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휘륜과 그의 측근들을 용서했다거나, 가족의 죽음을 잊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과하게 지쳤을 뿐.
이제부터는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아도, 저승에 먼저 내려간 내 가족이 나를 원망하진 않겠지.
어쩌면 그분들은 처음부터 내가 복수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라셨는데, 나 혼자 지나간 세월을 차가운 증오 속에서 보낸 걸까.
허무한 후회와 아득한 의문, 그리고 살생에 지쳐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끌어안은 그녀를 주안은 바닷가로 데려갔다.
“어때, 예쁘지?”
머나먼 남쪽, 바닷물이 옥빛으로 찰랑대는 곳이었다. 주안은 가윤을 새하얀 모래밭에 내려놓고 햇빛을 받으며 연인을 향해 생글거렸다.
“예전에 우리 여기 왔던 거 기억나, 가윤?”
기억났다. 가윤이 아직 열여섯 살일 때, 숙청을 피해 혼자 살아남아 주안에게 구조되었을 때.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대는 어린 인간을 달래고 싶어서 주안은 가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내려왔었다.
주안 본인이 사랑하는 풍경이었다. 다른 인간의 숨결이 닿지 않는 벽지였다.
“기억합니다.”
가윤은 목이 메어 대답했다. 흐릿하던 추억이 하나둘씩 선명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오직 나를 위해 애쓰는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만약 기억 못 했더라도 괜찮아.”
주안은 웃으며 다가와 가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의 새파란 눈빛은 바다를 닮았고 금빛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가윤은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기억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면 돼. 내가 앞으로 도와줄게, 가윤아.”
동족의 복수를 원했던 주안과 가족의 복수를 바랐던 가윤.
겨우내 전쟁을 치른 끝에 결국 상처만 남았다. 둘 중 아무도 원수를 해치우지 못했다.
황제를 죽이기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해 가며 버텼는데, 중립적인 휴전은 그들이 꿈꾸지 않은 결론을 낳았고, 세상은 그들의 원한과 상관없이 꾸역꾸역 흘러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슬슬 흘러가야겠지.
“우리, 새로운 추억을 많이 쌓자. 옛날 것들은 조금 잊혀도 괜찮을 정도로.”
주안은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는 가윤에게 입을 맞췄다. 가윤은 눈을 감고 그의 목을 안았다. 드디어 입술이 다시 떨어졌을 때,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왜 울어, 가윤?”
주안은 초조하게 물었다. 가윤은 햇빛 속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소중한 존재를 보며 나지막이 흐느꼈다.
“제가 먼저 떠나면, 당신이 외로울까 봐.”
그녀는 처량하게 속삭였다.
지난가을에 주안이 청자초에 당하면서, 그리고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그녀는 거듭 고민했다. 떠나는 것에 대해.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해.
“제 수명은 당신보다 짧고……. 혼자 남는 건 너무 괴로운데, 아픈 건데…….”
청자초에 중독당한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며 나도 괴로웠다. 무엇보다, 두려웠다.
다시 혼자가 되는 건 싫어.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을 부질없이 놓쳐 버리는 건 너무 무서워.
한데 만약 내가 나중에 노쇠하여 저승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가면, 당신이 그렇게 외롭겠지.
“저는, 당신한테 후회로 남기 싫습니다.”
고통으로 남는 것도 싫다. 이럴 거면 왜 당신을 받아들였을까. 어째서 당신이 그토록 달콤하게 입 맞출 때, 뿌리치지 않았을까.
“나는 후회 안 해.”
주안은 평온하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별 같은 눈에는 다정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윤은 주안이 후회하는 걸 원치 않는다 했지만, 주안이 보기에 벌써 가장 후회하고 있는 쪽은 가윤이었다. 그건 싫은데.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앞으로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가윤아. 네가 나를 선택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할게. 아, 도깨비 애인이 있으니까 참 좋구나, 네가 이런 생각을 늘 달고 살게 해 줄게.”
주안은 싱긋 웃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뺨을 쓰다듬고 매끈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런 데도 우리 둘 다 인간이었다면 오기 힘든 곳이잖아?”
주안은 달게 속닥이며 바다를 향해 손짓했다. 가윤은 훌쩍이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답고도 쓸쓸한 풍경,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장소였다.
도시도 촌락도 멀리 떨어져 있고 당연히 교통도 불편하여 쉬이 닿기 힘든 곳이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이 애초에 이런 해변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야 워낙 방랑벽이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런 곳을 찾은 거지, 다른 도깨비들도 사실 이런 데까지 내려오진 않을걸. 여긴 나만 아는 곳이야.”
주안은 뿌듯하게 설명했다.
인간의 제한적인 교통수단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도깨비, 그리고 그런 도깨비 중에서도 유독 예쁘고 은밀한 곳을 많이 알고 있는 자.
“이런 곳이 많아. 나만 알고, 너와만 나누고 싶은 곳.”
주안은 상냥하게 덧붙였다. 그는 가윤의 손을 쥐고 기껍게 뺨을 비볐다.
가윤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결의 감촉이 폭신했다.
“그런 곳에 다니다 보면, 너도 후회하지 않지 않을까.”
오직 나와 함께함으로써 네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면 네가 나를 더 꼭 잡아주지 않을까. 주안은 지순한 소망을 품고 연인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후회는 하지 않을게요.”
가윤은 어룽진 눈빛으로 약속했다. 그녀는 주안을 와락 끌어안고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입을 맞췄다.
