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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21)화 (121/123)

121화

장자이지만 서자로 태어나 평생 살얼음판을 걷다가 피바람을 통해 황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제야 그 결실을 제대로 맺고 평온을 얻은 것 같아서, 륜은 오랜 경주를 끝낸 듯 만족했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봄이지 않습니까.”

륜은 아내를 보며 달콤하게 말했고, 화은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최근에 륜은 저런 감상적인 말을 입에 담는 횟수가 늘었다. 그때마다 화은은 익숙지 않아 철렁철렁 놀랐다.

“봄이 온 지는 한참 됐는데요.”

화은은 싱거운 답변을 내놓았다. 그 무미건조한 지적에 륜은 실망하는 대신 한 번 크게 햇살처럼 웃었다.

“맞아요, 한참 됐지요.”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은을 바라보았다. 화은은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어색해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황궁과 근접한 들판에는 유리처럼 맑은 호수가 있었고, 오늘은 그 호수에 조각배의 움직임에 따라 은실 같은 잔물결이 일었다.

과거에 월류하가 날뛰는 말에 올라탔다가 호위였던 대장군과 함께 빠진 곳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요즘 어디 불편한 데는 없지요? 몸이라든가, 마음에.”

사내는 계속해서 달콤하게 물었다. 여인은 대답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했다.

“없습니다. 요즘은 내리 편안합니다, 폐하.”

요즘은 내리 편안하다는 건, 예전에는 편안하지 않았다는 뜻.

처음에 힘없는 황자의 비가 되었을 때, 이후 그 힘없는 황자가 황제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황제가 아들이 필요하여 후궁을 일곱 명씩이나 들이고 그들과 차례로 동침하던 나날에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황자가 태어난 뒤로 륜은 후궁전에 아예 발길을 끊었다. 여섯 명의 후궁과 그들의 친정 식구는 여전히 최상의 생활 수준을 보장받았고, 다들 그걸로 만족했다.

“다행이에요.”

륜은 다정하게 말했다. 화은은 달리 반응하지 않았고, 륜도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황궁의 뱃사공이 말없이 노를 저을 동안, 아내를 바라보며 말랑말랑한 침묵을 유지했다.

정녕 봄날이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였다.

내전을 마무리한 뒤에도 뒷수습을 완전히 마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륜은 최근에야 해방된 느낌이었다.

서(西)휘국의 황제와 국경 문제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기 얼마, 동쪽에 숨어 살던 이종족 구성원들이 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영토 분쟁에 이어 인구 조정도 폭발했다. 여러 복잡한 일을 해치우고 나서야 륜은 전쟁과 분단으로부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국내가 시끄러워졌다.

그전까지는 전쟁을 빌미로 내부의 혼란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는데, 외부의 적이 소멸하자 그간 꾹꾹 숨겨 왔던 분란이 고개를 쳐들었다.

패륜 황제가 제 아비로도 모자라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소문부터,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고 제국이 반으로 갈라진 것도 다 황제가 무능해서 그렇다는 둥,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날뛰었다.

<뭐, 첫 번째 소문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긴 하죠.>

어느 날, 륜은 화은을 앞에 두고 담담히 읊조렸었다.

유배지로 가던 중에 실종된 내 동생, 휘온. 륜은 여전히 가끔 그 아이를 생각했다.

<실제로 죽이려고 했으니까.>

온이 황성을 벗어나자마자 죽을 수 있도록 자객을 보냈었다.

황성 안에서 그를 죽이는 건 무리라는 걸 알았다. 목격자를 피할 수 없을 테고, 목격자가 있어서는 아니 됐으니.

처음에 보낸 여섯 명의 자객이 돌아오기는커녕 감감무소식이고 두 번을 더 보냈을 때도 결과가 똑같자, 륜은 끝내 포기했다.

이 정도 발악했는데 아우님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건 정말 그대의 목숨을 보호하는 하늘의 뜻이요, 마지막 남은 천륜을 저버리지 말라고 꾸짖는 신의 뜻일 테니까.

죽은 자객들에게만 미안하게 됐다. 그러나 냉혹한 황제 휘륜은 그들의 죽음마저 금세 과거에 묻었다.

“폐하는요?”

“네?”

“요즘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몸이라든가, 마음에.”

화은은 남편을 보며 단정하게 물었다. 륜은 아내의 차분한 시선을 맞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곧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네, 나도 괜찮습니다. 불편한 곳은 없어요.”

“다행입니다.”

화은은 군더더기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가 륜을 퍽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불편하시다는 건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뜻이니, 절대 바랄 만한 일이 아니지요.”

륜은 잠시 아내의 말을 곱씹었다. 숙고를 마친 그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나한테 덕담해 준 거지요?”

굉장히 기쁜 낯빛이었다. 그래서 화은은 답지 않게 조금 수줍어하며 뻣뻣하게 중얼댔다.

“네, 폐하. 아마도요.”

남편에게도 대부분 얼음 같던 여인치고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륜은 이로써 일단 만족했다.

“잘 받아 두겠습니다.”

그는 내리 웃었다. 그래서 화은도 조금, 아주 조금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 받아 두세요.”

