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2화 (2/116)

2화. 흑야차

* * *

뚜우 뚜우.

둥둥둥둥.

귀를 찢는 요란한 고취 소리와 함께 수백의 오색 깃발이 안야국의 주도 한경의 하늘을 뒤덮었다. 거리를 메운 요란한 행렬은 황실에 후궁을 청하러 오는 기탄의 사신단이었다. 대열의 한가운데,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가 포악하기로 악명 높은 기탄의 태자 발타고였다.

초원과 사막의 따가운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금색의 천을 엮어 땋은 여러 가닥의 머리카락과 누런 이. 얼핏 드러난 손등을 뒤덮고 있는 문신.

겉에 걸친 화려한 옷이 무색할 만큼 그 온몸에서 미개함이 물씬 풍겼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나라는커녕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기 바쁘던 도적 떼들이 지금은 뭐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구경꾼 중 하나가 불쾌하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를 시작으로 안야국 백성들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저런 짐승 같은 놈들에게 장공주님을 바쳐야 하다니. 어쩌다 안야국이 이 지경이 됐는지 원…….”

“어느 장공주님으로 정해질지 모르지만, 그 운명 한번 박복하시네. 금지옥엽 귀히 자란 분이 저런 야만인들 틈에서 어찌 견디실꼬.”

“장공주님이 거기 가서 죽든 말든 태후마마는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보나 마나 제일 밉보인 장공주님을 보낼 테지.”

“황후로 보내도 마땅찮을 마당에 야만족 늙은이의 첩 자리라니. 아무래도 이 나라에 망조가 든 모양일세.”

“망조야 선황 폐하께서 몸져누우시고 태후마마와 추씨들 세상이 되었을 때 이미 들지 않았나? 더는 이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백성들이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원군임에도 기탄의 사신단에게 호의를 보이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기탄군들은 반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함락한 지역에서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집과 거리가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진 것은 물론, 무고하게 죽은 안야국 백성들의 수가 자그마치 수천에 달했다. 태후의 폭정만으로도 지긋지긋한 백성들에게 기탄군들은 원수와 다름없었다.

“빌어먹을 흑야차. 저놈이 죄도 없는 우리 안야국 백성들을 절에 가두고 산 채로 불태웠다지? 저런 천벌 받아 뒈질 놈 같으니라고.”

“저기…… 근데 왜 다들 저놈을 흑야차라고 부르는 겐가?”

“것도 모르나? 저놈, 쌈질할 때는 얼굴에 시커먼 쇠 가면을 쓴다지 않나?”

“미친놈! 그깟 쇳덩이로 가린다고 밥맛없는 상판대기가 어디로 간다고. 굳이 가면은 왜 써?”

“흥. 제 놈도 제 얼굴이 더럽게 생겼다는 건 아는 모양이지. 자네들, 저놈 말안장 봤나? 누가 야차 아니랄까 봐 하는 짓 하고는…….”

과연. 발타고의 말안장 주변은 수십 개의 해골로 장식되어 있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거북스러운 소리에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망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발타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는 안야국 백성들의 적의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 비열한 미소 속에는 승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근데 이걸로 끝이 날까?”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흑야차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씨가 마른다는데……. 그런 흉악한 놈이 겨우 장공주님 하나로 만족하고 물러나겠느냐고. 안 그런가?”

“정말…….”

“그럼 어쩌지?”

백성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그들의 몇 발 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그마한 사내의 눈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남장 차림을 한 효령이었다.

‘저자가 흑야차라고?’

전장에서 투구 대신 구리쇠로 만든 검은 가면을 쓰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싸운다는 기탄의 장수.

겨우 백여 명의 군사만으로 성을 기습, 자그마치 8대의 화살을 맞고도 그대로 전진하여 반란군 수괴의 목을 베었다는 자.

그러나 그는 죄 없는 백성들까지 몰살함으로써 구원자가 아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군사들조차 흑야차라면 두려워 벌벌 떠는 지경이었다.

“…….”

효령이 날 선 눈으로 어느새 멀어져가고 있는 발타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어쩌다 오랜 역사와 눈부신 문화를 자랑하던 안야국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가슴이 찢어졌다.

그녀가 애써 울분을 다스리는 사이, 호위무사 교기가 다가왔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효령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 가자, 교기야.”

“이쪽입니다.”

교기가 몸을 움직여 사람들 틈으로 길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곧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한경 제일의 객잔 천위헌(天位軒)은 이름처럼 고고한 품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는 이곳은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각 객실은 저마다 다른 통로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워낙 묵는 값이 비싼 탓에 웬만한 고관이나 거부가 아니고서는 감히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가장 안쪽에 있는 객실에서 중년의 사내가 초조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온몸은 먼지투성이였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저 멀리 북쪽 삭주 지역에서 몇 날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탁. 문 열리는 소리에 사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공주님!”

