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外2. 황실의 일상
궁녀는 지시받은 대로 향긋한 차를 내왔다. 후궁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담담히 말했다.
“고맙다.”
“네, 성빈마마.”
궁녀, 제하는 고개를 조아렸다. 후궁, 수연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태도로 음료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제 가 봐도 좋아.”
“네, 마마.”
수연이 손짓하자 제하는 물러났다. 고개를 수그린 채 총총히 뒷걸음질하는 월국 출신 궁녀는 그래도 예전보다 덜 우울해 보였다.
약 6년 전, 본래 모시던 주인이 간통죄를 뒤집어쓰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때는 늘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더니.
불행 중 다행으로 황제는 월빈의 아랫사람들까지 헤집어 놓지는 않았다.
휘국에서 나고 자란 자들은 사저로 돌려보내졌고, 월빈의 고향에서 함께 올라와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궐내 곳곳에 재배치되었다.
월류하 공주가 시동생과의 간통뿐 아니라 도깨비의 힘을 은폐한 죄로 폐서인되어 쫓겨났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 정도면 파격적으로 자비로운 대우였다.
상전을 잃은 궁녀 중에 제하라는 아이는 수연이 직접 데려왔다. 류하가 이 아이를 유독 아꼈던 기억이 났다.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한때 나름 친구처럼 지냈던 자였으니, 귀애하던 궁인을 거두어 잘 보살펴 주는 것쯤은 보답으로 해 두고 싶었다.
‘살아는 있으려나.’
차를 마시며 수연은 궁금해했다. 부디 살아 있었으면 했다.
자신이 목숨까지 걸고 빼돌리는 데 일조했던 사람이 허무하게 요절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면 많이 서럽고 답답할 것 같았다.
6년 전 그날, 폐위된 월빈이 전쟁터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용케도 알아낸 수연은 훤아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문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연락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월빈의 탈출을 바라는 마음으로 군졸을 매수하여 청자초의 해독제를 제공한 게 그녀였다.
내가 그만큼 애썼으니, 부디 그대는 무사하기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으니, 희망을 품어 보기로 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봄날이었다.
1황녀 휘선은 올해 열두 살이었다. 퍽 까다로운 나이였다.
황녀를 모시는 궁인들은 안 그래도 성질 더러운 우리 황녀 전하가 사춘기까지 겹치면 얼마나 더 끔찍해지실까, 진즉에 셈하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랫사람들의 근심이 무색하도록 오늘 선은 기분이 말랑말랑했다. 이유인즉슨,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저 자그마한 동생 덕분이었다.
“안녕하세요, 1황녀 전하.”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송구합니다, 1황녀 전하.”
선은 새침하게 혀를 찼지만 여덟 살 휘연은 해맑게 거부했다. 선은 다시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이 똑같이 거절했다면 선은 곧장 싸늘한 가시처럼 변했겠지만, 상대가 앙증맞은 이복동생이었기에 선은 삐치기도 전에 마음을 풀었다.
“어쨌든, 이리 와서 앉아 봐. 오늘 바쁜 건 다 끝났지?”
선은 푹신한 침대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연은 쪼르르 다가가 앉으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했다.
“전하, 저는 평소에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제 어미를 닮아 순하게 생겨서는 말 한마디 지지 않는 게 제 아빠의 판박이였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골고루 빼닮은 선은 맑게 웃었다.
“맞아, 사실 나도 별로 안 바빠.”
이 나라 이 황실에서 딸들은 바쁠 일이 없었다. 계집에겐 권좌가 허락되지 않으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시집가서 출궁할 애들이기에, 관심이 다소 시들한 만큼 규율도 느슨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놀자. 자, 여기 보렴. 내가 궁녀들한테 부탁해서 새로운 배역을 만들었어.”
“우와, 역시 전하의 아이들은 솜씨가 좋군요.”
“좋아야지, 누구 명령인데.”
황녀궁의 궁녀들이 서슬 퍼런 주인을 위해 만든 헝겊 인형은 두 소녀의 인형극에 쓰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선은 본인이 직접 무대의 배경을 칠했다. 연은 그저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황녀 전하, 궁인들을 너무 부려 먹으시면 안 됩니다.”
“안 부려 먹어. 자, 어서 놀자.”
옆에서 자매를 지켜보던 궁인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신이 우리를 안 부려 먹는다고요? 너무 웃겨서 자다가도 벌떡 깨게 할 망언이었다.
물론, 개중에 감히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어리석고도 용감한 궁녀는 여기 없었다.
선은 까마득히 고귀한 황녀님이었고, 어린 나이에도 잘못을 꾸짖고 벌을 내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물론, 선은 처벌만큼이나 칭찬과 보상에도 너그러운 주인이었다. 또한, 분명 까칠하게 굴지언정 아예 없는 잘못을 지어내 사람을 괴롭히진 않았다.
철들면 조금 부드러워지시겠지, 하고 궁인들은 속으로 빌며 벌써 슬슬 조짐을 보이는 황녀님의 사춘기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오늘은 괴물한테서 임금님을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하고 놀자꾸나.”
“왜 임금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괴물한테 붙잡혀 있어요?”
“몰라, 무능한 임금님인가 보지.”
연이 순박한 눈으로 질문하자 선은 태연하게 답했다. 이후, 두 소녀는 인형을 조몰락대며 한참을 즐거워했다.
“이제 다른 거 할까?”
“다른 거 뭐요, 전하?”
“밖으로 나가자. 네게 보여 줄 게 있어.”
“우와, 뭔데요?”
“비밀이야. 가서 알려 줄게.”