부부의 뱃놀이는 그렇게 일상을 장식했다.

6년 전, 황제(皇弟) 휘온이 사라졌다. 5년 전, 황후가 아들을 낳았다.

황제는 약속대로 황자가 태어나자마자 황태자에 책봉했고, 오랜 후사 문제가 해결됐으며, 이제 황실에는 안정과 평화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의외로 황제와 황후 부부지간에는 오랫동안 찬바람이 불었다.

이유인즉슨, 일단 황제가 전쟁을 처리하느라 너무 바빴고. 또한, 황후가 둘째를 낳은 후에 오랫동안 우울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말을 의원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본인이 한 번도 출산해 본 적 없는 륜은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조금 덜 바빠지고 황후가 조금 덜 우울해질 때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봄이 된 어느 날, 둘은 조심스럽게 화해하는 중이었다.

“오늘 태자가 책을 한 권 더 뗐다면서요?”

“네, 저도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참 똑똑한 아이죠. 저랑 폐하를 닮아서.”

뱃놀이를 충분히 즐긴 뒤, 부부는 뭍으로 올라와 들판을 산책했다. 높다란 풀 사이사이로 다채로운 봄꽃이 나부꼈다.

“그러게요. 나랑 그대와 달리 똑똑하면 똑똑하다고 자유롭게 뽐낼 수 있는 환경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아들을 떠올리며 륜은 다정하게 말했다. 화은은 묵묵히 동의했다.

서자여서 숨죽여야 했던 사내와, 계집이라서 힘없는 황자의 비로 팔려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미래를 보장받지 못했던 여인은 자신들과 다른 자식들의 운명이 퍽 기꺼웠다.

화은은 자신과 남편의 암울했던 과거를 곱씹느라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 살짝 염려스럽게 덧붙였다.

“선이가 동생을 질투하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글쎄요? 질투하는 것치고는 동생을 끔찍이 챙기는 것 같은데.”

“사람의 마음이 질투나 애정, 그중 하나만으로 온전히 규정되는 게 아니니까요. 일종의 애증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죠.”

화은은 심각하게 중얼댔다. 륜은 아내의 얼굴을 흘긋하더니, 부드럽게 달랬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입니다. 조금만 더 지켜보도록 해요.”

뒤섞인 애증에서 애정만을 골라내고 증오를 뭉툭하게 깎아 흘려보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더라. 경험자로서 륜은 알았다. 나와 그대의 경우에 그러했으니.

물론, 시간이 지나고 노력을 기울여도 끝내 실패할 때도 있지만. 나와 온처럼.

“그래도 절대 태자를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요. 실제로 편애한 적도 없고요. 혹시 선이는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요?”

화은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녀는 둘째를 향한 자신의 모정이 혹여 첫째에게 상처를 입혔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는 이미 편애 없이 애들을 공평하게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선이가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건 별수 없는 상황이 만든 느낌일 텐데, 우리가 뭘 어쩌겠습니까?”

신료들과 궁인들이 황녀보다는 황태자를 싸고돌아서 휘선이 소외감을 느낀다면, 그건 아무리 황제더라도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만 따지면, 태자가 훨씬 중요한 게 사실인걸요.”

현실을 인정하는 륜의 안색은 씁쓸했다. 화은은 륜을 빤히 보다가, 그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그는 눈매를 휘며 즉각 맞잡았다.

“내가 그렇게 울적해 보였습니까? 그대가 위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륜이 속닥였다. 멀찍이서 황제와 황후를 따르던 궁인들은 각자 눈과 귀를 닫고 모른 척했다. 화은과 륜도 그들을 무시했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덜 울적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화은이 아뢰었다. 륜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기댔다.

“요즘은 울적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륜은 눈을 사르르 감으며 숨소리처럼 얄팍하게 속삭였다. 화은은 뺨을 스치는 지아비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요즘은 나 정말, 정말 행복해요, 화은.”

나의 오늘을 위해 희생된 숱한 사람들에게 죄스러울 만큼,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으로 평안해.

“다행입니다, 폐하.”

화은이 응답했다. 직후, 고개를 기울여 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대낮에 들판에서 보이기엔 너무 농밀한 애정 행각이라 륜은 놀라서 눈을 끔뻑끔뻑 뜨며 쳐다보았다.

은근슬쩍 지켜보던 궁인들도 놀라서 바쁘게 훔쳐보았다. 그러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선배 궁인 하나가 곁에 있는 후배들의 발을 콱 밟자 다들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어, 음. 오늘따라 적극적이네요, 황후.”

륜이 떨떠름하게 지적했다. 화은은 슬며시 웃었다. 보기 드문 미소라 륜은 심장이 떨렸다.

“다 폐하 덕분이지요.”

화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륜의 손을 보드랍게 싸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정확히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덕분에 그대가 이러고 있다면 과거의 나를 몹시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륜이 소곤거렸다. 화은은 다시 웃었다.

“마음껏 칭찬하세요, 폐하.”

그리고 앞으로도 칭찬할 일은 더 많이 있을 거다.

봄이 다 저물고 여름이 온 뒤에도, 애틋한 가을과 얼어붙은 겨울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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