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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13)화 (113/123)

113화

류하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공으로 온을 올려다보았다.

온은 언제 그리 소년처럼 수줍었냐는 듯, 심연처럼 깊은 눈으로 류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한 사이라서, 더더욱 참기 어렵습니다.”

그는 진득하게 속삭였다. 숨결이 귓불을 긁었다. 류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다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고, 그때 온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조심.”

단순히 받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 맞추지 않고, 몹시 비좁은 간격에서 생긋 웃으며 그녀를 녹일 듯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손이 많이 가는 분입니다.”

류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슬쩍 떠밀었다. 온은 순순히 밀려났고, 아까와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음식을 마저 푸기 시작했다. 류하는 그를 뚱하게 노려보았다.

“재수 없어.”

“제가 너무 잘나서 그렇습니다.”

“와, 진짜 재수 없어…….”

“유감이네요.”

그는 그릇을 전부 채웠다. 그는 빙긋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제 가서 식사하시죠.”

두 사람은 사랑채로 자리를 옮겼다. 류하는 엄숙한 표정으로 첫 시식에 나섰고, 온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류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맛있어요.”

“거봐요. 이래도 제가 재수가 없습니까?”

“훨씬 더 재수 없어졌네요. 요리까지 잘할 줄이야.”

“저는 못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하, 과연 그럴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세요. 제가 여태 당신 앞에서 못한 게 뭐죠?”

“어, 음.”

“거봐요. 어서 저녁이나 드십시오.”

온은 얄미울 만큼 인자한 미소로 연인을 재촉했고, 류하는 새침하게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음식이 맛있는 건 사실이었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류하는 굉장히 삐친 얼굴을 하고도 복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웠고, 온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본인도 식사에 동참했다.

“제가 당신의 목숨을 구한 것만 해도 여러 번입니다. 검술에 능하고, 순발력 좋고. 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그렇게 트집을 못 잡아 안달입니까?”

“음, 겸손하지 못한 건 흠이 아닐까요? 지금 당신은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데.”

“거짓 겸손은 부정직함입니다. 저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에요.”

“방금 그건 대놓고 허언이네요.”

“아마 아닐 겁니다.”

“밥이 맛있으니 봐줄게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 지금 내 앞에 있으니, 그것도 칭찬해 줄게요. 면죄부로 생각하세요.”

온의 숟가락질이 느려졌다. 그는 처연하게 웃으며 류하를 바라보았다. 류하는 반찬을 오물대며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직도 제가 꿈꾸는 것 같습니다.”

그가 나직이 털어놓았다. 류하는 아예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녀는 입에 든 음식을 서둘러 씹어 삼키더니, 부드럽게 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과분하게 달콤하여 현실이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툭 무너질 듯한 그런 꿈. 류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조심스레 온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꿈 아니에요.”

툭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이별이 너무 익숙해서 함께하는 순간이 오히려 생경하다 해도, 거듭하다 보면 점차 편안해질 거야.

“나, 지금 여기 있어요. 지금 그대도 여기에 있고.”

류하는 힘주어 깨우쳤다. 온은 가만히 웃으며 느리게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는 포개진 손을 끌어다 자신의 뺨을 꾹 눌렀다. 맨살을 타고 체온이 전해져서, 류하는 벅차도록 행복했다.

“지금 우리 둘 다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왕족도 황족도 아니고, 형수와 시동생과 아니며, 그저 시골 마을의 평범한 아내와 남편처럼 저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할 뿐이니, 아름다웠다.

류하는 기뻐서 빙긋 웃었다.

상을 치우고 차를 끓인 뒤, 두 사람은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온은 여름밤의 벌레들을 막기 위한 고운 망사를 쳤다. 류하는 월국식의 그 장치를 손으로 툭 쳤다.

“벌써 현지인이 다 됐네요, 온.”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휘국에는 이런 게 없잖아요?”

“흔하지는 않지요.”

남쪽의 월국보다 여름이 훨씬 짧고 선선하며 건조한 휘국은 밤에 벌레를 막고자 집마다 이런 망사를 걸어 놓지 않았다.

“이곳에 살면서 확연히 느꼈습니다. 예전에도 짐작은 했지만, 그때 감히 짐작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로요. 당신이 휘국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그곳에 시집가기 싫었을지.”

온은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뜻밖의 실토에 류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며 괴로운 눈빛을 지었다.

“제 고국 사람들이 당신의 고국 사람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더군요. 두 나라의 기후도 너무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너무 많은 게 다릅니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는데, 사실은 몰랐습니다.”

자신의 여덟 번째 형수로 낙점된 공주를 데리러 남쪽으로 내려오며 온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가여워라. 얼굴도 모르는 황제에게 시집가는 박복한 여인. 게다가 내 나라는 이 나라를 착취하는 상황인데.

