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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07)화 (107/123)

107화

진즉 이럴걸. 진즉 이렇게 용기를 낼걸. 나는 과거의 태자로서 귀한 수업을 숱하게 받았으나, 결국은 헛똑똑이였다. 스물두 살 먹은 애송이였다.

가늘고 긴 삶을 도모하고 황실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너무 오래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연인을 애타게 그리는 지금에야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부터 내 길을 갈 테니 너희도 어서…….”

온은 스스로 말을 그치며 검을 뽑았고, 시종과 호위 무사가 서로 다른 의미로 경악하는 순간, 허공을 사선으로 그어 화살을 막았다.

“숙여!”

온은 급히 명령하는 동시에 칼을 다시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다. 자객들이었다. 애초에 그를 보내 준 쪽은 그를 끝까지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이제 와서 형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든가, 형수님께 증오를 품는다든가, 결국 류하는 이용당한 것뿐이고 개죽음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분노하기도 전, 온은 일단 뛰어내렸다.

온은 말에서 내리며 말의 다리를 그었다. 칼에 베인 기마가 고통을 느끼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히히힝, 하는 괴로운 소리와 함께 말이 허공에 헛발질을 하자 말의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고도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던 화살들이 말의 몸에 푹푹 박혔다.

“가, 어서!”

온은 낮은 곳에서 부하들에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의도한 대로 말이 방패 역할을 해 줬으니, 맞은편의 자객들이 활을 재장전할 동안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호위가 고집했다. 온은 그를 올려다보며 부서질 듯 웃었다.

그 찬란하고 처연한 미소에 무사가 잠시 마음을 빼앗긴 사이, 온은 검집으로 말의 옆구리를 날렵하게 쳤다.

“가.”

호위 무사가 타고 있던 말이었다. 온이 충격을 가하자 기마는 반사적으로 콧김을 뿜으며 냅다 땅을 박찼다. 무사는 본능적으로 고삐를 잡았다.

“대장군님……!”

“너도 가.”

온은 시종을 다그쳤고, 시종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용서하십시오.”

시종은 탁하게 빌었다. 그는 온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호위를 따라 말을 몰았다.

온은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쉽거나 약속하지 않았다.

“용서할 것도 없어.”

온이 중얼거렸다.

몰락한 태자를 섬길 만큼 박복한 너희였으나, 우리 이제 서로 탓하지 말자. 살아남는 것만이라도 벅찬 순간이라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시간조차 아깝기에.

불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온은 심호흡했다. 둘, 셋, 넷, 다섯 명? 여섯? 온은 소리로 숫자를 가늠했다.

하여튼, 확실한 마무리를 선호하시는 형님답다. 나 하나 죽이겠다고 이리 불균형한 인원수를 보내셨으니.

온은 자기 대신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죽어 가는 말의 가련한 숨소리를 들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위해, 그는 해내야 할 게 많았다.

류하는 수도에서 출발한 토벌대 원군에 몰래 사람을 심어 자신을 꾸준히 돌봐 주는 미지의 사람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서쪽으로 이동하는 내내 군졸들은 낮에 류하에게 청자초를 먹였고, 그 청자초는 온종일 류하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나마 저녁 식사 때마다 누군가 류하의 죽 그릇에 알약을 숨겨 놓는 덕에 류하는 밤에라도 괴롭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동 사흘째, 류하는 밤에도 고통을 감내하기로 선택했다.

류하는 세 번째 발견한 알약을 먹지 않았다. 대신 몰래 찢은 옷 조각으로 약을 돌돌 감싸 품에 고이 숨겨 두었다.

약을 아껴 놔야 했다. 순간의 통증을 참고자 해독제를 그때그때 삼켰다가는 나중에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이 황궁을 떠난 시간을 계산해 본 류하는 지금쯤이면 온이 도성을 벗어나고도 남았으리라고 판단했다.

자, 이제 내가 건방지게 도주를 시도한다 해도 황제가 당장 온을 해치지는 못하겠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따라잡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어차피 륜이 동생을 해치고자 했다면 이미 일을 끝내고도 남았으리라고 류하는 생각했다.

가련한 우애에 묶여 이전에는 동생을 미련할 정도로 싸고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면 질질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냉정한 황제니까.

그러니, 류하도 질질 끄는 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온은 이미 죽었거나, 륜이 그를 당장 해치지 못할 만큼 물리적으로 멀리멀리 벗어난 상태다.

여기서 류하가 황제를 거역해 봤자 온의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황궁을 떠난 지 이레째 되는 오늘 밤, 나흘째 아껴 둔 해독제 중 하나를 방금 삼켜 통증과 현기증이 거의 잦아든 지금.

“야, 진짜 이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미친놈아. 지금이라도 그만둬.”

“그래도, 살짝 보는 것 정도는…….”

“어휴, 겁쟁이들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밖에서 나지막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마차 안에 웅크려 잠든 척하던 류하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측간을 핑계로 살짝 나가 기회를 엿보다가 도망치려고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바깥에서 군졸 서너 명이 두런대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일단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야, 비켜. 내가 먼저 한다.”

남들보다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탁, 열렸다. 류하는 움찔하며 일어나 앉았다.

