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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23)화 (123/123)

123화

“하여간, 내 남편은 너무 야해요.”

“어, 방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요. 모르는 척하는 건 내가 해 줄 테니까.”

“저기, 부인, 지금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온은 황당해하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류하는 요망한 눈웃음을 흩뿌리며 먼저 살랑살랑 부엌으로 향할 뿐이었다. 온도 결국 소통을 단념했다.

류하가 수업 중에 어질러진 방을 깔끔히 정돈할 동안 온은 주방에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류하가 주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수고했어요, 낭군.”

류하는 온의 뒤에 살그머니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온은 고개를 돌려 잽싸게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 이후, 싱그럽게 웃으며 청했다.

“상 차리는 것 좀 해 줄래요? 음식은 내가 챙겨서 갈 테니까.”

“알겠어요.”

사이좋은 분업 끝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부부는 오붓하게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러기를 얼마, 문득 류하가 화제를 바꾸었다.

“낭군, 그대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내의 진지한 질문에 온이 멈칫했다. 그가 류하를 쳐다보았다.

“왜요, 회임하셨습니까?”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온이 대답하는 대신 반문하자 류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부연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어제도, 오늘도, 또 그전에 지나간 수많은 날에도, 류하는 자기와 온이 가르치는 동네 꼬마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우리에게도 저런 아이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와 그대를 골고루 빼닮은, 그런 아이라면.

“……그대는요? 그대는 아이를 갖고 싶나요?”

이번에도 온은 되묻기만 했다. 아까 입에 넣으려고 숟가락에 얹은 음식은 공중에 내리 멈춰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류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곧,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없으면 그냥 없는 거지만, 만약 생기면…….”

입 밖에 꺼내고서야 드디어 깨달았다. 제가 얼마나 간절하게, 지순하게, 자신과 온을 닮은 아이를 원하고 있는지.

피와 살을 섞어 기다림 끝에 만나 자신의 품에 쏙 안기는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와 눈을 맞추면 어떤 느낌일까, 예전부터 궁금했다.

“생기면?”

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여전히 음식은 허공에 들려 있었다.

“생기면, 사랑과 정성으로 열심히 키워야죠.”

류하는 짐짓 발랄하게 말한 뒤, 자신의 주둥이가 또 필요 이상으로 나불대기 전에 서둘러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부인.”

온이 부드럽게 불렀다. 류하는 온을 무시했다. 아내가 계속 꾸역꾸역 밥만 삼키자 온은 자그맣게 한숨지었다. 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부인,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봤어요? 혹시 아이를 갖고 싶은데 안 생겨서 속상한 건가요?”

역시, 예리했다. 이제는 류하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온의 시선을 피하며 어물쩍 웅얼댔다.

“뭐, 그, 딱히 속상한 건 아니고요.”

생각해 보니 되게 속상했다. 여태 일부러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막상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려니까 어쩐지 갑갑했다.

“표정만 보면 속상한 거 맞는데.”

온은 집요하게 받아쳤다. 이번에는 류하가 한숨지었다.

“만약 정말 속상해도 어쩌겠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노력을 안 해 본 게 아니잖아요.”

지난 5년간 부부로 지내며 단 한 번도 피임한 적 없었다. 처음에 온이 피임을 원하느냐고 묻자, 류하는 고민 끝에 거절했었다.

“이 정도 지내봤는데 애가 안 생기는 거면, 그러면…….”

그러면, 속상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내심 자신과 남편의 아이를 기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년째 몸에서 신호가 없자 무의식중에 단념했다. 가질 수 없는 걸 꿈꿔 봤자, 아프니까.

“원래 애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대도 알잖아요.”

온은 침착하게 타일렀다. 그는 자신의 이복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후계자가 필요해서 후궁을 여섯이나 들이고도, 일곱 번째가 오기 전까지 단 두 명의 자식을 봤던 내 형님.

만약 단순히 여인과 사내가 몸을 섞으면 뿅, 하고 나타나는 게 아이였다면 형님도 자녀가 한 일곱 명쯤은 있어야지. 그분이 초반에 후궁들이랑 얼마나 열심히 합방했는데.

“나도 그 정도는 압니다. 하지만 무려 5년째잖아요?”

류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가, 자신이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곧장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괜찮아요, 온. 아이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고. 그렇죠? 우리 둘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데요, 뭐.”

류하는 애써 온화하게 말하며 숟가락으로 밥을 푹, 찔렀다. 온은 다소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해요.”

일단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온은 선선히 수긍했다. 둘만으로도 행복했다. 더 필요한 건 없었다. 다만, 한 명이 더해진다면 더해진 만큼 더 기쁠 것 같았다.

이후 두 사람은 아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한동안 조용하다가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식사를 끝내고 정리까지 마친 뒤, 부부는 마루에 누워 빈둥거렸다. 활짝 열어 둔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봄바람이 상쾌했다.

“온,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남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놀던 류하가 문득 미소를 그리며 달콤하게 고백했다. 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도 늘 행복합니다, 류하 님.”

아내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듯 자기도 아내를 본명으로 부르며 온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겹쳤고, 몸이 닿았다. 곧 쌕쌕대는 호흡이 흘렀다.

“온, 거실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류하는 무의미하게 항의하며 온은 꼭 안았다. 온은 아내의 입술을 내리 핥고 빨며 그녀의 옷 밑을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맨살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류하는 뜨겁게 신음하며 허리를 틀었다. 각자 옷차림이 서로에 의해 점점 흐트러졌다.

