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매일매일 보여 줄게. 네가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주안은 달콤하게 약속했다. 가윤은 그를 보며 애틋하게 웃었다.
“후회한 적 없어.”
전쟁이 끝난 지 5년째. 반란에 성공하지도 실패하지도 못하고 애매한 성취를 이룬 뒤로 어느덧 해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전쟁 중에도 해가 한 번 달라졌으니 이제 가윤은 스물일곱 살이었고, 주안은 여전히 수백 년째의 삶을 살았다.
그간 많은 것이 바뀌면서도 달라졌다. 그리고 한쪽만 바뀌고 한쪽은 여전할수록 어긋남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인간과 도깨비 모두 그 균열을 느꼈다.
“어떻게 후회하겠어.”
가윤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주안의 허리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주안은 순순히 붙들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다시 촉촉하게 맞물렸다.
“다행이다. 후회하지 않아서.”
주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새파란 눈에는 쓸쓸함이 있었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그는 거듭 다짐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고, 그의 품에 뺨을 기댔다. 그는 스스럼없이 마주 안았다.
올해 가윤의 나이 스물일곱, 스물한 살의 나이로 몰래 수도에 돌아갔을 때보다는 조금 덜 앳된 나이였다.
스물한 살이든 스물일곱 살이든 여전히 팔팔한 20대임은 마찬가지라서, 얼핏 보면 별다른 신체적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차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윤은 나날이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았다.
당장 면경만 들여다봐도 예전의 단가윤과 다른 모습이 적나라하게 시야에 담겼다.
싫지는 않았다.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주안만 없었다면. 자신이 아직도 애타게, 애달프게 주안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가윤은 어제가 오늘과 다르고 내일은 오늘보다 앞서가는데, 주안은 오래전 몸의 성장이 멈춘 그대로 끝없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눈싸움은 해 줘야겠지?”
“여기까지 왔는데 눈싸움을 꼭 해야겠어?”
주안이 발랄하게 제안하며 열성적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하자 가윤은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주안이 주먹만 한 눈덩이를 던지자 기겁하며 껑충 물러섰다.
“푸하하, 가윤아, 너 방금 표정 되게 웃겼어!”
주안은 해맑게 조롱했고, 가윤의 혈압은 거침없이 상승했다. 그녀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곧장 몸을 숙였다. 그녀는 야무진 손으로 눈을 단단하게 뭉쳤다.
“너 이리 와 봐. 아니다, 그냥 가만있어.”
“어어, 가윤아, 나 죽이려는 거 아니지? 네 눈빛만 보면 날 죽이려는 것 같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너를 어떻게 죽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겁먹지 말고 도망치지 마. 야, 거기 안 서?”
“하하, 너 같으면 그냥 서겠니.”
주안은 방긋대는 얼굴과 달리 진지한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살벌한 애인을 피해 꽁무니를 뺐다. 가윤은 더더욱 오기가 생겼다.
“야, 너도 한 대만 맞자. 딱 한 대만 맞자, 응?”
가윤은 무시무시한 애원과 더불어 눈을 던졌고, 명중할 뻔했다.
가윤의 운동 신경은 몹시 뛰어났고, 그녀는 전장에서 빛을 발했던 날렵한 몸짓으로 애인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자 주안은 치사하게도 종족의 차이를 과시했다.
주안이 허겁지겁 손을 휘젓자 허공에 파란 불꽃이 넘실넘실 피어났다. 불이 눈을 막았고, 눈덩이는 허공에서 녹아 후드득 떨어졌다.
“대체 누가 이런 일에 도깨비불을 사용해?”
“도깨비 마음이지.”
“거참, 눈 맞는 게 그렇게 무서워? 그럼 애초에 나한테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지.”
“저기요, 시비 건 거 아니거든? 그냥 놀자고 살짝 던진 건데 이렇게 과격하게 반응하면 어떡해.”
“나도 그냥 놀자고 하는 거거든? 자, 어서 와.”
“으아, 잘못했어요.”
평균적인 연인들보다 살짝 섬뜩한 것 빼고는 전혀 특이할 것 없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쫓아 빙글빙글 설원을 누볐고, 의미 없이 실랑이했으며, 결국 몸에 눈을 잔뜩 묻힌 채 화해했다.
애초에 싸운 적이 없기에 화해할 것도 없었다.
가윤은 주안에게 입을 맞췄고, 주안은 가윤을 꼭 껴안았다. 가윤은 주안의 목에 뺨을 비볐다. 새콤하게 번지는 땀 냄새마저 좋았다.
“사랑해, 주안아.”
가윤이 중얼댔다. 주안이 조르고 졸라서, 또한 가윤 본인이 원해서 가윤이 그에게 말을 놓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도 사랑해, 가윤.”
주안은 순하게 답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고, 그녀는 목마른 사람처럼 그의 숨결을 마셨다.
한때 복수에 온 삶을 걸었던 여인과 그런 여인을 위해 전장까지 불사했던 도깨비는, 요즘 이토록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6년 전, 변방에서 반란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듣자마자 인간과 도깨비는 이동을 시작했다.
가윤이 스스로 미끼가 되어 휘온을 함정에 빠트리는 데 실패한 뒤 수도 외곽의 숲에 숨어 지내던 그들은, 북쪽과 서쪽에서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듣고 서쪽을 택했다.
서쪽에는 주안의 동족이 더 많이 살았다. 도깨비들은 대체로 추운 곳을 싫어했다. 주안은 신통력을 아껴가며 연인과 함께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던 중, 소란을 맞닥트렸다.
