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팔려 가듯 시집가는 것에 대한 반항심으로 똘똘 뭉쳐 삐딱하게 시비를 걸던 공주.
그런 공주의 기를 미리 꺾어 놓을 겸 다소 무례하게 굴었던 장수.
서로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을 줄 알았던 둘이 이제는 같은 이불을 덮고 품을 포갠 채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속살대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이 제게 고백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말해 놓고 놀랐어요. 진짜, 나는 입이 문제야.”
“자책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런 점도 매력적입니다.”
“주둥이가 가벼운 사람이 그대 취향이에요?”
“딱히 주둥이가 가볍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꾸밈없는 사람이라고 해 두죠.”
“나, 별로 꾸밈없지 않은데요. 되게 영악한 사람이에요.”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영악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들어 봅니다.”
무의미한 실랑이, 상냥한 옥신각신, 이따금 스치는 입술, 간간이 어루만지는 손. 숨결이 섞이고 온몸에 번졌다가 다시 눈가를 감쌌다.
류하는 이마에 닿는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온, 정확히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그녀는 졸음의 경계에서 웅얼웅얼 물었다. 돌이켜보니, 아직 자세하게 듣지 못했다. 풀어나갈 이야기가 산더미였다. 앞으로 시간은 많았으니, 괜찮았다.
“어쨌든 처음에 귀양길에 오른 건 맞죠? 그러다 언제……. 언제 빠져나와서 이동하기 시작했어요? 나 찾아서 한참 헤맸다면서요.”
류하를 다독이던 온은 멈칫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마지못해 폭로했다.
“제가 도성을 벗어나자마자 자객이 쫓아왔습니다.”
류하는 잠이 번쩍 깼다. 그녀는 토끼 눈을 뜨고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사랑스럽게 마주 보는 그의 눈에 서글픔이 담겼다.
“정확히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영영 모르겠죠. 폐하께서 보내신 건지, 황후 전하가 독자적으로 움직였는지. 그걸 구분하는 데 의미가 있는지.”
온은 나지막이 덧붙이며 류하의 머리에 이마를 기댔다. 류하는 콧등과 뺨에 쏟아지는 쓸쓸한 숨결을 느꼈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어쨌든, 무사히 도망쳤습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쫓아왔는데, 그때도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때마다 죽였습니다. 전부 죽였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전쟁터 같았습니다. 제 칼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솔직한 묘사는 현명하게 되삼키며 온은 입술로 류하를 어루만졌다. 류하는 묵묵히 화답했다. 위로하는 숨결이 온을 다독였다.
“어차피 도성을 떠나자마자 도망칠 예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서신을 읽었으니까요. 저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류하 님. 반드시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날 겁니다. 류하는 약속했고, 온은 믿었다.
연인의 약속과 자신의 신뢰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노력했고, 드디어 그 믿음의 끝에 닿았다.
“약속 지키게 해 줘서 고마워요.”
류하가 속삭였다. 울음을 참는 목소리였다. 온도 똑같이 벅찬 마음으로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애초에 그런 약속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췄다. 살아 있음을, 진정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 있기에 만날 수 있었고, 살아 있기에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전쟁에 관해서도 잠깐 얘기했고 월국과 휘국의 문화 차이에 관해서도 잠시 토의했으며, 휘국 황실에 두고 온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결국 황후 전하가 황자를 낳았다네요.”
류하가 중얼대자 온은 잠자코 떠올렸다. 자신의 첫 사내 조카는 아직 젖먹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륜은 제 아내에게 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다행이에요. 후계가 정해져서.”
온은 차분하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아무리 등지고 떠났어도 그는 휘국 사람이었고, 황족으로 태어났었다. 황실의 안정과 고국의 정치는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직접 관여할 수는 없을지라도 멀리서 평안을 빌어 주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뿌리, 고향, 피를 나눈 친족들을 위해.
“그 전에 그대가 도망친 게 더 다행이죠.”
류하는 음산하게 대꾸했다. 황태자로 책봉된 황후의 아들과 황제의 동생인 온이 공존하는 황실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결국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네요. 다행으로 생각하도록 하죠.”
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모두가 행복한 결말 따위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그도 류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난겨울에만 해도 전쟁 때 너무 많이 죽었다. 그리고 반군이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면서 대륙의 각지에서는 여전히 인간을 제외한 종족들이 숨죽여 살아야 했다.
부분적 황제로 즉위한 휘결은 자신이 처음에 한 약속을 지켜 이종족에 대한 차별을 금하는 법을 제정했다.
대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췄던 온갖 존재들이 이제는 전설 밖으로 걸어 나와 조심스레 새 터전을 일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휘결이 다스리는 영토에서마저도 너무 큰 논란의 대상이라서, 북쪽의 정치는 아직 바람 잦을 날이 없다고 했다.
류하와 온은 그런 소식을 어렴풋이 주워들었다. 이제는 왕족도 황족도 아닌 필부로 살아가는 그들은 한 발짝 떨어진 방관자로 존재했다.