단단한 상체가 드러난 온은 류하를 번쩍 안아 들고 계속 입 맞추며 이동했다.

류하는 온에게 거뜬히 매달렸고, 그가 자신을 이불 위에 내려놓자 스스로 치마끈을 풀었다.

“부인, 그대는 정말.”

온이 부푼 입술을 달싹였다. 그사이 그의 손은 이미 반쯤 흘러내린 류하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매끈한 속살이 드러났다.

“이렇게나 아름다워서, 안지 않는 게 힘들어요.”

온은 달차근한 말을 속삭인 뒤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류하는 온의 입술을 쪽쪽 빨며 하의를 잡아끌었다. 금세 둘 다 알몸이었다.

저녁부터 시작된 뜨거운 밤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각자 완벽하게 탈진하고 나서 속옷을 대충 챙겨 입은 채 나란히 누워 자던 밤, 류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집 안에 황금빛이 가득했다. 맑고 밝고 아름다워,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그런 빛이었다.

황금빛의 근원은 털가죽이 탐스러운 어린 여우였다.

온몸으로 귀여움을 뽐내는 앙증맞은 짐승을 보고 류하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여우가 그녀의 품에 쏙 뛰어들었다.

직후, 그녀는 꿈에서 깼다.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남쪽에는 여름이 빨리 왔다. 북쪽에서 나고 자란 온은 아직도 이 후덥지근한 기후가 거북했지만, 점점 적응하는 중이었다.

“온, 그대는 부모님이 많이 그리운가요?”

함께 마루에서 휴식하던 류하가 문득 물었다. 온은 최근에 류하가 민감한 질문을 자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부부로 지내며 누구보다 친밀해진 그들이기에,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네.”

그런 대답을 듣고 나니 류하는 할 말이 없었다. 온은 류하 대신 허공을 골똘히 바라보며 침착하게 덧붙였다.

“사실 별로 그립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립더라고요.”

온은 부친에 대한 말랑말랑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기억 속의 선황은 늘 엄격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어린 온은 어떻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고 그렇게 많은 다른 여자들과 꼬박꼬박 동침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각조차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게 꽤 큰 상처였나 보다.

“아버지는 심정적으로 친근했던 적이 별로 없었고……. 어머니는, 그리움보다는 죄책감이 큽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알려 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황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온은 황태후에게 분명 약속했다. 자기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고.

그분이 제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형이 동생의 죽음을 공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시체가 발견된 적은 없으니, 황태후가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너무 괴로워하시지 않기를, 그 아들은 잠잠히 빌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나중에, 많이 나중에라도. 혹시 모르잖아요.”

류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결같은 결론에 따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가 다시는 북쪽에 돌아가지 않는 게 모두에게 최선입니다.”

괜히 형님의 영토를 망령처럼 싸돌아다니다가 누군가에게 목격되어 파장을 일으키는 건 사양이었다. 전해지는 소문에 따르면, 휘국은 이제야 전쟁 후에 안정을 되찾은 것 같은데.

“그대는요? 그대는 그대의 모친이 많이 그립나요?”

온이 나직하게 물었다. 류하의 아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월국의 왕은 아직 뻔뻔하게 살아 있었고, 어차피 그가 류하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 본인이 이미 털어놓은 뒤였다.

“네, 그리워요.”

류하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에 일순 애달픔이 담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녀는 온을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어요. 어머니께 최대한 부끄럽지 않게 떳떳한 딸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거든요. 어머니도 저승에서 아마 마음 편히 계실 거예요.”

제 아내다운 당당한 발언에 온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질문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요? 왜 이런 걸 물어보나 해서.”

우리 부모님 얘기는 갑자기 왜? 애틋할지언정 별로 유쾌한 소재는 아니라는 걸 그대도 뻔히 알면서.

“그냥,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나요. 우리 어머니들은 어떤 생각이셨을까. 부모란 건 대체 뭘까, 이런 생각이요.”

류하는 산뜻하게 설명했다. 이윽고 아직 어리둥절한 온을 보며, 떨리는 마음으로 실토했다.

“온, 나 회임했어요.”

침묵. 온이 너무 오랫동안 얼어 있자 류하는 다소 소심하게 덧붙였다.

“어, 음. 알아낸 지는 별로 안 됐어요. 그게, 한 하루쯤?”

온은 여전히 조용했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류하는 슬슬 공황 상태에 빠지는 느낌으로 생각나는 대로 나불거렸다.

“왜 어제 알아내자마자 말하지 않았느냐면,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애는 없으면 그만이라고 말해 놓고선 갑자기 이런 소식을 전하면, 어, 그대가 딱 지금처럼 너무 충격받을까 봐…….”

온이 그녀를 껴안았다. 와락 당기지는 않고, 부드럽게, 견고하게. 류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기뻐요.”

온은 탁하게 속삭였다. 단 세 음절에 농축된 순전한 환희가 그의 품에 안긴 류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정말, 정말 기뻐요, 부인.”

온의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입술도, 손도, 거칠게 뛰는 심장도.

그러나 그가 류하를 살짝 밀어 눈을 맞출 때, 그의 먹색 눈동자만은 굳건했다.

“정말 고마워요.”

절절한 고백에 이어 온이 먼저 입술을 포갰고, 류하는 밀어내기는커녕 더욱 가까이 당겼다.

엄마와 아빠를 골고루 빼닮은 사랑스러운 여아가 태어난 건 그로부터 몇 달 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이야기의 새로운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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