 효령은 진용원(眞容院)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황실 전용 기도처이자 비구니원인 그곳에는 황실 조상들과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 있었다.

효령은 한식(寒食)날을 앞두고 돌아가신 어머니께 제를 올린다는 구실로 출궁했다. 잘 아는 비구니의 도움으로 모두의 눈을 속이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태후가 장공주들의 출입을 엄히 단속하고 있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을 들켰다간 자신은 물론이고 화를 당할 자가 여럿이었다.

효령이 재빨리 교기를 따라 객실을 나섰다. 뒤를 이어 교염도 곧 창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이쪽으로…… 제길!”

효령을 숲과 연결된 뒷문으로 안내하던 교기가 검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 무리를 지어 달려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이쪽은 안 되겠습니다. 저쪽……!”

이미 뒷문이 막혔는데 다른 문이라고 말짱할 리 없었다. 그쪽에서도 검을 든 위협적인 무리가 효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선택은 단 하나. 부용각으로 향하는 담뿐이었다. 효령의 의도를 눈치챈 교기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효령은 익숙한 솜씨로 그 무릎을 딛고 올라 담을 넘었다.

탁. 효령이 담을 뛰어내리기 무섭게 교기가 그녀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이쪽으로…….”

효령은 교기를 따라 백화가 만발한 부용각의 정원을 내달렸다. 아름다운 잉어들이 가득한 연못 위의 석교를 막 통과했을 무렵. 그들의 뒤로 금세 검은 그림자들이 따라붙었다.

부용각의 정원은 한도 끝도 없이 넓었다. 어느새 숨이 턱까지 차오른 것이 이대로 가다간 나가는 길을 찾기도 전에 붙잡힐 것이 뻔했다.

“안 되겠어! 안으로 들어가자, 교기야.”

효령의 말에 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까 들었던 요란한 소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쟁그랑 챙.

와장창창창.

데구르르르.

부용각의 가장 큰 별실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술병이며 음식을 차린 그릇들은 물론이고 탁자와 의자, 각종 기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사이로 야만족임이 분명한 사내들이 안야국 상단의 상인, 무사들과 뒤엉켜 있었다.

“낄낄.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야, 이놈이 방금 뭐라고 한 거냐?”

“글쎄……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렸다는 거 같은데?”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요란한 소리에 비해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기탄의 상인들에 의해 안야국 상단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희끗한 안야국 상인들의 얼굴이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상단의 호위무사들은 주인인 상인을 끌어안고 모진 발길질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다른 기탄 상인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

야만족은 달리 야만족이 아니었다. 군사도 무사도 아닌 상인들이 이 지경이면 그 윗대가리들은 말해 무엇하랴.

효령의 눈이 파르르, 분노로 떨렸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는 것을 본 교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장공주님.’

효령은 자신이 이 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소란을 틈타, 추격하는 자들을 따돌리고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교기의 재촉에도 효령은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안야국 상인들, 그 곁에 널브러진 상단 무사들 위로 주검이 된 외숙 명국공과 그 가족들이 겹쳐 보였다.

저들이 이렇게 당하는 건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나라가 얕보였기 때문이었다.

기탄의 상인들은 그저 상인들이 아니었다. 사신들을 따라온 상인들은 공무역, 나라 간 무역을 위해 온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기탄의 황제, 대칸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안야국 상인들을, 아니 안야국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두시오. 당장 그만두란 말이오.”

나라와 백성들이 겪는 치욕을 견디다 못한 효령이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내내 억누르고 있던 슬픔과 분노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폭력이 만들어내는 굉음 속에 묻혀 버렸다. 피범벅이 되어 정신을 잃은 상대를 두고도 기탄 상인들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으하하하하.”

안야국의 불행을 비웃는 웃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사리문 효령의 뺨으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장 그만둬. 그만두란 말이야!”

견디다 못한 효령이 말리는 교기를 뿌리치고 야만인들 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탁.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놔, 놓으라……!”

버둥대던 효령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

그녀를 붙든 상대는 교기가 아니었다.

여느 사람보다 큰 교기를 훌쩍 뛰어넘는 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 찡그린 미간마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러나 그 눈빛은 맹수처럼 사납고 날카로웠다. 이제 막 침소에서 빠져나온 듯, 그의 머리는 길게 풀려 있었고 윗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건장한 몸은 온통 상처와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다쳤는지 왼쪽 팔에는 천이 감겨 있었다.