“와, 확실히 미인이네.”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 묻어난 추잡한 탐욕은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다.

‘미쳤나?’

류하는 심장이 싸늘해짐과 동시에 상대방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전쟁을 앞둔 군졸들이 종종 음욕에 취해 온갖 개짓거리를 부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폐서인된 죄인이고 약소국 출신이며 폐위되기 전부터 권력이 없었다 해도, 류하는 한때 엄연히 황제의 아내였던 자였다.

그릇된 욕정을 품는 건 양심의 문제고, 후궁 출신의 여인에게 그릇된 욕정을 품는 건 양심뿐 아니라 상식의 문제였다.

만약 들킨다면 강간죄가 아니라 반역죄로 몰려도 할 말이 없으리라.

이 대범한 쓰레기는 그런 위험조차 감수하고 오밤중에 포로의 마차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계집을 품은 지 너무 오래됐다. 게다가 상대방은 월국의 류하 공주, 황궁에 신부로 도착한 때부터 절세미녀로 소문난 사람이 아니던가?

한낱 말단 군졸 따위는 평소에 그녀를 스쳐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고고한 후궁이 비천한 죄수로 전락하면서 둘의 세상이 맞닿았다.

사내는 그 사실에 저급한 희열을 느끼며 여인의 곁을 침범했다. 류하는 그의 난잡한 손길을 피해 벽에 바짝 몸을 붙이며 사납게 씹어뱉었다.

“가까이 오지 마.”

나한테 손끝 하나 댔다가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 놈한테는 그런 경고조차 아까웠다.

죽여 버리겠다고 친절하게 사전에 알려 줄 필요가 있어? 그냥 그때 가서 죽이면 되지.

정욕에 취한 사내는 그저 비웃었다. 뒤에는 그의 동료들이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류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자 다시 구역질을 느꼈다. 이번에 느끼는 메스꺼움은 청자초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군졸은 류하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류하가 비명을 질러 도움을 구할 거로 생각했나 보다.

류하는 소리를 내는 대신 군졸을 움켜잡았고, 그의 머리를 벽에 단숨에 처박았다.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그의 변태 동료들이 기겁하며 절규하는 순간, 여러 소란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반군이다! 기습이다!”

“기습이다, 기습!”

어디선가 화살촉이 허공을 찢으면서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발소리와 고함, 발검하는 쇳소리도 섞였다.

황성을 떠난 뒤 도시나 촌락을 거치지 않고 산속의 지름길로 이동하던 토벌대는 매복해 있던 반군과 맞닥트렸다.

5년짜리 황제는 나라에 적이 많았고, 꼭 륜과 척지지 않았더라도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반군과 손잡은 세력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비교적 황성과 가까운 도시를 근거지 삼고 미리 산길에 군대를 숨겨 놨다가 서부로 향하는 토벌대를 발견하자 열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야영지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었다. 그동안 류하도 몹시 바빴다.

도깨비의 힘으로 변태를 처치한 그녀는 나머지 군졸들을 밀치고 마차 밖으로 탈출했다.

그녀는 품속에 숨겨 두었던 나머지 해독제를 꺼내 세 알을 전부 입에 욱여넣었다. 필사적으로 깨물어 삼키자 쓴맛이 번졌다.

류하는 잠시 진저리쳤다. 직후,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릴 틈도 없이 숲 쪽으로 냅다 달렸다.

“저기 폐궁이 도망간다!”

누군가 류하를 향해 외쳤다. 류하는 섬뜩하게 긴장하며 당장이라도 불꽃을 뿜을 준비를 했으나, 실제로 그녀를 뒤쫓거나 공격하는 자는 없었다.

그녀의 이탈을 목격한 관군은 전부 더 급한 일에 맞서느라 바빴다. 칼과 칼이 부딪쳤고 화살촉이 살을 뚫었으며 몇몇 장막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 혼돈을 가로질러, 류하는 달렸다.

“윽……!”

순간, 무언가 두껍고 질긴 게 류하의 발에 걸렸다. 나무뿌리?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류하는 몸이 훅 꺼지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 굴렀고, 곳곳에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씨…….”

류하는 왕족과 어울리지 않는 비속어를 중얼대며 최대한 빨리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쓸리며 상처가 났는지 손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대를 뒤덮었던 어둠이 지금은 불꽃에 조각나 묽어졌다. 덕분에 류하는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류하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녀는 전장을 둘러싼 시커먼 숲속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곧 나무들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금속음과 고성과 피비린내는 점차 아득해졌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지?’

류하는 헉헉대며 어깨 너머를 흘긋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뛰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까 구르면서 부딪친 무릎이 욱신거렸고 목에서는 피 맛이 났지만, 필사적인 의지가 그녀를 뛰게 했다.

그러다 또다시, 몸이 푹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

사람의 기척을 경계하느라 미처 자연의 위험을 살피지 못했던 류하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가파른 비탈이었다. 위아래가 거듭 뒤집혔다. 온 세상이 곤봉이 되어 그녀의 몸을 퍽퍽 두드리는 것 같았다. 류하는 신음할 힘도 없어 헛숨을 삼켰다.

드디어 추락이 끝났을 때쯤,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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