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온은 검에서 피를 털지 않고 죽은 자객의 옷에 문질러 닦았다. 핏방울이 저를 쫓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까 봐 흔적을 남기기 두려웠다.
‘제발, 이제 포기해 줘.’
온은 뭉툭하게 날이 선 눈빛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발치에는 또다시 시체가 있었다. 세 번째 자객이었다.
처음에는 여섯 명, 나중에는 세 명, 이번에도 세 명이 쫓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총 열두 명을 죽였다.
‘제발, 이제 그만, 좀…….’
죽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죽이고 싶었던 적도 없다.
전쟁터의 기억만으로도 끔찍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이야.
태자 시절에는 검술에 소질을 보여 귀재라 칭찬받았고, 장수 시절에는 명장이요 영웅이라 칭송받았다.
지금 그 눈부신 재능의 결과가 눈앞의 시체들이라면, 아쉽지는 않을지언정 별로 기쁘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그냥 날 좀 놔줘.’
온은 형님에게 애걸하며 다시 걸음을 틀었다.
어설픈 우애로 5년간 제게 자비를 베풀다가 이제 와서 열두 명의 목숨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저를 죽이고자 하는 형을 연민하며, 조롱하며.
당신이 진즉 나를 죽였으면, 적어도 저 열두 명의 목숨값이 내 죄로 돌아가진 않았겠지.
그러나 그것도 치졸한 원망일 뿐이었다. 정 업보를 쌓는 게 두려웠다면 온 스스로 자객들 손에 얌전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남을 죽이고 자신을 지키기로 선택한 건 온 본인이었다.
그런즉 지금도, 온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온의 간절함이 통했나 보다. 아니면, 인력을 아껴 쓸 줄 아는 륜이 더는 덧없이 자객들을 잃는 게 아까워서 동생에게 사람을 보내는 일을 그쳤을지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후로 자객들의 추격은 없었고, 온은 방해받지 않고 말을 몰았다.
온은 죽은 자객들의 말을 번갈아 이용했고, 제 여벌옷을 팔아 여비를 마련했다.
폐위된 황족이 원래 귀양지로 갖고 가려던 옷은 전부 문양은 수수할지언정 고급 무명이고 비단이라 길목에서 상인들에게 팔자 꽤 값이 두둑했다.
온은 전쟁의 소식을 쫓아 경로를 정했다.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제국 전체가 반란에 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이러다 정말 나라님이 바뀌는 거 아니냐고 수군대다가도 너 반역자로 몰려 죽고 싶냐고 한바탕 난리를 듣다 보면 다들 입을 봉했다.
그렇게 입을 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과 추측과 불안과 기대는 수군대는 혓바닥을 통해 부지런히 전해졌다.
온은 그 모든 얘기를 귀담아들었다.
종합해서 판단하자면, 둘 중 어느 쪽도 그리 유리하거나 불리한 쪽이 아닌 듯했다. 막상막하랄까. 그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은 균형이었다.
온은 형님의 승리를 빌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휘결의 군대를 편들지도 않았다.
그 누가 이기든 온은 죄인이었고, 어느 쪽이 승리하든 피바람이 부는 건 마찬가지였다.
부디, 아무나 이겨도 좋으니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어서 정리되기를.
그리고 부디, 당신이 살아 있기를.
아아, 당신은 대체 어디 있어? 살아 있기는 해? 서부 전선으로 보내진 게 맞아?
아무리 주막에서 식사하는 척하며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주워듣고 상인들을 매수해 은근슬쩍 떠봐도, 알 수가 없어. 소식이 들리지 않아. 답답하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도깨비의 힘을 갖고 관군 편에서 싸우는 정체불명의 여인에 대한 소문 한 가닥이라도 퍼졌어야 정상이거늘,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치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이미 지워진 것처럼.
그리고 그게 온의 가장 큰 공포였다.
온은 드디어 서부 전선에 도착했다.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근처 마을에 숨어들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혹시 몰라 거듭 질문했고, 그 답을 들었다.
전선의 군인들과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 왕래가 잦았다.
다친 군인들이 조용한 환경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면 마을로 옮겨지기도 했고, 현지에서 조달된 군량미는 이 마을을 거쳐 군인들에게 보내졌다.
그런즉 몇몇 주민들도 이미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이쪽에 파견된 토벌대에는 원래 신통력을 쓰는 여인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워낙 비밀에 싸인 존재라 아무도 정확히 아는 건 없는데, 아마 죽었을 확률이 높다고 사람들은 쑥덕댔다.
왜냐하면, 토벌대가 여기 오던 중에 산길에서 습격을 받았거든. 그때 그 여인은 실종됐대. 감쪽같이 사라졌다나, 뭐라나.
그런 얘기를, 온은 고스란히 주워들었다.
흐려진 의식 너머에 꿈이 있었다. 류하는 그 꿈을 따라 부유했다.
어머니도 지나갔고, 제하도 보였다. 수연과 훤아가 번갈아 넘실대더니, 그립고 그리워 차라리 괴로운 얼굴이 보였다.
그러다 류하는 낯익은 듯 낯익지 않은 얼굴을 마주쳤고, 질색했다.
상대방은 낮게 웃었다. 저를 보고 벌레를 만난 것처럼 식겁하는 표정이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나 보다.
“동족님, 너는 싸가지가 너무 없어.”
낯익고도 낯선 존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열병에 짓눌려 신음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요동쳤다. 산에서 굴렀던 게 기억났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나 없었으면 이번에도 죽을 뻔했는데, 고작 그런 표정으로 보지는 말아 줄래?”
동족이 쓰는 힘의 부름은 불가항력이었다.