혀끝에 녹는 숨결이 달았다. 앞으로도 평생, 이 단맛을 알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장소는 필요 없어요. 저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 하나만.”
내가 죽은 뒤에 혼자 남겨질 당신을 배려하지 않기로 한다면, 당신의 고독과 상실을 내 이기적인 연심으로 덮을 수만 있다면, 그래, 얼마든지. 얼마든지, 당신을 평생 사랑할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주안은 젖은 입술로 픽 웃었다. 그는 가윤을 품에 담고 눈을 기쁘게 내리감았다.
“나도 너만 있으면 돼, 가윤아.”
그리고 네 이기심이 결국 내 이기심이라서, 우리는 각자 서로를 위한 사랑을 한다.
점점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겹치었고 그렇게 잠깐 맞닿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에, 그 시간의 끝에 후회는 없으리라.
한쪽의 유한한 삶에 밀도 있는 사랑을 담아 매 순간 아껴 주면 그만이었다.
휴전 끝에 제국이 반으로 갈리면서 가윤과 주안은 예전보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휘륜의 영토에서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었으나, 휘결의 영토에서 가윤은 더는 역적의 딸이 아니었고, 주안도 법적으로 금지된 이방인이 아니었다.
물론 사람들의 인식은 법보다 느리게 바뀌기에, 비록 휘결의 영토에서 이종족이 더는 공식적으로 배척받는 존재가 아닐지라도 도깨비 주안을 향한 냉담한 시선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휘결의 영토를 다닐 때 주안은 파란 눈과 뾰족한 귀를 도술로 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으로 활보하는 걸 즐기는 건 아니었다.
가윤도 이제 와서 사람들과 섞여 살 마음이 없었다. 과거 단씨 가문의 맏딸이었던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이제 그녀는 다만,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가윤아?”
어느 날, 주안이 가윤에게 물었다. 가윤은 무슨 뜻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그러자 주안은 가윤의 시선을 피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한테 장가들고 싶어 하는 인간 사내가 꽤 많은 것 같은데.”
아무리 자유롭게 방랑하는 그들이라도 속세와 완전히 담쌓고 지내는 건 아닌지라, 때때로 도시에 들러 생필품을 사고 지인들과 인사치레를 나눴다.
이때 그 지인들은 전부 가윤의 지인들이었고, 개중에 몇몇은 그녀가 명문가 핏줄이자 전쟁의 공신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녀를 신부 또는 며느리로 삼고 싶어 했다.
“나는 시집가고 싶어 하는 인간 사내가 없으니까 괜찮아.”
가윤은 시큰둥하게 일축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혼인을 원하면 뭐하랴? 뭐든 쌍방이어야지.
장가를 원하는 사내는 있어도 시집을 바라는 여인은 없으니,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너야말로 괜찮아? 세상에 도깨비 여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윤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휘결의 영토에서 법이 바뀌어 더는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면서 꽤 많은 도깨비가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당연히 여성도 있었다.
“너는 도깨비 여인이 아니잖아.”
주안은 곧바로 받아쳤다. 그는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가윤을 향해 돌아누웠다.
“너 아니면 소용없어.”
변함없는 마음이었다. 가윤은 애인의 일편단심에 만족하며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주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 영영 어긋나 버려야 할 시간이 왔다.
“나도 영면에 들 거야.”
그러나 그 어긋남마저 어떻게든 끼워 맞춤으로써 둘은 끝까지 함께였다.
“네가 죽고 나면 내 근원은 너랑 같은 무덤에 묻어 달라고 해야지.”
“장난치지 마.”
길고 평안한 세월의 끝에 노년이 된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도깨비 사내는 전과 같이 맑은 눈으로 진지하게 반박했다.
“장난 아니야. 나도 이제 하고 싶은 건 다 해 봤어. 이제는 좀, 쉬어야지.”
사실상 영생을 사는 도깨비들도 스스로 근원을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 방법이 있었다. 주안은 바로 그런 방법을 택했다.
원망도 아쉬움도 없이, 그저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수천 년을 지내다 보면 가끔 세상이 지루해지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너와 보낸 시간은 한순간도 따분했던 적이 없어. 끝이 있다는 걸 알고 그만큼 더 치열하게 살다 보니까, 하루하루가 훨씬 소중했나 봐.”
주안은 생긋 웃었다. 그는 가윤의 주름진 피부를 살짝 건드렸다. 백발 할머니가 된 가윤은 자신의 늙은 모습을 연인에게 보이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나이와 외향과 상관없이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스럽게 대해 줘서, 고작 그런 이유로 거리감을 느끼는 게 오히려 더 부끄러웠다.
“이제 미련은 없어. 억지로 희생하는 게 아니야. 나는 이제 정말 쉬어도 돼, 가윤아.”
비참한 죽음도, 강제된 요절도 아니니라. 이건 그냥 내가 선택한 거야.
너와 이대로 어긋나는 것보다는 겹치는 게 더 좋아서, 나 스스로 마지막 사랑을 결정했어.
“인간이랑 도깨비가 같은 저승에 간다면, 우리 다음 세상에서도 만나자.”
주안은 조곤조곤 간청한 뒤 가윤에게 입을 맞췄다. 가윤은 이제 노약하여 다 부서질 같은 몸으로 그를 안았다.
노인의 몸은 점차 식어 가는데, 도깨비의 체온은 아직 따스했다.
그리하여 가까운 훗날, 정갈한 무덤에는 여인의 관과 작은 은색 항아리가 같이 묻혔다.
후회 없는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