“잠깐, 빌리지.”

“……!”

효령의 손을 놓은 사내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상투관에서 비녀를 빼냈다.

탁, 타그르르르. 비녀를 잃은 상투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흑단처럼 검고 윤기 나는 효령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어졌다. 여인임을 들킬까 놀란 효령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사이.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기이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곧 믿을 수 없는 정적이 잡다한 소음을 삼켜버렸다.

효령이 소매에 둘려 있던 끈으로 머리를 수습하고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사방은 멈춰 있었다. 얼음처럼 얼어붙은 사람들의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

저만치 별실의 한가운데, 목 뒤에 쇠 비녀가 꽂힌 사내가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늙수그레한 안야국 상인의 이를 모두 빼놓은 것으로 모자라 그 한쪽 눈마저 터뜨린 사내였다. 마치 바윗돌이라도 된 듯 버티고 있던 그가 천천히 옆으로 고꾸라졌다.

쿵.

산만 한 덩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는 장면에 효령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쉽게 죽이다니. 그것도 제 비녀가 살인 무기로 쓰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그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워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여기 우리가 짐승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이렇게 요란하게 증명할 이유가 뭐야? 미친놈들. 다들 꺼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껏 그 누구도 통제 불가능했던 야만인들이 일시에 고개를 떨구었다. 쓰러진 시체를 둘러업은 그들이 순한 양처럼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

놀란 효령이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깐, 빌리지.」

아까 자신의 귀를 스친 것은 분명 안야국 말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기탄인이라 보기에는 그들과 생김새가 너무 달랐다.

기탄과 안야국의 언어가 가능하되 외모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 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뭘까.

효령의 눈에 짙은 의심의 그림자가 어렸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사내가 안야국 상단의 호위무사에게 고갯짓했다.

“어서 네 주인을 모셔라.”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상단의 호위무사들이 그제야 주인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안야국 상인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한숨 돌렸다 싶은 순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들은 괜한 짓을 했다. 대화는 말이 통하는 자들과 해야지. 이자들은 교섭이 뭔지, 협력이 뭔지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점잖게 충고 하나 하지. 여기서 짐승들을 상대로 먹히지도 않는 말을 떠들 바엔 차라리 돌아가서 앞으로 살 궁리나 해두는 게 좋을걸?”

“…….”

“오늘의 교섭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그대들의 태후와 기탄의 태자 사이에서 결정이 날 테니까. 앞으로 그대들은 기탄을 상대로 돈을 벌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그걸 어찌 아는 것이오?”

한 안야국 상인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가끔 짐승 중에도 유별난 놈이 있지 않나? 머리가 좋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놈. 내가 그런 경우라고 해두지.”

“미안하오만. 혹, 태후마마와 태자께서 다루실 물목들에 대해 알 수 있겠소? 우리도 대비는 해야 할 것이 아니요?”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난 그대들이 기탄의 돈줄이 될 것이기에 살려주는 것뿐이다. 설마, 내가 그대들을 도와주리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안야국 상단의 대표 격인 사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물건도 다 준비가 되어야 나오는 게 아니겠소?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 물건들을 댄단 말이오? 황실이 아무리 채근한다 해도, 없는 물건을 내줄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그도 그렇군. 좋다, 내 일러주지. 그대들도 짐작하겠지만 그 첫 번째 품목은 비단이다. 기탄의 태자께서는 대량의 비단을 헐값에 모조리 쓸어 가실 게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끄응. 안야국 상인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단은 안야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거래 물품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단을 헐값에 넘기라니. 예측은 했지만 역시나 너무도 큰 타격이었다.

“다른 것은요?

“다음으로는 철과 청동 제품들이 되겠지. 더해서 종이와 도자기…….”

사내의 입에서 안야국 상단의 주요 거래 물목이 쏟아져 나오자 다들 당황했다. 적어도 몇 가지는 남겨둬야 자신들도 살 것이 아닌가. 다른 상인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기탄이 우리에게 넘길 물목은 무엇입니까?”

“모피와 말.”

후우. 내내 긴장하고 있던 상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탄은, 야만인들의 잔인성 외에도 명마 생산지로 유명했다. 일찍이 그 말 한 마리를 구하고자 엄청난 돈과 수고를 들이는 황제와 장군들이 적지 않았다.

“방심은 이르지.”

사내가 얄궂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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