그들은 막연하게 걱정하고 고민했지만, 관심은 단순히 관심으로 그쳤다. 행동할 필요도, 수단도 없었다. 그저 모두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제 주무셔야죠, 류하 님.”
온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류하는 자그맣게 하품했다. 잠드는 시간조차 아까워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으나, 확실히 피곤하긴 했다.
“깨어나면 그대가 없을까 봐 무서워요.”
그녀는 솔직하게 웅얼댔다. 이 모든 게 정말로, 꿈이면 어떡하지.
“그럴 리 없습니다.”
온은 상냥하게 부정했다. 사실 그도 똑같은 두려움을 품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으며 듬직하게 연인을 달랬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글피도, 다음 날에도, 늘 곁에 있겠습니다.”
이것도 약속이었다. 이번에도 지킬 수 있을 거야. 온은 굳게 다짐하며 류하를 안았고, 류하는 연인에게 신뢰를 걸기로 했다.
둘은 서로의 믿음직한 품 안에서 잠들었다.
숙면 끝에 눈을 살그머니 떴을 때, 휘장을 뚫고 실내에 번진 봄날의 햇살은 아름다웠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소중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류하는 벅차서 눈을 감았다.
“아침에 봐도 아름다우시네요, 류하 님.”
“으, 그건 궤변이에요…….”
“궤변 아닙니다. 진짜에요.”
류하는 눈곱이 끼고 통통 부은 적나라한 얼굴이 부끄러워 이불 속에 숨었고, 온은 본인도 똑같이 살짝 못생겨진 주제에 뻔뻔하게 달라붙었다.
류하는 연인의 철면피에 질색하다가 끝내 못 이기는 척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고 그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체온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기뻤다.
“그대는 아주 감언이설이 일상이군요. 좋은 황족의 자세가 아니에요.”
“이제 황족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뭐, 그건 그렇네요.”
류하가 피식 웃었다. 온도 마주 웃었다. 그는 그녀의 볼에 살짝 뽀뽀한 뒤 일어났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 갈아입고, 같이 부엌으로 가요. 조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온이 다정하게 권하자 류하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그녀는 찬란하게 생글대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기대할게요.”
이제는 일으켜 주는 손이 있었다. 매일 아침 반갑다고 인사할 사람이 있었다. 정성 들여 식사를 차려 놓으면 맛있게 먹어 줄 사람이 있었다. 기뻤다.
연인들은, 언젠가 곧 부부가 될 자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처소를 떠났다.
함께하는 두 번째 봄이었다.
황궁의 풍족한 삶을 반강제로 저버린 이상, 류하도 온과 더불어 돈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도 류하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고, 과거에 어머니가 살았고 지금은 연인이 거하는 마을에서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인기가 되게, 아주 많더라고요, 그대는.”
야무진 손길로 의복을 기우며 류하는 바늘로 천을 푹, 찔렀다. 옆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교본을 정리하던 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그대가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어. 하긴, 그대는 다정하니까요, 그렇죠? 괜히 무뚝뚝한 척하면서 챙겨 줄 건 다 챙겨 주잖아요. 나한테도 그랬고, 그렇지.”
“저기, 류하 님.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게 눈빛으로 욕하지 말고.”
“욕? 무슨 욕? 나 그대한테 욕한 적 없는데요.”
“……지금 웃으면서 나를 조질 것처럼 보고 있잖아요. 빨리 말해요, 어서.”
“그대가 하루아침에 유부남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대놓고 실망하는 여인들이 매우 많던데요? 내가 없는 동안 마을 처자들 마음에 불이라도 지르고 다녔습니까? 그래서 다들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울해하는 거래요?”
“오해입니다. 엄청난 오해에요.”
“네, 맞아요. 오해겠죠. 나도 오해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기분이 더럽네요.”
“류하 님, 그렇게 웃으면서 기분 더럽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럼 더 무섭습니다.”
“잘됐네요. 무서우라고 하는 건데.”
몇 주 전, 남몰래 온을 흠모하며 그가 지나갈 때마다 언뜻언뜻 얼굴을 붉히던 수많은 여인의 마음에 커다란 좌절이 깃들었다.
어느 날부터 온의 사저에 웬 낯선 미녀가 보이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다.
아니, 외부인이 또 늘었다고? 게다가 둘이 같이 살아? 둘이 무슨 사이인데?
고향조차 불분명한 신비주의 온에게 마찬가지로 신비한 미지의 여인이 엮이자 사람들의 호기심은 폭발했다.
호기심은 차가운 정죄의 색채를 띠기도 했다. 보수적인 월국에서, 서로 연고도 없는 두 남녀가 한 지붕 아래 거하는 건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온이 자신과 류하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 류하와 혈연관계인 척하거나. 아니면, 류하와 자신이 부부라고 둘러대는 것.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해요? 나중에 들키면 정말 끔찍할 텐데.>
첫 번째 방법을 두고 류하는 질색했다.
온의 친척인 척하라고? 그러다 나중에 껴안고 뽀뽀하고 온갖 알콩달콩한 짓을 벌이다가 들키면 어떡할 건데?
혈육끼리 붙어먹은 금수 같은 자들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건 사양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부부라고 하죠.>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