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사랑은 그의 마음에 화상보다 진한 자국을 남겼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의 손을 잡고 함께 나락에 떨어졌겠지요.”
그는 진지하게 속삭였다.
우리 중 하나만 낙원에 들 수 있어 류하가 그를 그곳에 떠밀고 본인은 순순히 암흑에 뛰어들었다면. 그렇다면 그도 곧장 뒤따랐으리라.
“글쎄요, 둘 중 하나라도 행복한 게 낫지 않을까요?”
류하는 슬며시 웃으며 온의 손을 꼭 잡았다. 온은 간절하게 깍지를 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함께인 게 낫습니다.”
류하는 범람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해 까치발을 들고 온에게 입을 맞췄다. 온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그러당겼다.
당분간, 숨소리뿐이었다.
“배고프다면서요.”
온이 뒤늦게 속삭였다. 류하는 웃으며 끄덕였다.
“엄청나게 배고파요.”
온은 류하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음식을 해서 가져오겠다는 말에 류하는 온화하게 거절했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요리하는 거 구경하고 싶어요.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죠.”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류하가 방긋대며 놀리자 온은 가뿐하게 대답했다. 류하는 소박한 부엌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분주해진 온을 구경했다.
“그대는 요리하는 모습도 요염하네요.”
류하는 뜬금없이 고백했다. 온은 채소를 썰다 말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당신은 헛소리할 때도 귀엽습니다.”
“헛소리라뇨. 헛소리 아니에요. 귀여운 건 맞지만.”
“뻔뻔한 것도 귀엽군요. 그러니 봐 드리겠습니다.”
“요리에나 집중하세요, 온. 괜히 다른 데 정신 팔려서 칼질하다 다치지 말고.”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진즉에 다 그쳤습니다.”
온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으나, 혹시 몰라 입을 다물고 이후로는 과묵하게 요리를 이어 갔다.
류하는 그가 알맞은 식재료를 먹음직한 크기로 썰어 솥에 집어넣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입술을 열어 나지막이 물었다.
“그대는,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있었어요?”
온은 멈칫했다. 그는 끓는 탕을 휘젓는 척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가 마침내 답했다.
“처음에는 잘못되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부 전선에 도착한 그의 귀에 비참한 소문이 전해졌다.
황실에서 파견해 이쪽으로 오고 있던 토벌대가 도중에 반군의 습격을 받았다더라. 그때 많이들 죽고, 많이들 실종됐다.
서쪽으로 떠난다던 그의 연인은 그곳에 없었다. 이는 그녀가 죽거나 실종된 인원에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으려 애썼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희망의 마지막 부스러기마저 잃은 채 산산이 조각나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들리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황실에서 최전방에 보낸 신통력을 보유한 군인, 게다가 그 군인이 여인이라면 워낙 특이한 이야기라 금세 소문이 퍼졌을 테죠. 그런데…….”
없었다. 아무것도. 그렇다면 당신은 죽었을까. 나 역시 죽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은 너무 일찍 떠난 걸까.
아니면, 당신은 아직 살아 있을까. 살아 있되, 나를 잊었을까.
“당신이 변을 당했거나, 아니면 도망쳤거나. 만약 무사히 도망쳐서 몸을 숨겼다면 어차피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무탈하게 빠져나갔더라도, 대체 어떤 수로 당신을 만날까?
대륙은 너무 넓었다. 언제 어디서 재회하자고 구체적인 약속을 잡은 것도 없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나를 찾다가 지쳐, 한 철의 풋사랑 따위 그냥 마음에 묻고 혼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영영 나를 등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그는 인간의 마음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를 알았다.
비극 속에 엇갈린 행방이 영영 다시 겹치지 않더라도 원망하지는 않았으리라.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를 기억하든 말든,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 주기만 한다면.
“당연히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면 생사라도 확실히 알고 싶어서 전쟁에 관련된 얘기를 쫓아 한동안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기억나더라고요.”
그녀는 아직 그의 형수님이고, 그는 아직 그녀의 시동생일 때.
월국의 풍경과 휘국의 풍경을 비교하며 류하는 말했다. 고국에서도 갇혀 살던 그녀에겐 한 가지 미련이 있다고.
“모친의 고향이 궁금하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났어요.”
<대장군, 그대도 알다시피 내 어머니는 수도 출신이 아닙니다. 수도에서 얼마 멀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나셨어요.
그곳에는 거리마다 꽃나무를 심어 놔서, 봄철에 특히 아름답대요.
언젠가 한 번쯤 꼭 가 보고 싶었는데, 결국 기회를 놓쳤네요.
하하, 그래도 괜찮아요. 여기 황궁의 봄꽃은 고작 그런 마을보다 훨씬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렇죠?
나는 약소국의 공주, 나의 분수를 알죠.
강대국 황제의 후궁으로 선택받는 과분한 은혜를 누리면서도 고향의 작은 촌락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는 않는답니다.>
“만약 당신이 살아서 월국에 돌아온다면 이곳으로 올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류하는 월국에도 휘국에도 애정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월국 왕실도, 자신을 볼모처럼 붙잡아 둔 휘국 황실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추억은 전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거였다.
