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11)화 (111/123)

111화

“당연하죠.”

류하의 말투는 뚝뚝했다. 그녀는 여전히 수치심 때문에 뚱했다. 하지만, 그 뾰로통한 태도 뒤에는 지순한 연정이 있었다.

“오직 그대뿐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고백이었다.

온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가 지금 기뻐서 폭소하고 싶은지, 아니면 감정이 북받쳐 엉엉 울고 싶은지 헷갈렸다. 어느 쪽이든, 전부 류하 덕분이었다.

“영광입니다.”

온이 속삭였다. 직후, 류하를 안은 채 복도에 서서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다시 대낮이 아닌 한밤처럼 농밀하게 숨을 섞길 얼마, 류하가 먼저 호흡 곤란이 와서 헐떡이며 물러났다. 온은 아쉬움을 삼키며 요동치는 열기를 억눌렀다.

“씻어야죠, 류하 님.”

“네…….”

온만 아쉬운 건 아니었다. 다시 불만 가득한 아이처럼 얼굴이 불퉁해진 류하를 보고 온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류하 님. 설마 제게 첫사랑이 따로 있을 줄 알았습니까?”

자신의 짐승 같은 면모를 다스리느라 애쓰던 온은 문득 무언가를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분명 말씀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첫사랑 같은 건 없었다고.”

<그래서, 그대도 단풍잎을 잡으려 할 만큼 간절했던 적이 있나요?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

<……없습니다, 그런 거.>

그때, 산속에서 분명 그리 말했다. 허구의 인물을 첫사랑이라고 둘러댄 류하와 달리, 온은 담백한 진실만을 얘기했다.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우리 그때는 서로 잘 몰랐잖아요. 나도 이상한 말을 했으니, 그대도 온전히 솔직했다고 확신하기 어려웠어요.”

류하는 다급히 변명하며 거듭 얼굴을 붉혔다. 소설 주인공을 첫사랑으로 포장했던 일은 다시 생각해도 창피했다.

온은 류하의 불신이 살짝 서운했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작년 그때와 지금 상황은 서로 너무 달랐다. 정녕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면, 제가 설마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단풍잎을 잡아서 당신께 드렸다고 생각한 겁니까?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는 게 어떤 뜻인지 뻔히 알면서?”

그래, 온은 류하의 불신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는 서운함을 완벽하게 지워 주지 못했다.

설마 그 순간에마저도 의심했던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 혼자 불안해했을까.

온은 오로지 류하를 생각하며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았고, 그녀만을 향한 연정을 담아 그녀에게 단풍잎을 넘겼다.

자기는 류하 이전에 연모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분명 그녀에게 밝혔으니,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할 소지는 전혀 없다고 믿었다.

한데, 이제 와서 내가 그대의 첫사랑이냐고 그토록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묻다니. 온은 꽤 심통이 났다.

“아뇨, 딱히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고요. 그냥, 그때는 뭐든지 확신이 없었어요. 나와 그대에 대해서.”

류하는 나직이 실토했다. 온은 말문이 막혔다. 류하의 눈빛에 슬픔이 깃들었고, 온은 더는 삐쳐 있을 수 없었다.

그 불안을, 그 비애를, 온은 고스란히 헤아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는 인척이었고, 금지된 연정은 우리에게 미래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제 족쇄는 깨졌고, 금기는 사라졌다. 온은 자기 품에 담긴 여인의 말랑한 체온에 새삼스레 감격을 느꼈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온은 진지하게,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다시 류하에게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접촉이었다. 촉촉하고 매끈한 혀는 달콤한 잔향을 남겼다.

“제 마음도 당신과 같습니다, 류하 님.”

온은 고백을 덧붙이며 천천히 걸었다. 목간으로 가는 길에, 그는 부드럽게 약속했다.

“저도 오직 당신뿐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굳이 소리 내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류하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쥐어짜는 대신 온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고, 온은 기꺼이 마주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목간에 도착했다. 온은 류하를 구석에 놓인 의자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온은 아궁이에 불을 피워 목욕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나도 영광이에요.”

연인의 믿음직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류하가 문득 말했다. 온은 맥락을 미처 파악하지 못해 그녀를 멀뚱히 돌아보았다. 그러다 곧, 기억했다.

<오직 그대뿐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입니다.>

그들은 각자 서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뒤집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대방이 전부였고, 그 사실 자체만으로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러니까 감사의 의미로, 지금 입 맞춰도 될까요?”

이건 그냥 핑계였다. 아니, 핑계인 동시에 진심이었다.

류하는 빙그레 웃으며 온을 바라보았고, 온은 연인의 앙큼한 수작에 기쁘게 넘어가기로 했다.

“좋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다 말고 류하에게 성큼 다가갔다. 류하는 약속한 듯 팔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목을 안는 순간, 입술이 포개졌다.

“자, 방금 그건 감사의 의미로 한 입맞춤이고.”

한참 뒤, 류하는 숨 가쁘게 속삭였다. 그녀는 별처럼 불타는 눈동자로 온의 감각을 잠식했다.

“이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이어서 류하는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온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감쌌다.

온이 아까 장작을 만지면서 손에 묻은 숯검정이 류하의 피부에도 옮겨붙었다. 온은 미안해할 틈이 없었고, 류하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깟 숯검정이 무슨 대수랴? 더러워지면 다시 씻으면 될 것을.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며,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반드시 다시 서로를 붙들리라. 그런 마음가짐으로 여태 견뎌 왔다.