“당신이 제 나라에서 이방인이고 저는 그 나라의 황족일 때는 마치 선심 쓰듯 연민하고 시혜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당신 나라에서 이방인이니, 당신이 얼마나 숨 막혔을지 더 잘 알겠습니다. 당시 저의 연민과 공감이 얼마나 같잖았는지도요.”

가여워서 잘해 줬고 안쓰러워 마음이 갔으며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했으면 했다.

이왕 타국의 후궁으로 시집온 거, 당신이 향수를 잊고 빠르게 적응하여 남은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도했다.

그만큼 당신을 아끼고 위했기에 당신의 편안함과 행복함을 바란 거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망각을 기원했던 건, 당신의 적응을 갈망했던 건, 잔인했다.

“송구합니다, 류하 님.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송구합니다.”

온은 진심으로 죄스러워 씁쓸하게 사과했다.

북방에서 외톨이였던 당신을 온전히 헤아리지도 못했으면서 막연히 위로하고자 했던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뒤늦게 부끄러웠다.

“사과하는 예쁜 마음은 받아 둘게요.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 마요, 온. 그대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류하는 빙긋 웃으며 달랬다. 아, 예뻐라. 나를 위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거듭 고민한 끝에 두렵게 사과하는 그대는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낯선 땅에서 외부인이 되어 버린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줬으니, 역경을 딛고 시야를 넓혀 나를 더욱 깊게 이해해 주었으니, 소중했다.

“그대가 선심 쓰듯 연민한 거였어도 좋았어요. 시혜적으로라도 공감해 줘서 고마워요. 세상에는 그것조차 못 해 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미안해졌을 때,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인사도 쉬이 건네지 않는 허세 가득한 인간들이 있다.

제 잘못도, 남의 도움도 인정하기 싫어 끝까지 자기 혼자 잘난 척 뻗대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그런 부류가 아니구나. 류하는 뿌듯해서 연인을 꼭 안았다. 온은 여전히 괴로운 눈빛을 하면서도 그녀를 마주 안았다. 품에 담기는 말랑한 체온이 좋았다.

“그 정도로 힘들어요, 온? 고향이 많이 그립나요? 내게 이렇게 미안할 만큼?”

“그립지 않다 하면 거짓이겠죠. 그렇다고 지금이 싫은 건 아닙니다.”

온은 부드럽게 답했다. 그가 류하를 살짝 밀어냈다. 거리가 충분히 생기자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에 닿은 곳에 혈색이 피어났다.

“휘국에 있을 때는 이런 거 못 했잖아요. 지금은 훨씬 자유로우니까, 행복합니다.”

온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솔직하게 속닥였다. 류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창피할 지경이었다. 쿵쿵대는 소리가 다 들릴 것 같았다.

온은 점점 빨개지는 류하의 얼굴을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아, 입 맞추고 싶다. 당신에게 입맞춤을 퍼부어 당신의 전신을 내 체열로 덮고, 나 또한 당신께 눌어붙어 영영 녹아내리고 싶어.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그래도 황궁에서는 풍족한 삶이 보장됐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잖습니까.”

오로지 물질과 신체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당신은 내 형의 여인으로 평생 사는 게 훨씬 나았을 거야. 내가 주지 못한 것들을 형님은 당신께 기꺼이 줬겠지.

지아비의 연정을 얻지는 못해 외로웠을지라도, 매일 밤 편안한 잠자리에 들며 내일도 오늘과 같이 평화로울 거라고 확신할 수는 있었겠지.

“그것도 다 옛날 말이죠. 지금 돌아가 봤자 목이 날아가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류하는 연인을 욕망하며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잊고 태연하게 코웃음을 쳤다.

온의 안색이 굳었다. 목이 날아가다니, 농담이나 비유로라도 듣고 싶은 표현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생활에 미련은 남지 않았습니다. 설령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해도, 돌려 달라고 할 생각 없어요. 필요 없어요, 온. 정말 싫었어요. 나도 지금이 좋아요. 정말로, 훨씬 행복해요.”

류하는 다정하게 고백하며 온의 목을 안았다. 포옹은 간격을 좁혔고, 입술이 곧 맞닿았다. 단순히 닿는 데 그치지 않고 맞물리고 파고들며 미끄러졌다.

분홍빛 혀가 촉촉한 단맛을 덧그리며 서로의 안쪽에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그대 말대로, 거기서는 이런 거 못 했잖아요.”

한때 형수였던 여인이 과거의 시동생이던 사내에게 농밀하게 속닥였다.

온은 짐승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들끓는 연심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발이 훅 들리며 땅과 멀어지자 류하는 짧게 신음했다.

“아!”

“송구합니다. 처소로 모셔도 될까요?”

온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류하는 자그맣게 실소했다. 저런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웬 점잖은 척이람?

그의 허울뿐인 정중함을 귀여워하며, 류하는 기쁘게 대답했다.

“제발 모셔 주세요.”

온은 류하에게 입을 맞췄다. 걸음을 성큼성큼 움직이면서도 온은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류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실에 도착했다. 등이 비단 이불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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