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왜요, 싫어요? 왜 이렇게 쑥스러워해요.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잖아요.>
<어, 그건 그렇지만……. 네?>
<방금 나, 그대에게 청혼한 거예요.>
<어, 음.>
<그리고 그대는 받아들인 거고요. 그건 그렇지만, 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류하는 청혼이 아니라 결투를 신청하는 태도로 온을 쏘아보았고, 온은 가련한 시선을 데구루루 굴리며 얼굴을 격하게 붉혔다.
당연히 연인과 백년가약을 맺는 날을 오래도록 꿈꿔 왔으나, 이런 상황에 이런 식으로 우왕좌왕 혼인을 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좀 더 멋있고, 좀 더 차분하게, 훨씬 낭만적이며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류하에게 평생을 약속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작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떨쳐 내는 수단의 하나로 혼약을 주고받게 되다니, 속상했다. 일생일대의 순간으로 박제하고 싶었거늘.
<그, 그냥 쑥스러운 거 맞죠? 혹시 정말로 싫어요?>
류하는 조급하게 다그치며 말을 더듬었다.
자괴감에 시달리던 온은 류하를 빠끔히 훔쳐보았다. 그녀는 귓불까지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때, 그는 모든 수줍음을 잊었다.
상대방의 홍조가 귀여워서, 나 혼자 이렇게 서툴고도 간절한 게 아님을 알아 버려서, 당신 역시 긴장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로로 다가와서.
<싫기는요. 싫을 리가 없잖아요.>
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그녀를 와락 안았다. 격정적인 포옹과 달리 입맞춤은 온화했다.
달콤하고 다정하게 파고드는 혀끝에 류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 거의 무아지경에 다다를 정도로 황홀했다.
<낮마다 생각하고 밤마다 꿈꿨습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다른 걸 바란 적이 없습니다.>
온은 단숨에 고백했고, 류하는 다소 얼이 빠져서 그를 끔뻑끔뻑 쳐다보았다. 아니, 이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거면서 아까는 왜 그렇게 버벅댔는데?
<다만, 조금 섭섭하네요. 제가 먼저 청혼하려 했는데.>
온은 뒤늦게 툴툴거렸다. 류하는 이런 때마저 승리욕을 불태우는 그가 귀여워서 느긋하게 웃었다.
<결국 내가 선수 쳤네요. 이래서 중요한 일은 망설이면 안 되는 거예요, 온.>
<중요한 일일수록 신중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온은 새침하게 반박하면서 전혀 새침하지 않게 입을 맞췄다. 류하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 남편 해 주는 거예요?>
둘 다 숨이 퍽 가빠졌을 즈음에야 류하가 속닥였다. 온은 눈에 다정한 불꽃을 품고 답했다.
<기꺼이.>
그렇게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전개였지만, 허무하지는 않았다.
각자 서로를 위해 죽음까지 각오하고 남은 평생을 걸기로 다짐한 뒤로, 둘은 이미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거창한 예식은 필요 없었다. 월국의 풍습대로 물 한 잔을 떠다가 정화수 삼았고 휘국의 전통대로 달콤한 술을 나눠 마셨다.
이후 진심이 담긴 약속, 상냥한 눈빛, 열렬한 숨결, 숨 막히듯 아름다운 초야까지. 부족할 게 하나 없었다.
하루아침에 신랑이 되어 버린 온은 뭇 처자들의 마음에 잔혹한 대못을 박았다.
상심한 여인들은 그의 어여쁜 신부를 시무룩한 질투로 흘긋댔다. 류하는 그들의 시선을 뻔뻔히 튕겨냈다.
“평소에 참, 다정했나 보네요. 내 남편님.”
류하는 빵긋 웃으며 다시 바늘로 천을 푹, 찔렀다. 온은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바느질할 때는 집중하세요. 그러다 다칩니다.”
이 와중에도 꿋꿋이 아내 걱정을 해 주는 그가 기특해서 류하는 조금 누그러지기로 했다.
한동안 류하는 도도한 자태로 바느질했고, 온은 절절매며 그녀를 거듭 곁눈질했다. 그러면서도 성실하게 교본을 정리하는 건 잊지 않았다.
“우리, 너무 일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슬슬 바느질을 마무리하며 류하가 문득 말했다. 온은 이번엔 또 어떤 무서운 말을 하려고 저러나, 아내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류하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좀 놀러 다녀요, 온. 마침 봄꽃 축제도 한창인데.”
사실 말투만 태연했고, 실을 매듭짓는 손길은 여전히 살짝 난폭했다. 온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았다.
“끝나기 전에 우리도 다녀와야지.”
류하의 모친이 나고 자란 이곳은 거리마다 꽃나무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따스한 봄철은 유독 그러해서, 매년 이맘때면 온 마을이 축제로 들썩였다.
류하와 온은 여태 축제를 멀리했다. 둘 다 아직 낯선 마을에 서서히 적응하는 단계인지라 인파와 소음과 흥분이 부담스러웠다.
고작 몇 주 전에 도착한 류하는 특히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부부는 단둘의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해서, 굳이 북적북적한 축제를 통해 즐거움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낮에 그들은 함께 일했고, 밤에는 굶주린 사람들처럼 몸을 섞느라 바빴다. 각자 잠잘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꽃놀이라니, 조금 사치스럽긴 했다.
“어때요, 좋죠?”
이제야 류하는 불길하게 방싯대며 남편의 동의를 구했다. 온은 현명한 답변을 택했다.
