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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17)화 (117/123)

117화

하긴, 결국 남한테 보이려고 악착같이 꾸미는 일에 뭐 엄청난 의미가 있으랴.

“알겠어요. 난 이런 거 안 해도 예쁘니까, 그냥 지금 가기로 해요.”

류하는 끝내 수락했다. 온은 아내의 거만한 자화자찬에 슬쩍 웃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서 늘 걱정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미모가 너무 많은 이성 경쟁자를 끌어들일 것을 염려하며 저잣거리로 나갔다.

그런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남들은 그 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온, 우리 저거 구경해요.”

류하와 온도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잔뜩 신경 쓰며 어색하게 돌아다녔건만, 축제에는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아서 각각 자기들끼리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에 조용한 이 마을에서 외부인인 류하와 온은 많이 튀었겠지만, 축제 기간만큼은 어차피 낯선 사람들이 바글댔기에 그 가운데 부부는 편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오, 아슬아슬했다.”

활쏘기를 구경하던 류하가 안타깝게 탄식했다. 축제가 열린 거리에는 원래 없던 노점들이 즐비했는데, 그중 하나는 경품을 걸고 행인들에게 활쏘기를 권하는 곳이었다.

“계속 아깝게 빗맞네요.”

“그러게요.”

“……온,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지금 나랑 같은 거 보고 있는 거 맞죠? 보기나 하고 맞장구치는 거예요?”

“네, 물론이죠.”

온은 다소 뜨끔했지만,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사실, 온은 구경에 몰입하여 환호하고 한탄하는 아내가 귀여워서 활쏘기 자체보다는 아내에게 더 집중하던 참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류하가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얼굴 한쪽에 구멍이 뚫릴 듯한 느낌이 나는데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온은 딴청을 피웠다. 류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눈감아 주기로 했다.

“축하합니다, 손님. 지금까지 시도하신 분 중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셨어요.”

한편, 노점 주인은 한껏 호들갑을 떨며 축제의 참가자에게 경품을 건넸다. 연달아 과녁의 중앙을 아깝게 빗맞힌 참가자였다. 그 사내는 나름 만족하며 돌아갔다.

“나도 한 번 해 볼까요?”

온이 문득 말했다. 류하는 눈썹을 치키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음, 그대는 존재 자체가 반칙일 것 같은데요.”

호전적인 북방에서 태어나 무려 5년간 전장을 누볐던 전직 장수에게 경품 추첨용 활을 건넨다? 어린이들 사이에 장정을 밀어 넣는 꼴이었다.

“역시 너무 부정직하겠죠?”

온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류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소탈하게 말했다.

“그냥 한번 해 보세요. 어차피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우리는 단순히 축제를 즐기러 나온 거니,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류하는 양심의 은근한 가책을 무시하며 온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딱히 원하시는 경품이 있습니까? 류하 님.”

노점 주인에게 돈을 내기 전에 온은 허리를 숙여 류하의 귓가에 속닥였다. 또다시 간지러워서 류하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마주 속닥였다.

“그대의 마음에 드는 거면, 뭐든지.”

류하는 소박한 소원을 밝힌 뒤 생긋 웃었다. 온도 빙그레 웃은 뒤, 노점 주인에게 돈을 내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잘생긴 손님. 기회는 총 다섯 번이고, 점수는 1점부터 5점까지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노점 주인이 넉살 좋게 설명하자 온은 정중하게 끄덕였다.

그가 활을 들었다. 잡아당기는 느낌이 어색했다. 그의 기억보다 탄력도 훨씬 약했고 무게도 꽤 가벼웠다.

‘하긴, 전장에서 잡던 활이랑 축제에서 재미로 쏘는 활을 비교하면 안 되지.’

온은 머쓱하게 생각했다. 그는 곧 자세를 가다듬고 시위를 끌어당겼다. 류하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작게 신음했다.

“헐.”

푹! 화살은 살짝 섬뜩한 소리를 내며 과녁에 박혔다. 명중이었다.

당연히 기대한 결과이긴 했지만, 류하는 식은땀마저 흘렸다. 윽,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어야 했나?

“오오, 손님, 대단한 실력자시군요!”

노점 주인은 영업용 미소를 듬뿍 덧그리며 열렬하게 박수했다. 온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온은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팔의 근육이 일순 팽팽하게 부풀었고, 화살촉은 다시 허공을 찢었다.

“이번에도 명중입니다!”

노점 주인이 다시 손뼉을 치자 온은 점점 자신이 사기꾼이 된 느낌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거듭 활시위를 당겼다. 연달아 명중이었다.

다섯 번째 기회. 온은 과녁 옆에 놓인 탁자를 흘긋했다. 그 위에 경품들이 진열돼 있었고, 각각 몇 점짜리 경품인지도 값이 매겨져 있었다.

온의 시선이 경품 하나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다시 시위를 놓았고, 화살촉은 다시 과녁에 박혔다.

“이런, 아쉽군요.”

노점 주인이 혀를 찼다. 이번에도 명중이었으면 완벽한 만점이었을 텐데. 그러나 온은 깔끔하게 빗맞았고, 숫자는 정확히 3에 그쳤다.

류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온이 활을 갈무리하는 걸 지켜보았다.

비록 본인이 안목 높은 궁수는 아니었으나, 황궁에 있을 때 훤아와 수연이 재미로 활을 쏘는 걸 구경한 적이 잦았다.

그러니 류하도 저게 찰나의 실수인지 의도적인 겸손인지 구분할 정도의 눈썰미쯤은 있었다.

