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1화 (1/116)

1화. 뜻밖의 고백

* * *

탁.

태후가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 이제 너희들도 들어보아라.”

그녀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그러나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은 장공주(황제의 여자 형제) 중 누구도 잔에 손을 대지 못했다. 모두가 얼음처럼 굳은 채 꿀꺽,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태후가 내리는 술. 그것은 술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 술에 목숨을 잃은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지금 눈앞에 놓인 잔 속에 독이 들지 않았다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태후의 옆에 앉은,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그 증거였다.

형부 상서 맹유천.

태후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그가 나타나는 자리마다 멀쩡하던 사람이 죽어 나갔다. 선황제의 아들들과 그를 따르던 중신들, 태후의 비위를 거스른 후궁들과 궁인들……. 오늘의 야연이 장공주들에겐 생의 마지막 잔치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장경각에는 무거운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휘황한 등불만이,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앞에 어지러이 흔들렸다.

“……!”

길어지는 침묵에 태후의 미간이 서서히 비틀리기 시작했다. 미소를 머금었던 입매도 어느새 뻣뻣하게 굳었다. 불같이 달아오른 그녀의 노여움이 폭발하려는 순간.

“태후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녹였다. 정중히 잔을 든 효령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기로운 술이 그녀의 새하얗고 긴 목을 타고 넘어가기까지. 찰나는 영원처럼 길었다. 다른 장공주들이 목을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탁.

효령이 무사히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자, 모두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안도한 장공주들이 손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잔을 들었다.

죽음처럼 검었던 술이 꽃보다 더 향기로웠다. 이제야 겨우 잔치에 불려왔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내 오늘 너희들을 부른 것은 이것 때문이다. 들여라.”

태후의 명에, 커다란 나무함을 든 궁녀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섰다.

탁, 탁, 탁.

값비싼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함이 장공주들의 앞에 나란히 놓였다. 모두들 이게 뭘까, 의구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열어들 보아라.”

태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공주들이 나무함을 열었다.

“어머나!”

“세상에!”

장공주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무함에는 유리와 비취, 황금으로 만든 갖가지 화려한 장신구들은 물론이고 눈썹이 잘 그려지기로 유명한 화먹, 이를 닦는 데 쓰는 금 섞인 소금, 연지첩과 분첩 등 최고의 화장용품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맨 아래 놓인 의복이었다. 최고급 비단인 촉금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자수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뜻밖의 선물에 무겁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풀어졌다. 입이 귀에 걸린 한 장공주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마마. 지, 지금 이것을 저희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래. 마음에 드느냐?”

“예. 마음에 쏙 듭니다.”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한데 태후마마나 황후마마께서나 쓰시는 이 귀한 것들을 어찌 저희에게 내리시는 겁니까?”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태후의 입매가 비릿하게 휘어졌다.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이번에 우리 안야국이 위기를 넘긴 데는 기탄의 도움이 컸다는 걸. 거기 대칸(大汗, 황제)이 너희 중 하나를 후궁으로 달라는구나.”

촤악.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태후의 말은 이제껏 들은 그 어떤 말보다 끔찍했다.

황실에 맞선 대규모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태후가 끌어들인 이민족, 기탄(己呑). 용맹함과 잔인함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그들은 그러나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한 민족이었다.

법보다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땅. 약탈과 노략질이 일상인 자들이었다. 말이 좋아 후궁이지 아비뻘 되는 늙은 야만족 두목의 수도 없는 첩 중의 하나가 되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 이것들이 다…….”

묻는 장공주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래, 네 짐작이 맞다. 곧 기탄의 사신들이 궁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 앞에서 너희들을 선보일 때 입을 옷이다.”

장공주들의 표정이 시체처럼 굳었다. 자신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물건을 앞에 두고 희희낙락하다니.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치가 떨렸다. 조금 전까지 귀하게 보였던 나무함이 이제는 귀신이라도 되는 양 소름 끼쳤다.

그 아득한 와중에도 한 장공주가 뜻밖의 사실을 눈치챘다. 장공주들의 나무함 속에 든 것은 모두가 똑같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하, 한데 어째서 옷 색깔이 다른 것입니까? 이쪽은 전부 붉은 옷이 들었는데 저쪽은 모두 푸른색……. 혹, 이 색깔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훗, 눈썰미가 좋기도 하지.”

태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눈앞의 것들은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여인들의 핏줄이었다.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어미를 죽이는 것 못지않은 기쁨이었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들은 일찌감치 출가시킨 태후가 과년한 장공주들을 이제껏 붙들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너희 중 일부는 기탄에 보내질 후궁이 정해지는 대로 혼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누, 누구와 말입니까?”

