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류하는 허리를 틀며 신음했다. 온의 인내심이 점점 얕아졌다. 갈급한 손이 그녀의 앞섶을 파헤쳤다. 류하는 온의 바지 끈을 잡고 그의 하의부터 벗겼다.
탄탄한 허벅지가 매끈한 다리를 벌렸다. 류하는 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슴끼리 짓눌렸다.
“하아, 류하 님…….”
여인의 젖은 교성 사이사이로 사내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토록 원색적인 동작을 보이는 사내치고는 무척이나 지순한 부름이었다.
류하는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후끈하게 요청했다.
“님, 자는 빼고.”
이제는, 이제부터는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후궁과 대장군, 형수와 시동생이던 시절의 정중한 호칭 없이도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존중하고 아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류하야.”
그는 기꺼이 복종했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긴긴밤이었고, 다디단 재회였다.
몇 번이고 서로를 품고 나서야 둘은 숨을 몰아쉬며 수그러졌다. 연달아 사랑을 나눈 뒤에 남은 건 깊어진 어둠이었다.
“이제 밤이네요.”
류하는 조금 놀라서 중얼댔다. 세상에, 대체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던 거야? 분명 마루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저녁이었는데.
“네, 밤입니다.”
온은 담백하게 수긍했다. 그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정욕 없이 가볍게 쓰다듬는 동작이었다. 류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있잖아요, 온.”
“네, 류하 님.”
“그게…….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나요?”
“무슨 뜻이죠?”
“황실은 그대가 죽었다고 발표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끝인 거죠?”
류하는 눈에 걱정을 한가득 담고 온을 올려다보았다. 온은 연인을 품에 안은 채 가만히 생각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인가 봅니다.”
륜은 온이 죽었다고 확언했다. 동생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웠고, 더는 그를 쫓아 대륙을 들쑤시지 않았다.
왜? 만약 선황의 적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반대 세력이 온을 찾아내 그에게 반역을 일으키라고 유혹할까 봐?
아니면, 드디어 동생을 완전히 풀어 주기로 마음먹었나.
함께 길고양이를 구경하던 어린 형제의 마지막 추억이, 한때 귀여웠던 동생을 추격하지 않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태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우애의 흔적일까. 아니면 정치적 계산일까.
내가 아예 죽은 사람이 돼 버리면, 나를 앞세워 형님을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싹부터 잘려 나갈 거라고 판단한 걸까.
어느 쪽이든, 부디 평안하길.
아비의 잘려 나간 목을 제 앞에 던져두고 권좌에 앉아 위태롭게 웃던 형이, 옥사 안에서 자신의 손을 짓뭉개듯 감싸던 형이, 귀양길에 오른 저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던 형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혼자 숨어 고양이를 지켜보다가 자신이 나타나면 활짝 웃어 주던 형이 떠올랐다.
때로는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제 눈을 어색하게 피하던 형이 떠올랐다.
1황자와 황태자의 실력이 비등하다는 소문이 돌기가 무섭게 학문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던 형이 떠올랐다.
저를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고 끝내 죽이려 했으나 죽이지 못한 형을 떠올리며, 그저 평안하기를, 부디 평안하기를, 또한 부디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주었다.
“어쩌면, 저는 단 한 번도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온은 문득 털어놓았다. 류하는 묵묵히 경청했다. 온은 연인의 머리칼에 뺨을 묻고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 형님의 자리였는데 제가 탐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제 주변의 어른들이 저를 위해 탐내서. 그래서 상황이 그렇게 어그러진 걸지도 모릅니다.”
순리에 따라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건 형님이 아닌 나였을지도 모른다.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아서가 아니라 원래 자기 몫을 힘겹게 되찾아오느라 형님은 그렇게 무수한 이를 죽이고, 수많은 비극을 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내 잘못이었을까? 맏이는 형님이시니 보좌는 당연히 형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일찌감치 읍소할 걸 그랬나.
천첩 소생이라는 그깟 꼬리표 따위, 본인이 그리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형님이 이런 식으로 희생해야 하냐고 부모님께 화라도 내 봤어야 했나.
혈통이, 그깟 혈통이 대체 뭐라고.
나도 적통이자 황족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닌데.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들이 그렇게까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데.
“저는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 밥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지금이 좋습니다. 완전히 필부의 삶이지요. 그렇다고 덜 가치 있는 삶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 허무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황제가 될 줄 알았는데. 당연히 네가 될 거라고, 네가 되어야만 한다고, 얼마나 많은 어른이 그에게 끈질기게 속닥였는데.
“만약 불쾌했다면 송구합니다. 제가 형님을 훌륭한 황제로 치켜세우는 것처럼 들렸다면요.”
온은 걱정스레 덧붙였다. 자국민에겐 유리하지만 외부인에겐 잔혹한 팽창으로 류하의 고국까지 괴롭혔던 자신의 형을 본의 아니게 변호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불쾌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온.”
