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우욱, 청자초만 아니었어도…….’
수수한 차림새에 얼굴을 너울로 가린 류하를 마차에 집어넣기 전, 군졸들은 그녀에게 청자초 진액을 탄 물을 먹였다.
류하는 그들이 건넨 게 독인 줄 알면서도 온순히 받아먹었다.
아직 온이 무사히 수도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이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류하는 얼굴을 찡그리며 헛구역질을 참았다.
몸속에 들이부은 독극물을 부분이나마 게워낸다면 조금 편해지긴 하겠지만, 편안함은 찰나에 불과하리라.
류하가 구토했다는 사실을 알면 군졸들이 그녀에게 또 약을 먹일 테니.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더 버티다가, 그러다가…….’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아무리 늦어도 도착한 직후에, 도망치자.
반년 전, 휘국에 끌려오는 내내 생각만 했을 뿐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계획을 마침내 실행할 때였다.
그때는 고국이 마음에 걸리고 대장군이 눈에 밟혀서 실천하지 못했었다.
이제 월국은 류하가 뭘 더 하든 어차피 욕먹게 생겼고, 온은 이미 궁지에 몰린 뒤였다.
‘온한테 가야 해.’
황제와 독대한 뒤 처소에 갇혀 지내며 류하는 그 사람과의 거래를 거듭 곱씹었다.
거래라 부르기에도 너무 초라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일방적으로 뜯기기만 하는 교환이었다.
만약 자신이 전장에서 희생해 온을 구할 수 있다는 굳센 확신이 있었다면, 류하는 기꺼이 죽음을 불사했으리라. 그토록 삶을 사랑하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무리 분석하고 궁리하고 되짚어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륜을 믿지 않았다.
본인도 왕족이라 잘 알았다. 권력의 꼭대기에서 노니는 교활한 작자들은 함부로 신뢰할 대상이 아니다.
황제가 내 신통력은 신통력대로 써먹고, 태중의 황손에게 위협이 되는 온은 어차피 제거하면 어떡하지?
‘온한테 가서, 살아 있으면 함께 떠나고.’
류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죽음과 죽음은 달랐다.
‘만약 죽었으면, 나는…….’
내 죽음이 그대를 살린다면 기쁘게 죽겠으나, 내가 비참하게 죽어 봤자 그대가 무사하지 못하다면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랴.
처소에서 류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황제의 뜻대로만 놀아나기가 억울했다.
자기는 얌전히 전쟁터까지 갔는데 륜이 어차피 온을 죽여 버리면 저승에서도 평생 저주할 것 같았다. 륜뿐 아니라,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자기 자신도.
류하는 마음을 다잡고 서신을 썼다.
만약 황제가 자기 몰래 편지를 미리 뜯어본다면 몹시 위험하겠지만, 이미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제 와서 몸을 사리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더는 소심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만약, 그대가, 이미 죽은 뒤라면.’
원래는 그대를 위해 전장에서 고분고분 희생하려 했는데, 이제는 마음을 바꾸어 어떻게든 그대를 찾아가려 한다.
그대는 그대의 형처럼 교활하지는 못해도 그대의 형만큼 영리한 사람이니, 미리 생명의 위협을 직감하고 내가 당부한 대로 도망치기를 바란다.
도망쳐서, 나를 찾아. 나를 만나. 나도 그대를 찾을게. 다시 만나서 사랑할 거야.
하지만 만약에, 그대가 제때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가 온갖 고비 끝에 겨우 찾아낸 그대가 살아 숨 쉬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 싸늘한 시체라면, 그렇다면…….
“윽.”
류하는 날카롭게 신음했다. 마차가 덜컹, 하고 멈췄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오시오.”
문이 열리고 군졸이 말했다. 류하는 문 너머로 드러난 하늘을 살폈다. 사위는 이미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 예정이요.”
류하가 묻지 않았는데 군졸은 굳이 설명했다. 류하는 차갑게 노려보지도, 알겠다고 인사하지도 않았다. 온을 생각하고 탈출에 대해 고민하는 것 외에는 매사가 귀찮았다.
“음식을 갖다주겠소. 여기서 나오지 마시오.”
군졸은 낮게 경고한 뒤, 돌아서서 뚜벅뚜벅 멀어졌다. 류하는 마차 구석에 웅크려 약속된 식사를 기다렸다.
군졸은 곧 죽 그릇과 숟가락을 챙겨 돌아왔다. 류하는 말없이 그릇과 숟가락을 건네받았다.
‘맛이 좀 이상한데.’
군졸이 사라진 뒤, 혼자 마차 안에서 궁색하게 죽을 깨작이며 류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다소 난폭한 기분으로 묽은 보리죽을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왜 이렇게 쓰지?’
단순히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독특한 쓴맛이 났다. 류하의 찡그림이 짙어졌다.
설마 음식에도 장난질한 건가? 시동생과 놀아난 죄인이라고 조롱하면서?
불쾌한 의심을 품고 죽을 쿡쿡 찌르던 류하는, 문득 숟가락 끝에 걸리는 둔탁한 울림을 느끼고 멈칫했다.
‘이건…….’
류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숟가락을 살살 움직였다. 죽 그릇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자그마한 구체가 표면으로 떠밀렸다.
‘알약? 경단?’
류하는 숟가락에 담긴 밤톨만 한 미지의 물체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하염없는 관찰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않자 그녀는 끝내 혀를 내밀어 밤톨을 살짝 핥았다.
‘으웩.’
썼다. 이질적인 쓴맛의 근원이 밝혀졌다. 이제 류하는 불쾌하다기보다는 당황하여 밤톨을 쏘아보았다. 뜬금없이 이게 뭐지?
‘독약인가?’