총 네 번의 명중과 한 번의 미달 끝에 그의 점수는 43점이었고, 그런즉 딱 43점짜리 경품을 얻었다.

“이게 많이 갖고 싶었나 보죠?”

노점 주인에게 활을 반납하고 경품을 챙긴 뒤, 다시 나란히 인파 속을 걸어가며 류하가 온에게 속닥였다. 온은 아내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선물입니다.”

온이 짠, 하고 꾸러미를 내밀었다. 류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이 야무진 손끝으로 입구를 벌리자 천에 싸여 있던 우아한 보석함이 드러났다.

“그대한테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아서 아까부터 탐냈습니다.”

현재 류하에겐 보석함이 없었다. 애초에 보석함에 넣을 만한 소지품은 황궁을 떠나면서 전부 두고 왔다.

더는 왕족도 황족도 아닌 그녀는 온을 찾아 대륙을 헤매면서 장신구 따위 몸에 지닐 틈이 없었다.

본래 사치스러운 성품은 아니었기에 미련은 없었으나 딱 두 가지, 두 개의 소중한 물품이 그녀의 추억에 아쉬움으로 남았다.

바다처럼 파란 노리개와 불꽃처럼 빨간 팔찌. 하나는 연인이 직접 골라 줬고 하나는 연인에게서 비밀스러운 선물로 받았다.

죄인 신분으로 쫓겨나는 마당에 그런 것들을 챙길 염치가 없어 한스러웠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새 삶을 꾸린 지금 류하는 오직 옷과 화장으로만 멋을 부렸고, 패물은 몸에 지니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이라뇨. 있어 봤자 안에 집어넣을 게 없는데.”

류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온은 류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싸쥐며 진지하게 약속했다.

“앞으로 하나씩 채워 나가면 되죠.”

류하는 온을 물끄러미 맞바라보았다. 그러다 조금 더워진 눈시울이 새삼 쑥스러워서,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감추며 부드럽게 웅얼댔다.

“네, 그러면 될 것 같네요.”

앞으로도 이런 봄날이 수없이 많으리라는 약속 같아서, 잃어버린 노리개와 팔찌를 대신해 새로운 추억을 쌓아 가자는 다짐 같아서, 류하는 마음이 벅찼다.

자칫하면 청승맞게 눈물이 넘칠까 봐 류하는 애써 환하게 미소했다. 과거처럼 비참한 억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울음도, 웃음도 옆에서 감싸 줄 이가 있어 행복했다.

“이제 우리 뭐 할래요?”

“음, 꽃놀이를 왔으면 꽃구경을 하는 게 정석이겠죠?”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아무리 남녀의 유별이 엄격한 보수적인 남쪽이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하나로 섞인 부부가 서로 가만히 체온을 나누는 일에 대해 감히 훈계할 자는 없었다.

“꽃이 참 예쁘네요.”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든 사위를 기쁘게 둘러보며 류하는 해맑게 감탄했다. 온은 기꺼이 수긍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훨씬 곱습니다. 너무 느끼하게 들릴까 봐 온은 뒷말을 삼갔다. 그러자 류하는 문득 능글맞은 미소를 그리며 이번에도 선수를 쳤다.

“하지만 역시, 그대의 미모가 더 우수해요.”

온은 직격탄을 맞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아내에게 눈을 흘겼다. 류하는 생글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역시 그대의 분홍빛이 훨씬 예뻐.

“밖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원망스럽습니다.”

“왜요?”

“그야, 당장 안고 싶어지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온은 심각하게 툴툴댔다. 류하는 그의 음란한 발언을 듣고 눈을 끔뻑대다가, 퍽 얄밉게도 더더욱 활짝 웃으며 상쾌하게 대답했다.

“그럼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세요, 온. 기다린 만큼 보상받을 테니까.”

우리는 서로의 보상이 되리라. 보상, 축복, 선물, 다른 모든 좋은 것들.

봄밤도 봄날도,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계절과 시간도 전부 행복의 몫이 될 거야.

“인내심은 이미 오랫동안 길렀습니다.”

온은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철면피를 까는 심정으로 축제의 인파를 무시하며 류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류하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 어떤 가식도 없이 그저 진정 기뻐서, 마냥 좋아서 내리 웃었다.

수십 번의 봄 중에 고작 두 번째였다.

外1. 어긋남마저 겹치었더라

온 세상이 새하얬다. 가윤은 연인의 품에 안겨 순백으로 물든 풍경을 감상했다. 주안은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때, 예쁘지?”

주안은 살짝 으스대며 가윤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산중턱 이후로 내리 주안에게 안기거나 업혀서 이동한 가윤은 드디어 본인의 두 발로 땅을 밟았다.

“예뻐.”

가윤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의 맑은 먹색 눈에 만년설이 비쳤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주안을 돌아보았다.

“살면서 이런 풍경은 처음이야.”

제국의 귀족으로 태어나 수도의 화려한 풍경을 봤고 역적의 딸로 숨어 다니며 삭막한 뒷골목을 봤다. 때로는 주안과 함께 숲이나 산에 숨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록 아찔한 봉우리와 가파른 절벽, 그리고 그 모든 걸 흰빛으로 덮는 영원한 함박눈은 전부 가윤에게 몹시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거봐. 내가 새로운 거 보여 준다고 했잖아.”

주안이 온화하게 말했다. 그는 가윤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가윤은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차디찬 만년설을 밟고 선 지금, 연인의 입술은 더욱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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