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월국의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촌락에는 독특한 사내가 살았다.
아무도 사내의 고향을 알지 못했으나, 그의 생김새나 억양을 근거로 그가 북쪽에서 왔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혹시 그가 휘국에서 온 사람이 아니냐고 몇몇 주민들은 예리하게 숙덕였다. 그런 수군거림이 돌 때마다 이방인을 향한 눈초리는 한층 싸늘하게 식곤 했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도 있었거니와, 휘국은 워낙 오랫동안 월국을 착취해 온 침략국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더더욱 곱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다. 일단, 그는 건장한 청년기의 사내였다.
만약 그가 쇠약한 노년이었거나 비교적 체구가 가냘픈 여인이었다면 괜히 만만하게 여기고 껄렁대는 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의 외향이 적어도 그런 무례함은 억제했다.
또한, 그는 친절하고 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사내아이들을 모아다가 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평소에 그런 기회가 없었던 마을의 평민들은 처음에는 의심하다가도 결국 하나둘씩 자식들을 그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월국에서 여식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려는 자는 적었지만, 이제 웬만한 사내아이들은 그에게 기본적인 학문을 배웠다.
북쪽 어디선가 죄를 짓고 쫓겨난 귀족이 아니겠느냐고 사람들은 추가로 수군댔다.
글을 읽고 쓸 줄 알다니,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는 높으신 분들만 누리는 호사였다.
법적으로 금지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평범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돈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나타난 이 기묘한 사내는 아이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들이 있는 부모라면 그에게 빚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쌀쌀맞게 구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몇몇 처자들은 그에게 남들보다 과한 호의를 보였다. 그는 얼굴이 준수한데다가 명백하게 독신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부 유부녀들과 심지어 사내들까지 흘긋대게 만드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정말이지 그 누구에게도 평균 이상의 상냥함과 정중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여인은 홀로 마을을 방문했다. 여인은 어느 번듯한 기와집 앞을 한참 서성였다.
지금은 잘나가는 식당 및 여관이었는데,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지체 높은 귀족 일가의 집이었다고 한다.
“어이, 안 들어갈 거요?”
여인이 계속해서 대문 앞을 바라보고만 있자 지나가던 사람이 의아하여 물었다. 여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들어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문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담. 문을 열던 사람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는 결국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 저런 미인이 있었나?’
행색은 수수했지만 스쳐본 얼굴은 잊기 힘들 만큼 화려하게 아름다웠다.
그 사람은 의아하여 다시 문을 열고 내다봤지만, 여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여인은 더딘 걸음을 옮겼다. 뛰어가고 싶기도 한데, 몸은 겁먹었는지 느리게 움직였다.
오늘처럼 따사로운 봄날에 오한이 든 듯 춥다가도 지금 자신의 목적지를 생각하면 전신이 불붙은 듯 뜨거웠다.
그러다 결국에는 열기가 범람했고, 여인은 조급하게 뛰었다.
어머니의 친정이 있던 이곳에 들르면서 어느 주막집에서 우연히 주워들었다.
이 마을에 굉장히 잘생긴 외국인 총각이 사는데, 아무리 봐도 옛날에 귀족이었던 것 같다고.
애들한테 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냥 말하는 투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특이하다니까?
특이할 수밖에 없지. 그냥 귀족이 아니라, 황족이었는데.
여인은 숨이 잔뜩 차서 집 앞에 도착했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은 평범한 주택이었다.
대문은 이미 열려 있어서, 여인은 집주인의 초대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무례를 나무라지 않았다.
“온.”
오히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들어선 저 사람이 기뻐서 사내는 달려갔다.
두 사람은 포옹했다. 겨울을 꼬박 지새우고 찾아온 봄날, 재회였다.
사내는 맞은편에 손님을 앉혀 두고 차를 따랐다. 손이 가늘게 떨려서 음료도 흔들리며 떨어졌다. 보다 못한 손님 본인이 찻주전자를 잡았다.
“내가 따를게요.”
류하가 부드럽게 권했다. 온은 순순히 주전자를 넘겨주었다.
류하는 집주인과 자신의 찻잔에 차례로 차를 따르며 굉장히 부담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온이 계속 쳐다봐서,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예뻐요?”
그녀는 어색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짐짓 농담하듯 물었다. 심장이 너무 부풀어 터질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가볍게 깐족거려야 했다.
“네.”
그런데, 온은 그녀의 기대를 박살 냈다. 류하는 차를 따르던 것도 잊고 덜컥 굳어서 온을 쳐다보았다.
“정말 예쁩니다.”
온의 말투는 진지했고 그의 눈빛은 뜨거웠다. 류하는 연못 밖에 던져진 금붕어처럼 뻐끔대다가, 순간 참사를 깨닫고 짧게 절규했다.
“꺄악!”
“잠깐만요, 행주 가져오겠습니다.”
바보처럼 멍하니 주전자를 기울인 채 있다가 차가 식탁 위로 콸콸 흘러넘치는 사고를 냈다.
온은 잽싸게 일어나 행주를 갖고 왔다. 류하는 격하게 창피해하며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내, 내가 닦을게요.”