류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온을 달랬다. 실제로 조금 서글플지언정 섭섭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폭군이나 그대에겐 혈육이니, 이 묘하고 모순적인 세상에서 어찌 모두의 기준이 같기를 바랄까.
“그리고 자책하지 마요. 그대도 그대의 형도, 사실은 잘못이 없을지도 몰라요. 둘 다 과욕 같은 걸 부린 게 아니라 그냥, 각자 별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정말 순리라는 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순리라는 게 대체 뭐지?
맏아들이 후계가 되는 거? 적통이 서자를 짓밟는 거? 여자애는 아예 제위를 꿈꿀 수도 없는 거? 그런 거야?
고작 그런 것들을 이유로 자식들을 아등바등 싸우게 만들다니, 결국 잘못한 건 어른들이라고 류하는 굳게 믿었다.
사이좋게 길고양이를 구경하던 귀여운 어린 형제에게 잘못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이 멍청한 세상이 허락했다면, 너희는 훨씬 평안했으리라.
“그대가 탐한 게 아니고, 그대가 어그러트린 게 아니에요. 이제 와서 누가 뭘 잘못했는지 일일이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동생도 형도 각자 살아남고 지키기 위해 단지 최선을 다했던 건 아닐까. 류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했다. 그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허무해하지도 않았으면 해요. 그대가 말한 대로, 소박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덜 가치 있는 삶은 아니잖아요. 모두가 위대해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가장 선한 방식으로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고귀하게 태어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모두가 우러르고 복종하는 군주가 되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스스로 밥을 짓고 목욕물을 데워야 하는 지금, 자기는 왕족이 아니고 연인은 황족이 아닌 지금, 류하는 오롯이 행복했다.
“우리 같이 행복해져요, 온. 지금까지 잘못한 게 있다면 앞으로라도 바로잡으면 돼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아쉬운 점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리운 이가 하나도 없다 하기엔 황궁에 두고 온 제하와 궁녀들, 그리고 훤아와 수연이 마음에 걸렸다.
수연이 황제와 황후의 뜻을 거스르는 일까지 각오하고 반군 토벌대에 몰래 사람을 심어 친구에게 해독제를 건넸다는 사실을, 류하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당신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온이 속닥였다. 그는 선량하며 다정한 눈으로 부드럽게 웃었고, 그 미소에 류하는 영영 사로잡혔다.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수백 번째로 연심을 고백한 뒤, 아끼는 이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술이 하나로 녹고 서로의 마음이 단단히 뒤얽힐 때, 밤하늘의 별빛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설령 구름 낀 날이라 할지라도, 둘이 함께라면 어느 곳이든 반짝이리라.
終. 두 번째 봄
수많은 이야기가 어둠을 수놓았다. 부드러운 밤빛에 속삭임이 섞였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들.
온전히 연인이 된 한때의 형수와 한때의 시동생은 이제야 지난날의 공허한 틈을 따스하고 달콤하게 촘촘히 메꾸었다.
“처음부터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얘기들. 예전에는 아무리 둘이 서로 사랑했더라도 벽에 눈과 귀가 달린 황궁에서는 마음 놓고 털어놓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를 내 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도술을 써서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되도록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정 안 되면 몸으로라도 유혹해 보려고 했는데…….”
“쿨럭! 커억, 크흡. 뭐, 뭐라고요?”
“나도 창피하니까 적당히 좀 할래요? 어쨌든, 그대를 어떻게든 구슬려서 내게 호의적으로 만들면 그대가 내 탈출을 도와줄 거로 생각했어요. 뭐, 정말 그렇게 믿었다기보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거긴 하지만.”
류하는 씁쓸하게 회상했다. 아, 당시에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아니, 순진한 것보다는 절박했다.
얼굴도 모르는 폭군 황제에게 시집가는 게 너무 싫어서 그런 허술한 계획을 세워서라도 그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당시 그대는 너무 무뚝뚝했고, 나중에는 나도 내가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더라고요. 나 하나 사라지면 큰일 날 사람이 몇 명이었는데. 점점 현실적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의지가 결국 꺾였어요.”
“잠깐만요. 제가 그때 그렇게까지 무뚝뚝했습니까?”
“완전히 돌이었죠, 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어,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 맞았거든요? 이제 와서 미화하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이 너무 부풀려서 기억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라니까요. 그때 그대를 보면 되게 난감했어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돌 같았다니까요.”
워낙 잘생긴 얼굴이라 한층 비인간적으로 보였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은근히 재수 없는 이 사내가 그런 식으로 노골적인 칭찬을 들었다간 한동안 쓸데없이 우쭐댈까 봐.
“이제라도 사과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무뚝뚝하게 굴어서 상처 줄 생각은 없었는데.”
“어, 괜찮아요. 굳이 사과를 들으려고 말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마음이 좋지는 않네요. 제가 당신께 그런 첫인상을 남겼다니.”
“내 첫인상도 상당히 최악 아니었나요?”
“최악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 봤자 별로 좋지는 않았을 텐데?”
“……좋지는 않았죠.”
“역시, 지나치게 정직하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