이따금 류하가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 조각들만으로도 온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했구나.
“당신의 모친이 어떤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곧장 여기로 내려왔죠. 여기서 줄곧 기다렸습니다.”
비록 금지된 연정이었고 훔쳐낸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고 기회를 쥐어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호위를 핑계로 곁을 맴돌며, 비유와 은유를 적절히 섞어 진심을 전했다.
류하는 제 모친에 대해서도 온에게 많은 것을 전달했다. 온은 연인한테서 들은 크고 작은 지식의 조각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중에는 이 마을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전선을 더 맴돌아 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뒤, 온은 목적지를 새로 정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은 여비를 털어 집을 하나 구했고, 기다렸다.
“……휘국 각지를 한참 돌아다녔어요. 처음부터 이 마을을 생각했었는데, 진즉 내려올 걸 그랬나 봐요.”
류하는 후회로 목이 메어 털어놓았다. 그녀는 온을 보며 애처롭게 웃었다.
“그대에게 여기에 관해 얘기한 게 기억나요. 그때는 누가 들을까 봐 제대로 털어놓지는 못했는데, 언젠가는 꼭 와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당시에는 단념했었다. 어머니의 고향에 내려간다니, 황제의 후궁인 내가 머나먼 남쪽까지 멋대로 내려갈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녀는 갑갑한 미래를 받아들였었다.
“평생 조용히 숨어 지내야 한다면 여기서 그러고 싶다고 결정했어요. 여기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휘국도 월국도 둘 다 사실 별로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고향이 더 나으니까요.”
휘국 황궁도 월국 왕궁도 류하에게는 감옥이었다. 그나마 월국에는 나고 자란 정이라도 있으니, 확실히 더 견딜 만하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그런데, 그대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어요. 내게도 고향이 더 친숙하고 안전하듯이 그대에게도 그대의 고향이 훨씬 나을 테니까, 그대는 당연히 제국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한참을 떠돌았는데…….”
온이 얌전히 귀양지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황제의 동생이 귀양길을 이탈하여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휘국에 자자했으니.
휘륜은 휘온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류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륜이 온의 실종 사실을 덮고자 가짜 진실을 만든 거라고, 내 연인은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숨 쉬는 순간마다 되뇌었다.
그토록 애썼건만, 그럼에도 두려웠다.
“어딜 가나 그대가 죽었다는 소문만 들려서, 진짜인 줄 알았잖아요.”
류하는 각혈하듯 고백했다. 굵은 눈물이 진주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온은 류하의 눈물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그는 솥을 휘젓던 주걱을 내려놓고 연인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가 한쪽 무릎을 낮추며 그녀를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류하 님.”
온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류하는 그 다정한 저음이 좋았다. 저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까 봐 밤마다, 낮마다 두렵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나 걱정하게 해 드려서 송구합니다.”
온이 중얼거렸다. 그는 거칠고 따스한 손으로 류하의 눈물을 닦았다.
한때는 그대의 손도 황족답게 곱기만 했겠지. 5년간의 전쟁과 그 후의 무수한 역경으로 인해 굳은살이 불퉁하게 박여 버린 연인의 손을 잡고 류하는 절박하게 입을 맞췄다.
“사과하지 말아요. 살아 있으니 됐어요.”
류하가 자그맣게 울먹였다. 온이 저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속상해서 억지로 미소를 그려 보았다. 그럴수록 온의 마음은 더 깊이 저밀 뿐이었다.
“온, 저거 넘치겠어요.”
“아아, 네.”
류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침착하게 지적했고, 온은 솥의 내용물이 펄펄 끓어 범람하는 참사를 막기 위해 후다닥 움직였다. 그가 입김을 후 불어 아궁이의 불꽃을 누그러트렸다.
“사랑채로 식사를 가져가겠습니다. 거기서 앉아서 쉬고 계세요.”
“나도 도울게요. 식기는 어디 있나요?”
“여기 선반을 열어 보시면 있습니다.”
류하는 냉큼 일어나 착실히 부엌일을 도왔다. 류하가 수저를 잘그락댈 동안 온은 그릇에 음식을 옮겨 담았다. 류하가 문득 피식 웃었다.
“이러니까 우리, 꼭 부부 같아요.”
“부, 부부요?”
온은 떠듬떠듬 되물었다. 그의 뺨에 장밋빛이 번졌다. 그녀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왜, 아니에요?”
류하가 생글거리자 온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아, 위험하다.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류하는 온의 회피를 보고 한층 놀리고 싶은 마음에 성큼 다가갔다. 간격이 좁아지고 향기가 끼치자 온은 작게 움찔했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요, 온. 이미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한 사이에.”
류하가 속닥였고, 온은 그녀를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그러다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상체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고백했다.
“계속 그렇게 어여쁘게 구시면, 지금 당장 또 덮치고 싶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