주안은 신통력의 흐름을 분명히 느꼈다. 아무리 반쪽짜리 동족이어도, 어쨌든 귀중한 피붙이였다.
가윤을 생각하여 망설이는 주안의 등을 오히려 가윤 본인이 떠밀었다.
당신을 나를 위해 늘 희생하며 배려했으니, 이번만큼은 내가 기꺼이 양보하리라.
얼마 전, 황제의 동생과 황제의 후궁이 간통했다는 소식이 황성 내에 쫙 퍼졌다. 그 어찌 황당한 추문인가? 하지만, 아예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주안은 지난 계절에 휘온과 월류하를 만났던 걸 떠올렸다.
두 사람 앞에서 자객의 머리를 과일처럼 깨부순 뒤 휘온의 기억을 지우려 다가갔더니, 월류하가 참 앙칼지게 막아섰더랬지.
<안 돼!>
해칠 생각은 없었는데. 주안은 머쓱하게 물러섰고, 당황한 나머지 가윤을 데리고 그대로 도망쳤다.
나중에 그 일로 휘결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동족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때 주안이 류하의 파란 시선에서 훔쳐본 감정은 절박함, 두려움, 사랑, 그래, 아마도 사랑.
대외적으로 두 사람은 그저 후궁과 호위의 관계지만, 어쩌면 그 저변에는 더 짙고 지독한 진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부터 주안은 무의식중에 깨달았다.
월류하와 휘온은 서로를 사랑했다. 적어도 월류하는 휘온을 사랑했다. 휘온의 월류하를 향한 눈빛은 당시 확인할 기회가 없었으니 주안은 일단 한쪽의 마음만 확신했다.
그런데 휘온은 얼마 전, 반역자 단가윤과 그녀의 조력자를 잡겠답시고 주안의 몸에 청자초를 박아 넣었다.
주안은 휘온도 괘씸하고 휘온을 사랑하는 여인도 괘씸해서, 상처 입고 까무러친 류하를 숲속에서 발견한 그 밤, 그녀를 살릴지 말릴지 고민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
류하의 몸을 조심스레 뒤집어 본 가윤이 류하의 숨소리를 한참 듣더니 판단했다. 류하의 호흡은 가냘프게 끊겨 흘렀다. 가윤은 주안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늘 자신을 배려하는 연인에게 이번에는 양보하고 싶어서, 가윤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주안의 뜻을 구했다. 주안은 계속해서 류하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가윤이 물었듯이 주안도 질문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살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가윤은 단단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휘온을 향한 복잡한 감정을 접어 두고 일단 눈앞의 사람을 구하는 데 집중했다.
전쟁 준비에 가담하고 시체를 되살려 망자까지 모독한 그녀가 이제 와서 타인의 생명을 중시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한다면, 원래 사람은 그리도 모순적인 존재라고 대답하리라.
주안은 아주 살짝 더 망설였다. 우리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월류하는 우리의 적인 휘온을 사랑한다.
물론, 휘온은 이제 실각하여 귀양길에 오른 참이었고 월류하도 폐위된 뒤 공식적으로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폐위된 후궁이 웬 야산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담?
풀리지 않은 의문에 갇혀 주안은 잠시 갈등하다가, 끝내 몸을 숙였다. 이윽고 류하의 부서진 몸을 끌어안고 새파란 빛으로 어루만졌다.
가윤은 때아닌 질투 탓에 속이 쓰려서 내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사이 주안은 제 혼혈 동족을 온전한 신통력으로 정성스레 고쳤다.
결국 본능적인 동족애가 승리했다. 주안은 이 사람의 애인이 자신의 혈관에 독극물을 들이부었다는 사실은 딱 한 번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동족님, 너는 싸가지가 너무 없어.”
그토록 애지중지 고쳐 놨더니만, 류하는 서서히 낫는 와중에도 가윤과 주안을 향해 몹시 경계 어린 눈초리를 보였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하다만.
“나 없었으면 이번에도 죽을 뻔했는데, 고작 그런 표정으로 보지는 말아 줄래?”
그는 차갑게 중얼대면서도 류하의 입에 해열제로 쓰이는 약풀을 열심히 밀어 넣었다.
가윤은 직접 산속을 다니며 약초를 캐 왔다. 그녀는 연인의 동족애를 존중했다.
이후, 월류하가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된 뒤에야 가윤과 주안은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어느 도깨비와 도깨비의 혼혈은 그렇게 어긋나면서도, 겹쳤다.
주안의 반쪽짜리 동족을 살린 뒤, 그와 그의 연인은 서부 전선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휘륜의 군대에 맞서 전쟁에 참여했다.
그 시절의 피비린내는 끔찍했다.
타인의 피로 손을 푹 적시고 각자 여러 차례 죽을 뻔한 후에 전쟁은 끝났다.
이건 승리일까, 패배일까. 가윤은 허탈해졌다.
제 가족을 죽인 휘륜을 죽이고 싶어서 반역을 꾸미고 이종족과 손잡고 전쟁터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원수는 건재했고 고국만 둘로 나뉘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가윤아?”
휴전이 결정된 그날, 주안은 넋이 나간 인형처럼 앉아 있는 가윤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가윤은 그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이제 둘이 같이 떠나요, 주안 님.”
가윤은 마주 속삭였다. 주안은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더 발버둥 쳐 봤자 의미 없을 것 같네요.”
곱게 큰 귀족 아가씨가 여기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참 대견한 일이었다.
성취도 실패도 아닌 결말 앞에서 가윤은 복수심마저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