“이번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장군들이다.”

이쪽도 날벼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기탄의 원군이 오기 전까지 패배만을 거듭하던 장군들을 두고 공을 논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들 대부분이 기혼자였다. 명색이 장공주가 되어 초혼도 아닌 자들과 혼례를 올려야 하다니.

게다가 그들 중 열에 아홉은 태후의 일가로, 능력 대신 연줄로 자리를 꿰찬 자들이었다. 인물과 나이는 둘째 치고 그 성정이 간사하고 난폭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태후의 말인즉슨, 전공의 선물을 구실로 장공주들을 묵은 물건 치우듯, 자신의 측근들에게 퍼주겠다는 소리였다.

“저, 저희 중 일부라 하시면 누구를…….”

“글쎄 그걸 정하기가 쉽지 않아 말이다. 나이 순서대로 보내자니 그건 너무 시시하고……. 해서 결정했다.”

태후의 입매가 야릇하게 움직였다.

“대칸의 후궁으로 뽑히는 장공주가 입은 것과 같은 색 옷을 입은 쪽이 혼례를 치르는 걸로……. 그리들 알아라.”

금지옥엽 장공주들의 운명을 겨우 제비뽑기 같은 날림으로 정하겠다니…….

경악한 장공주들이 말을 잃은 사이, 태후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너희들끼리 맞춰 보아라. 어느 색 옷을 입은 쪽이 기탄의 후궁이 되고, 혼례를 치르게 될지 말이다.”

“…….”

“아, 이거 하나는 말해 둬야겠구나. 이번 일을 피하고자 몸단장을 소홀히 하거나 일부러 병에 걸린다거나, 혹여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태후의 눈빛이 잔혹하게 번득였다.

“그때는 안 귀비 짝이 날 줄 알아라.”

“……!”

“……!”

태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장공주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안 귀비. 선황제가 총애하던, 안야국에서 가장 아름답다 칭송받던 여인. 그녀는 남자 죄수들이 가득한 옥사에 던져져 능욕을 당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 처참한 최후를 떠올린 장공주들이 공포로 몸을 떨었다.

장경각은 어느새 한밤중의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태후가 허옇게 질린 장공주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런……. 다들 겁을 먹은 모양일세, 형부 상서. 옷 색깔을 둘로 나누다니. 자네가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네. 이거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질 않은가? 하하하하하.”

태후가 형부 상서와 함께 사라진 후에도, 그녀의 악랄한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장경각을 떠돌았다.

꾹 다문 입술, 터질 듯 무거운 공기에 모두가 질식할 것 같던 순간. 겁에 질린 한 장공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설마, 나, 난 아닐 거야. 우리 어머니가 태후마마와 얼마나 가까운데.”

그녀와 같이 푸른 옷을 받은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린 아닐 거야. 봐, 얼굴이 예쁜 아이들만 붉은 옷을 받았잖아.”

“정말!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럼 우리가 그 재수 없는 꼴을 당한단 말이야? 지금 어디다 대고 악담이야?”

빨간 옷을 받은 장공주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요, 언니?”

“방심하지 마. 친오라버니가 반역죄로 죽은 사람 중에도 푸른 옷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까. 재수 없는 게 너인지 나인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알겠니?”

“얘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니? 왜 그렇게 파르르 떨고 난리야? 기탄은 꼭 너같이 성질 더러운 애가 가야 하는데. 안 그러니, 얘들아?”

“뭐야, 너 말 다 했어?”

“솔직히 말해서 너도 너만 아니면 괜찮은 거 아냐? 여기 그런 마음 아닌 사람 있어?”

평소 단정하고 곱던 장공주들 사이에 악다구니와 저주가 오갔다. 고함 소리가 진동하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서러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두려움과 절망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

그 소란의 한가운데. 홀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효령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옷이 든 자신의 나무함을 힐끗 바라본 그녀가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 가지 꽃을 숙성시켜 만든 백화주. 술을 채운 잔에서 지독하리만치 그윽한 향기가 올라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술은 올연히 무르익었다. 그 꿋꿋함에 돌연 목이 메었다. 효령은 조용히 잔을 들었다.

이 나라의 앞날과 내 운명에 애도를…….

술과 함께 슬픔을 삼킨 효령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여기 더 있어 봐야 감정에 휩쓸려 탄식만 나올 뿐.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의자 밖으로 발을 빼려던 효령이 일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무함에 담긴 붉은 옷 아래, 비죽 삐져나와 있는 작은 종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

너무도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혹여 누가 볼세라 그녀는 얼른 종이를 옷 속에 밀어 넣었다.

쿵쿵.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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