만약 독약이라면, 살해 용도는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을 독살이라는 번거로운 방식으로 죽이려고 할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정말 맘먹고 해치고자 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약을 감추지는 않았으리라.
이건 일부러 찾으라고 심어 놓은 약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숨기고, 류하에게만 보이기 위해.
류하는 알약을 쳐다보다가, 모종의 직감을 품고 꿀꺽 삼켰다.
‘윽.’
류하는 몸을 움츠리며 숨을 참았다. 약을 넘기는 감촉이 뜨거웠다.
‘아…….’
한동안 몸속에 불을 놓은 듯하다가, 서서히 통증이 가셨다. 통증과 함께, 울렁거림도.
류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입 안에 남은 역한 쓴맛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을 억지로 삼켜야 할 만큼 속이 메스꺼웠는데, 더는 그러지 않았다.
머리도 쿵쿵 울리며 어지러웠거늘, 더는 현기증도 두통도 없었다.
전부 청자초 진액을 삼켜서 얻은 증상이었는데, 알약을 먹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부작용으로 지독한 쓴맛이 남기는 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해독제를 줬다.
그게 아군의 의도인지 적군의 소행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그녀를 지금 당장은 도왔다. 남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마비시키는 독극물을 분해해 줌으로써.
류하는 저도 모르게 그릇과 숟가락을 꾹 움켜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제게 죽을 가져다준 군졸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는 얼굴인가? 확신이 없었다.
류하는 남은 죽을 꾸역꾸역 먹었다. 더는 메스껍지 않아서,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겨서 더욱 악착같이 영양분을 섭취했다.
아직은 자신이 덫에 걸린 건지 미지의 조력자를 얻은 건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만약 후자라면, 전에 없던 희망이 생겼다.
맛없지만 유의미한 식사를 마친 뒤, 류하는 마차 문을 안쪽에서 콩콩 두드렸다.
수신호를 알아들은 군졸이 바깥에서 문을 열었다. 아까 그릇을 갖다줬던 군졸이었다.
류하가 그릇과 숟가락을 넘길 때, 군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하도 한결같이 조용했다.
문이 다시 닫혔고, 류하는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류하의 머릿속은 처음보다도 시끄러웠다.
도성을 빠져나가기 전, 온과 온의 부하들은 변두리의 소박한 여관에서 묵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관문을 통과하고 눈앞에 산길이 펼쳐지자 온은 심호흡했다. 그가 시종과 호위 무사를 향해 돌아섰다.
“나눠 가져라.”
“네?”
온이 다짜고짜 행장을 풀고 부하들에게 묵직한 꾸러미를 넘기자 시종은 놀라서 되물었고, 무사도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나눠 가지라고. 각자 평생 숨어 살 수 있을 만큼 챙겨.”
온이 서슴없이 포기한 꾸러미의 정체는 고급 비단으로 둘둘 감싼 금괴였다. 유배지로 떠나는 황족에게 관습적으로 주어지는 생활비.
온에게는 처음부터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내가 사라진 걸 폐하께서 알아내면 너희도 몸을 숨겨야 할 테니.”
“대장군님, 그게 무슨……!”
당황한 나머지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왔다. 온의 안색은 변함없었다. 그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는 유배지로 안 내려가. 여기서부터 너희가 알아서 도망쳐라.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온이 류하의 편지를 받고 그녀의 행방을 알아낸 순간부터 내린 결심이었다.
찾아갈 거야. 찾아가야 해. 나 하나 살리겠다고 스스로 청해 전쟁터에 뛰어들다니, 그런 당신을 그냥 둘 수가 없어.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날 겁니다.>
온도 그 사실을 믿었다. 그 사실 하나를 붙들고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 온 모든 신념과 선택을 통째로 부정했다.
그는 원칙을 중시하는 황태자라서, 명령을 따르는 고지식한 장수라서, 어머니를 약점으로 잡힌 효자라서, 삶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여태 치욕을 감내하고 위험을 회피하며 근근이 비굴하게 살아남았다.
패륜을 저지른 형이 충성을 요구하자 충성을 바쳤고 전장에 나가라고 하자 전장에 나갔으며, 이후 제 목숨이 위태로운 걸 알고도 묵묵한 체념 속에 기다리기만 하다가 이제는 유배를 보내면 보내는 대로 떠나려 했다.
그토록 비겁한 평화주의자, 생존이 소중해서 가만히 복종하고 안정을 중시해서 그 소중한 생존마저 포기한 내게, 오직 당신만이 과감한 정열을 가르친다.
황제와 황후가 뜻한 대로 류하를 인질 잡힌 채 순순히 귀양지로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온은 처음으로 그런 종류의 타협을 거부했다.
편지를 받는 순간부터 방향을 틀기로 결심했다. 다만, 시종과 무사와 류하를 위해 적절한 때를 기다렸을 뿐.
자신이 서신을 받자마자 다짜고짜 서쪽으로 달려간다면 그를 감시하던 이들은 당연히 서신의 발신자를 의심할 것이다.
대체 류하가 편지에 무슨 내용을 썼기에 그가 저런 돌발 행동을 보이는지 궁금해할 테고, 끝내 그녀를 쫓아가 추궁한 다음, 감히 도주를 계획한 죄로 죽이겠지.
자신의 아랫사람들도 마음에 걸렸다.
온은 자신이 적어도 황성을 얌전히 벗어날 때까지는 형이 사람을 풀어 자신을 주시하리라 예측했고, 그 전에는 경계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일단 성내를 빠져나와 산길에 진입하고 나면, 부하들은 풀어 주고 자신은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몰 심산이었다.
귀양지가 아닌, 연인을 향해. 사랑하는 사람을 구출해 함께 도망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