“제가 닦겠습니다. 손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래도 내가 쏟은 건데…….”
“당신은 그냥 반성하며 계십시오.”
온은 말로는 엄숙하게 나무라며 눈으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류하는 잠시 뾰로통하게 있다가, 결국 이기지 못해 마주 웃었다.
“처음부터 너무 칠칠치 못했네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씨, 너무해.”
“사실이잖습니까. 부인할 생각은 마십시오.”
“부인할 생각은 없는데, 너무 야멸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매정한 내용 외에는 내게 할 말이 없나요?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데.”
류하는 투정을 부렸다. 형식은 투정이었지만, 유치한 표면을 한 겹 벗겨 내면 그 아래에는 간절한 애원이 있었다. 온은 전부 알아들었다. 본인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할 말이 왜 없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어요?”
온이 속삭였다. 그는 차에 젖은 행주를 느리게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뜨거운 눈으로 류하를 바라보았고, 류하는 그 바닥없는 열기에 잠겨 녹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뭘 먼저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도 않아요. 제가 지금 대체 무슨 태도를 보여야 할지, 어떤 감정이 앞서는지도, 저는 잘…….”
온은 횡설수설했다. 류하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식탁 위로 상체를 기울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온은 눈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달콤한 숨결에 갈급한 혀를 풍덩 빠트리자 습하고 애틋한 열기가 온몸을 잠식했다.
류하는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온은 목마른 사람처럼 매달렸다. 그는 그녀의 목을 애타게 감싸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식탁이 성가셨다. 방해물은 이제 지겨웠다.
그는 한 손으로 류하의 뒷머리를 감싼 채 나머지 손으로 식탁을 거칠게 밀어 치웠다. 잔이 흔들리며 차가 다시 쏟아졌지만, 온은 개의치 않았다.
“어어, 음, 저기요, 온?”
류하는 조금 당황해서 불렀다. 물론, 절대 싫은 건 아니고.
하지만 자신은 이 사내와 할 말이 산더미인데, 지금 이자는 대화의 의지는 조금도 없이 오직 핥고 물고 쓰다듬기만 하니, 조금 난처했다.
온의 이성은 그에게 배려를 촉구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제게 왔으니 그녀에게 맞춰 주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너무 오래 굶주렸다. 몸도 마음도 너무 폐허처럼 메말라서 당장 단비로 적셔 주지 않으면 허물어져 영영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여인이 정말로 살아서 제게 돌아왔음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지금 멀쩡한 체온을 지닌 사람으로 제 품에 안겨 있음을 거듭 확인하고 싶어서, 자꾸만 깊숙이 입을 맞췄다.
‘에라, 모르겠다.’
류하는 이성적인 대화를 포기하고 온이 원하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어차피 본인도 꿈꾸던 일이었다.
고독과 금욕의 시간은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심신의 모든 부분이 서로를 갈망했다. 둘 중 아무도 참지 않았다.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고, 양쪽 다 더는 참을 의지도 없었다.
벌건 대낮이었지만 어차피 집에는 단둘이었고, 문은 진즉에 잠가 놨다.
온은 류하와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 수평을 만들었다. 류하는 온의 입술을 오물대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웠습니다, 류하 님.”
그가 불러 주는 제 이름이 좋았다. 류하는 벌써 전율에 관통당한 듯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우는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류하는 다시 입맞춤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온의 옷고름을 움켜잡았다.
“저기, 류하 님.”
“쉬이, 꼭 지금 떠들어야겠어요?”
“나름 중요한 겁니다.”
“중요하다니까 들어 보죠. 말하세요.”
“저는, 그러니까, 어, 처음입니다. 그래서, 그……. 잘 못할지도 몰라요.”
온은 새빨개진 낯으로 속닥속닥 고백했다.
류하는 산딸기처럼 변한 제 연인의 잘생긴 얼굴을 끔뻑끔뻑 쳐다보다가,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맑게 폭소했다.
“웃지 마십시오.”
“웃기면 웃어야죠. 아, 귀여워라.”
“저는 지금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당한 느낌입니다.”
“설마요. 그대의 존엄성은 여전해요.”
“류하 님, 지금 꼭 떠들어야겠습니까?”
“음, 그건 아니에요.”
“그럼 하던 거 마저 하겠습니다.”
온은 거창하게 선포한 뒤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류하는 혀뿌리에 휘감기는 달착지근한 혀끝을 느끼며 달아오른 몸을 거듭 달싹거렸다.
온의 손이 류하의 허리를 쓸고 흉부로 올라와 드디어 옷고름을 조급하게 풀어 버렸다.
속옷의 보드라운 천까지 걷어 내고 나자 그보다도 훨씬 보드라운 속살이 드러났다.
“아름답습니다.”
온이 속삭였다. 류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곱게 웃었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뻔뻔하게 자찬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손을 날렵하게 놀려 온의 탄탄한 근육을 에워싼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치워 버렸다.
“그래도 그대가 말해 주니 기분이 좋네요.”
이번에는 온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웃느라 둥글게 휜 입술을 그대로 맞붙이며 계속해서 서로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