반군에 합류하기 위해 산속을 가로지르다 또 우연히 만났고, 우연은 운명처럼 끌어당겨 결국 겹치는 시간을 빚어냈다.
거의 일방적인 재회였다. 류하는 상대방을 사실상 알아보지 못했다. 류하는 고열에 시달렸다.
옥사에 내리 갇혀 있다가 풀려나자마자 토벌대에 강제로 합류했고, 험한 산길로 다니다가 도망치던 와중에 굴렀다. 곱게 큰 공주님의 몸은 감당하지 못했다.
한계치 이상의 역경을 거친 그녀는 골고루 상처를 입었고, 망가져 버려진 인형처럼 가까스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바로 그런 그녀에게 인간과 도깨비가 다가왔다. 주안은 또다시 의도치 않게 마주친 반쪽짜리 동족을 위해 서슴없이 몸을 낮췄다.
“도깨비 피는 귀하니까, 살려 주는 거야.”
너를 모시던 대장군이 내 몸에 청자초를 박고 내 연인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연좌제로 너 역시 그냥 죽여 버릴까 고민하기도 했으나.
네 몸속에 흐르는 별빛 같은 피가 내게는 너무 중해서, 결국 부서진 너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떠난다.
류하는 눈을 떴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아직도 숲속이었다.
나뭇가지에 엉킨 머리카락, 흙투성이가 된 신발, 피가 묻은 옷까지 전부 그녀가 매우 험한 꼴을 당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몸은 가뿐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더는 없었고, 손발도 청결하지는 않을지언정 더는 긁힌 상처 없이 매끈했다.
류하는 혼란을 느꼈다.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민하기보다 행동하기 원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신열과 사투하며 그녀는 내내 한 명의 얼굴을 애타게 그렸다. 그 얼굴의 주인을 찾아, 그녀는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혹시 마주칠지 모를 산짐승이나 산적이 두렵지는 않았다.
이제는 필요하면 필요한 대로 마음껏 힘을 써서 자신을 지키기로 했으니, 적어도 물리적 위협이 그녀를 심각하게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자,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 넓은 세상에서 어디로 향해야 소중한 그대를 만날 수 있나.
류하는 생각해 둔 목적지가 하나 있었다.
제16장. 어여쁜 손님
가을이 깊어지더니 거짓말처럼 겨울이 왔고, 겨울은 새해의 흐름과 맞물려 곧 봄철에 밀려났다.
북쪽에서는 조금 늦게, 남쪽에서는 조금 빠르게. 어쨌든 봄은 봄이었다.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쪽 월국의 사람들은 전부 안도로 한숨지었다.
제국에서 전쟁에 쓴답시고 온갖 생필품을 조공이란 명목으로 거듭 뜯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제국이 조금 작아졌으니 그 강대국의 연놈들도 기세가 약간은 죽어 우리를 덜 괴롭히지 않을까, 월국을 비롯한 수많은 작고 약한 나라들은 감히 희망해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은 작아진 게 아니라 갈라진 거였다. 휘륜 황제와 휘결 황제가 협상한 결과였다.
딱 봐도 어느 한쪽이 절대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 너무 길게 이어지자, 이렇게 천천히 군인들만 소진하느니 적당히 선을 긋자고 두 황제는 동의했다.
순전히 파괴력만 따지자면 휘결의 군대가 훨씬 강했다.
대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종족이 휘결의 군대와 일부 합류했고, 그들은 인간들에게 생경한 방식으로 적군을 깨부수며 아군의 승리에 적잖게 보탰다.
하지만, 휘륜이 이끄는 관군은 훨씬 숙련된 자들이었다.
즉위 직후 5년간 휘륜은 정복전쟁을 핑계로 제게 충성하는 군대를 기르며 반대파를 숙청했고, 본인도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와 그의 장수들은 이종족의 등장에 겁먹지 않고 훨씬 교활한 전술을 짰고, 때로는 신식 무기로 적군을 위협하며, 때로는 그저 절대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며 꾸준히 승리를 거뒀다.
명분 면에서도 둘은 비슷하게 갈렸다.
휘결은 휘륜이 아비를 죽이고 즉위한 패륜아이자 천첩의 소생이라고 매도했고, 휘륜은 머나먼 방계 황족 따위가 어찌 보위를 탐내느냐며 비웃었다.
그토록 매도하고 비웃고 죽이고 부순 결과, 거듭되는 전투와 북방의 혹독한 겨울에 질려 버린 그들은 끝내 평화 협정을 맺었다.
우리 중 하나만 꼭 황제를 해야 해? 이렇게 땅덩이가 넓은데.
궁색한 미봉책이긴 했으나, 휘륜과 휘결은 휴전선을 그었다. 일종의 임시 국경이었다.
휘륜은 휘결에게 성 몇 개를 떼어 주며 제발 작작 좀 기어오르라고 타일렀다. 현명한 휘결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대신 협정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대륙 남쪽에 봄빛이 완연한 지금, 북쪽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깃들었다.
북쪽에서 왔으나 지금은 남쪽에 사는 사내는 그 모든 소식을 조심히 귀담아들었다.
또한, 이곳 월국 사람들에겐 훨씬 덜 중요하나 제게는 몹시 중요한 몇 가지 사실도 그러모았다.
첫 번째, 황태후에 관한 내용이었다. 휘륜 황제의 계모.
태후의 아들이 감히 귀양길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죽음을 청한 신하들이 몇몇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거부했다.
이미 전쟁 때문에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법적 어미를 죽이기까지 했다간 정말 일이 시끄러워질 거라는 이유로.
두 번째, 황자의 탄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황후가 드디어 황제의 적장자를 낳았다고 한다.
사내는 자신의 형과 형수와 조카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