“스승님!”

효령이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맞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효령에게 스승이라 불린 그는 교염, 교기의 아버지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를 잃고 큰 병을 앓았던 효령은, 외숙이 있는 명국공부(明國公府)로 비접을 나갔다. 교염은 그곳의 가신(家臣)이었다.

2년 전, 선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궁에 돌아오기까지 근 15년 동안, 효령은 그에게서 글과 무예를 배웠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서……. 늦어서 죄송해요, 스승님. 한데 무슨 일이에요? 명국공부에 계셔야 할 스승님께서 어찌 이곳까지…….”

“도와주십시오, 장공주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 교염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효령이 황망한 얼굴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 앉으세요, 스승님.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차분히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목소리를 낮춘 교염이 비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듣던 효령의 얼굴이 어느새 납빛으로 변했다.

“뭐라고요? 흑야차가 명국공부를 습격했다고요?”

세상에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었다.

효령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외숙 명국공과 그 가족들이 몰살당했다니.

효령은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고서야 간신히 휘청거리는 몸을 버틸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그녀는 아랫입술을 모질게 깨물었다.

“흑야차를 직접 보셨어요?”

“아뇨, 명국공의 명으로 서경에 다녀오느라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하지만 살아남은 수하들이 말했습니다. 검은 가면을 쓴 흑야차가 막내 공자님을 끌고 갔다고…….”

“그럼 한유가 살아 있다는 말인가요?”

묻는 효령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친누나처럼 따르던 외사촌 동생의 착한 얼굴이 당장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약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계신다면요. 그러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한유를 데려간 게 정말 흑야차라고 생각하세요? 삭주는 반란과 무관한 지역인데 그가 명국공부를 습격할 이유가 없잖아요? 혹 다른 사람이 가면을 쓰고 흑야차 흉내를 낸 건…….”

“저도 그걸 의심했습니다만, 분명 우리와는 다른 말을 사용했다 했습니다. 이 땅에 그 야만족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교염이 효령의 손을 붙들었다.

“이제 믿을 분은 장공주님뿐입니다. 장공주님, 부디 억울하게 돌아가신 명국공의 한을 갚고 한유 공자님을 구해 설씨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효령은 한유를 제외한 명국공부의 유일한 피붙이였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기탄 말도 할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기론 따를 자가 없던 그녀 외에 더는 기댈 곳이 없었다.

“만약 한유가 살아 있다면 제가 반드시 구할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든…….”

“쉽진 않을 겁니다. 포악한 기탄의 태자가 순순히 막내 공자님을…….”

“아뇨. 발타고는 흑야차가 아니에요.”

효령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교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공주님? 발타고가 흑야차가 아니라니요?”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분명해졌어요. 명국공부가 기습을 당한 날, 발타고는 다른 곳에 있었어요. 그가 행패를 부려 접대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건양 태수가 황실에 전갈을 보냈거든요.”

“그럼…….”

“오늘 보니 발타고 그자…… 오만하고 과시욕도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한데 가면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자가 정말 흑야차라면 우릴 겁주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가면을 가져왔을 거예요.”

효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그자는 그런 밋밋하고 볼품없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가 하는 일을 온 천하에 과시하고 싶어 하니까.”

효령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처음 기탄군에 관한 소문을 들은 건, 검은 가면을 쓴 장수가 반란군 수괴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였어요. 나중에야 태자인 발타고가 성을 접수하고 반란군들을 완전히 진압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죠.”

“장공주님 말씀은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소문이 합쳐졌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거야말로 낭패가 아닙니까? 발타고가 흑야차가 아니라면…….”

교염이 좀 더 자세히 물으려는 순간, 멀리서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효령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부용각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부용각은 천위헌에서 운영하는 기루의 이름이었다. 한 집 건너 기루요, 객잔이라는 안릉 거리에서도 단연 그 규모와 명성이 으뜸이었다. 효령이 있는 객실 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너른 정원의 끝이 부용각의 담과 맞닿아 있었다. 덕분에 바람결에 잘 익은 술 향기와 분 냄새가 이곳까지 실려 왔다.

“어젯밤, 사신단에 앞서 들어온 기탄의 상인들이 부용각을 점령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기녀는 물론이고 그들을 상대하는 안야국 상단들까지 곤욕을 치르는 모양입니다.”

안 봐도 뻔한 상황에 효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장공주님. 한유 공자님은 어찌 찾으실 겁니까? 장공주님 말씀처럼 발타고가 흑야차가 아니라면 진짜 흑야차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교염의 질문에 효령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뇨. 흑야차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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