선은 들뜬 눈으로 외출을 준비했고, 연도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 두 소녀는 궁녀와 호위를 주렁주렁 거느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공중에 봄바람이 감겼다.
“연아, 여기 와 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입니다.”
호젓한 후원이었다. 탐구심과 모험심이 강한 선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구석진 곳.
그리고 선과 연은 몰랐지만, 그들의 아빠와 긴밀하게 연관된 장소였다. 그들의 아빠와 삼촌.
“어머, 세상에, 어떡해.”
“귀엽지?”
연이 통통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종알종알 감탄하자 선이 뿌듯하게 속삭였다.
자매는 황궁에 숨어들어 수풀 틈에 자리 잡은 길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금빛 털이 탐스러운 짐승이었다.
“귀여워요. 너무 예뻐요, 전하.”
“쉬이, 목소리를 좀 낮추렴. 너무 크게 떠들었다간 저 녀석이 놀랄지도 몰라.”
“네, 전하.”
연은 작은 입을 헙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선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녀의 첫째 동생이 저 자그마한 고양이만큼이나 귀여웠다.
“너는 참 착해, 연아.”
“전하도 무척 착하십니다.”
“……그 말에는 딱히 동의할 수가 없구나. 아마 너만 그렇게 생각할 거다.”
“에이, 설마요. 아닐 거예요.”
“그래, 원하는 대로 생각하렴.”
선은 연에게 현실을 깨우치는 일을 포기하며 다시 고양이에게 집중했다.
분홍빛 혀로 앞발을 날름날름 핥는 고양이의 모습은 가히 사랑스러웠다. 선은 곧 말없이 빠져들었다.
“전하, 나중에 태자 아기씨도 데려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기씨도 고양이를 보면 좋아하시지 않겠어요?”
“싫어, 걘 안 데려올 거야. 여긴 너와 나만의 장소야. 절대, 절대 안 돼.”
“치이,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나 몰래 걔랑 여기 올 생각은 하지도 마. 알겠지? 알겠어?”
“어휴, 전하, 알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안심하셔요.”
연은 여린 입술을 삐죽였고, 선은 그제야 안도하며 다시 고양이를 돌아보았다. 선이 폭 한숨지었다.
“다들 그 애를 떠받들지 못해 안달인데, 너마저 그 애를 그리 챙겨야겠니?”
“제가 언제 챙겼다고 그래요.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저는 태자 아기씨 근처에 잘 가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야, 너는 내 동생이니까. 너는 계속 나랑 놀아야지, 안 그래?”
“아기씨도 전하의 동생이십니다.”
“흥, 그런 애는 필요 없어.”
선은 유치하게 콧방귀를 꼈다.
유년기와 소년기의 중간쯤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선은 소유욕으로 똘똘 뭉친 아이였고, 때때로, 사실 호흡하는 순간마다, 남동생을 질투했다.
“하지만 아기씨도 귀여운데…….”
“어허, 저 고양이가 훨씬 귀여워.”
“아기씨랑 고양이는 종이 다른데, 애초에 비교하기 좀 어렵지 않습니까?”
“연아, 말대꾸하지 마.”
“칫,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누구보다 태자 아기씨를 아끼시잖아요. 지난달 그때 얘기만 들어 봐도…….”
“참나, 누가 누굴 아껴? 내가 아끼는 동생은 너 하나뿐이야.”
선은 정색했지만, 연은 겁먹지 않고 그저 입술을 꼭 깨물며 웃었다. 미소를 참아 보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꼬마의 깜찍한 눈매는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지난달 어린 태자가 심한 감기를 앓았을 때, 그의 큰누나가 거의 본인이 아픈 것처럼 걱정하며 매일매일 초조해했음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그러니 선이 연만을 아낀다는 말은 거짓이었으나, 연은 실망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다만 기쁘게 여겼다. 속 좁은 언니에 비해 제 모친을 훨씬 닮은 동생은 성품이 봄처럼 따스했으므로.
자신을 아껴 주는 언니가 좋았다. 올해 다섯 살인 동생도 사랑스러웠다.
각자 어미는 달랐고 그들의 아비는 수년 전 제국에 무수한 피를 뿌렸으나,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은 지나간 세대의 과오와 달리 아직 무결하고 상냥했다.
“그래, 평생 마음이 새기거라.”
첫째 황녀는 도도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동생을 보는 소녀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한때 배다른 형제가 함께 고양이를 구경하던 곳에서 배다른 자매가 지금은 평화를 누렸다.
숙청도 전쟁도 이제 꽤 옛날이 된 시절, 흘러가는 일상이었다.
동(東)휘국의 황제 휘륜은 자기가 과거에 대체 어떻게 통일된 제국을 다스렸는지 궁금해졌다.
그나마 영토가 반으로 나뉘고 국정이 안정되면서 업무량이 이만큼 줄어든 거지, 옛날에 그가 대륙의 절반 이상을 혼자 통치했을 때는 대체 어떻게 버텼나 싶었다.
친부를 베고 동생의 자리를 찬탈해 스스로 황제가 되고 5년. 이후 전쟁까지 반년, 전쟁 동안에 반년, 그리고 다시 5년이 되어 올해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초창기가 정리되고 전후의 혼란도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나자, 륜은 드디어 숨 돌릴 틈을 얻었다.
이제야 그는 조금, 아주 조금씩, 성군의 존칭에 가까워질 여력을 얻었다.
“폐하, 오늘 무슨 날입니까?”
그리고, 다른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여력도 얻었다.
화은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륜이 그녀를 데리고 자발적으로 뱃놀이에 나서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 드문 일이 지금 당장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륜은 오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사실, 요즘에 그는 대부분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