한동안 둘 다 서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신을 통해 나눴던 일방적 작별 인사가 영영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었다.

연모하는 여인을 찾아 전선까지 갔다가 그녀의 고향으로 내려온 사내와, 사랑하는 사내를 쫓아 제국을 샅샅이 훑다가 끝내 올바른 목적지에 도착한 여인은, 오랜 인고 끝에 재회했다.

“일단, 씻어야죠.”

마침내 온이 먼저 본연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그의 입술은 이미 자두처럼 부풀어 붉었다. 류하는 그 탐스러운 빛깔을 바라보며 간신히 욕망을 억제했다.

“네, 맞아요. 같이 씻어야죠.”

류하는 음흉하게 말했다. 그녀는 과감하게 탈의했다. 온은 못 당하겠다는 듯 슬쩍 웃으며 본인도 직접 옷고름을 풀었다.

한 쌍의 몸이 포근한 온수에 풍덩 잠겼다. 속옷까지 벗어 던진 그들은 물속에서도 껴안고 숨을 섞었다.

목욕은 완벽한 구실이었다. 아니, 애초에 구실 따위 필요 없었다.

“하아…….”

잔잔하던 수면에 파도가 번졌다. 류하가 가냘픈 교성을 뱉자 온은 전부 받아먹었다. 류하의 등이 욕조 변두리를 꾹 눌렀다.

연정과 욕정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함께 뒤엉켜 녹았다.

연인의 달콤한 입술을 거듭 씹고 핥으며, 온은 물속에서 류하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

한 쌍의 몸이 힘차게 율동하며 열렬한 화음을 쌓았다.

목욕인지 정사인지 모를 활동이 이어졌다. 하나 확실한 건, 그조차도 그들에겐 부족했다.

그나마 만족스러울 때까지 서로를 완전히 탈진시키고 난 뒤, 두 사람은 사랑채로 돌아왔다.

“배고프십니까?”

“죽을 것 같아요.”

“죽는다는 표현은 함부로 쓰지 마시고요.”

류하가 극심한 허기를 호소하자 온은 엄숙하게 훈계했다.

그의 과하게 진지한 태도에 류하는 잠시 입술을 삐죽였으나, 결코 투덜대지는 않았다. 둘 다 같은 두려움을 기억했으니까.

“다과로는 부족하겠군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꽤 잘하는 편입니다.”

“그새 많이 연습했나 봐요. 옛날에는 주방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텐데.”

“굶어 죽지 않으려고 요리하다 보니 어느새 늘었습니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뭐든 다 하게 되더라고요.”

죄인이 되어 황궁을 떠난 뒤로 그는 시종도 호위도 없었다.

그가 곱게 자란 황자님이기만 했다면 퍽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지만, 나름 5년간 최전방에서 굴렀던 그는 비교적 침착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온은 자기가 다시는 황족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살아서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류하의 서신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그 편지의 약속이 이뤄지기를. 우리 둘 다 무탈하기를. 정말로, 고난 끝에 재회가 오기를.

황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연인의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이제 필부의 삶을 살았다.

직접 요리하는 것도, 목욕물을 데우는 것도 이제는 그의 일상에 속했다.

“맞아요. 사람이 절박해지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류하는 부드럽게 수긍했다. 온은 그녀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는 이제 습관처럼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기쁘게 기댔다.

“그래서 그러셨어요? 그만큼 절박해서 제 목숨을 구하는 대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자청하셨습니까?”

온은 원망하면서도 감사했고, 무엇보다 슬퍼했다.

신통력을 지닌 자신이 제국을 위해 뭐든 할 테니 부디 제 연인을 살려 달라고 빌던 류하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선했다.

“그때는 그런 거라도 해야 했어요.”

류하는 다시 눈을 뜨고 고집했다. 돌이켜보면 참 초라한 발악이었지만, 만약 시간을 돌려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하리라.

“그대도, 나를 위해 똑같이 했을 거잖아요. 아니에요?”

류하는 그를 보며 나직이 따져 물었다. 온은 고통스레 눈살을 찌푸리며 내리 그녀의 뺨을 만지작댔다. 류하는 제게 자연스럽게 닿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자기 혼자만 희생했으면 하는 마음도 아마 같을 겁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대도 똑같이 행하지 않았을 거냐는 물음에 결국 반박하지 못했다.

“저는 나락에 떨어져도, 당신은 끝까지 낙원에서 무탈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연인을 나락에 떨어트린 대가로 자기 혼자 낙원에서 노닐기를 바란 적 없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희생을 딛고 혼자 살아남았더라면, 남은 평생 죽음보다도 괴로웠겠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우리 둘 다 낙원에 있기를 바랐어요.”

류하는 다정하게 부인했다. 그녀는 제 뺨을 감싼 온의 손을 끌어다 따뜻한 손끝에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살결을 비비자 온은 몸속이 뜨거워졌다.

“우리 둘 다 멀쩡히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만약 우리 둘 중 하나만 낙원에 들 수 있었다면……. 그럼 나는 그대를 택했을 거예요.”

류하는 연인의 손에 쪽쪽거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불꽃을 머금은 눈빛으로 온을 바라보았다. 온은 그 불꽃에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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