“매우 좋습니다.”
싫다고 말하면 주먹이 날아올 기세였다. 아내의 폭력성을 억제하기 위해 온은 언제나처럼 장단을 맞춰 주었다.
게다가, 어차피 좋다는 건 사실이었다. 축제 자체가 기대된다기보다도 아내와 함께하는 축제가 기다려졌다.
둘이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고 설령 사지에 뛰어드는 일이라도 기쁠 수 있었다.
하물며 사지에 뛰어드는 게 아닌 함께 꽃놀이를 가는 것쯤이야,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외출 약속이 잡혔다. 유희 당일, 류하는 몹시 진지하게 단장했다.
“뭘 그렇게 화려하게 꾸몄습니까?”
온은 아내를 보고 정색했다. 정성 들인 화장은 류하의 이미 선명한 미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아껴 입던 의복은 경박하지 않은 원색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 단단히 보여 주려고요. 그대가 평소에 너무, 너무 친절하게 대하는 마을 여인들한테 그대의 아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대단한 이유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간편하게 드러나는 건 아무래도 외모 아니겠어? 류하는 뻔뻔한 자신감으로 예쁘게 웃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너무 예쁜데.”
온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류하의 옷깃을 잡고 가볍게 잡아당기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마을 사내들은 생각 안 하시나요? 그대도 상당히 상냥하던데? 사람들이 인사하면서 지나가면 마구 웃어 주고?”
류하는 남편의 스산한 투정을 멀뚱멀뚱 듣고 있다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꼬리가 더욱 곱게 접혔다.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몹시. 그러니까 화장 좀 지우세요.”
“싫은데. 그리고 화장을 지우면 내 민얼굴이 드러나서 더 치명적일 텐데요.”
“하하, 그대는 말을 해도 참…….”
“예쁘게 해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칭찬이에요?”
“아마.”
“삐치지 마요, 온. 내가 이웃한테 상냥하게 대하는 건 오직 그대의 평판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안 삐쳤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그대가 먼저 삐쳤잖아. 나도 우리 평판 생각해서 남들한테 친절하게 구는 거거든?”
“온, 지금 나한테 화내요?”
“아니? 그럴 리가.”
온은 말의 내용과 정반대의 표정을 지었고, 류하는 그것마저 귀여워서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온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심각하게 삐친 와중에도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우리 각자 사람들한테 딱 필요한 정도의 예의만 갖추도록 하자. 더 싸우지 않기로 해요. 알았죠?”
류하는 제멋대로 사는 게 익숙한 말괄량이 공주였고, 온은 오랫동안 장수로 지내면서 성품이 많이 무뚝뚝해졌다.
그런 그들이 성질을 죽여 가고 구태여 웃어 가며 사내에게든 여인에게든 다정하게 구는 건, 오직 서로를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외지인이라 배척받기 쉬운 자신들이 더욱 엇나가지 않도록, 이 마을에서 행복하도록.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싸운 적 없거든요.”
온은 퉁명하게 대꾸했다. 아직도 삐친 게 분명한 그의 표정에 류하는 피식 웃었다. 지아비를 달래기 위해, 류하는 다시 입을 맞췄다.
입맞춤에 몰입하다 보니 축제 자체는 까맣게 잊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입맞춤은 그냥 입맞춤으로 그치지 않았고, 점점 깊어지고 짙어졌다.
“어, 음, 류하 님. 우리 외출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던 온이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아내를 지그시 밀어냈다. 그러나 류하는 무적이었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남편의 입술을 오물거렸다.
“네, 네, 할 거예요. 외출해요, 우리. 조금 이따가.”
지금은 외출보다 더 좋은 게 있잖아, 그렇지? 류하는 자신의 우선순위가 똑바로 잡혔음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남편에게 입을 맞췄다.
온은 포기했다. 자신을 어루만지는 아내의 손길이 지나치게 달콤하여 뿌리치기 어려웠다.
한참을 애무한 뒤에야 아내는 남편을 놓아주었다. 지금껏 충분히 먼저 그만둘 수 있었음에도 달리 도리가 없는 척 내숭을 떨던 온은 아쉬움을 삼키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요. 화장이 많이 지워져서.”
온은 앙큼하게 중얼댔고, 류하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살짝 절망하며 면경을 다시 살폈다. 음, 확실히 엉망이 되긴 했네.
“칫, 다시 해야 하잖아요. 귀찮은데.”
“귀찮으면 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오늘은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단 말이에요. 열심히 전투태세를 갖췄는데, 이게 뭐야.”
“……류하 님, 오늘 나 혼자 놀러 나가려고 했던 건가요? 그대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내 남편이 너무 인기가 많아서 만인에게 좀 제대로 경고하고 싶었더니만.”
류하는 잔뜩 번진 입술 화장을 불만스럽게 문지르며 투덜거렸고, 온은 토라진 아내를 귀엽게 보다가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경고할 필요도, 대상도 없습니다. 내게는 오직 그대뿐이니까요.”
혈당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류하는 아찔함을 느끼며 고개를 새삼스레 돌렸다. 온이 속살거릴 때마다 흘리는 숨결이 그녀의 분홍빛 뺨을 간질였다.
“그러니까 그냥 대충 고치고 나가요, 네? 이러다 축제 다 끝나겠습니다.”
온은 과장을 보태며 살살 꼬드겼고, 류하는 끝내 누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