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반군 측에서 이종족 대표들과 거래했나 봅니다. 반역이 성공해서 제국의 주인이 바뀌면, 법도 바꿔서 인외 종족의 권리도 보장해 주겠다고.”
급격한 전개였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들의 기준으로는 전혀 급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
“권좌가 탐나서 그런 괴물들을 끌어들이다니, 휘결 그 작자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하여간, 제 몫이 아닌 자리를 탐내는 것들이란…….”
태후는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이를 악물었다.
남의 자리를 탐내는 자, 즉 현 황제에 대한 오랜 분노가 그녀의 눈빛에 진하게 스몄다.
“휘결? 휘결 형님이 반역을 일으켰나요?”
한편, 온은 자신과 륜의 육촌인 휘결을 떠올리고 충격에 빠졌다.
아득한 촌수 때문에 온과 결은 예전부터 서먹했고, 온의 머릿속에 결의 존재감은 매우 흐릿했다.
온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느닷없이 황제가 되겠다며 판을 벌인 셈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뱀 같은 놈이 따로 없지요.”
태후는 혐오로 진저리쳤다.
그녀는 누군가 휘륜을 죽이겠다고 군대를 일으킨 것에 대해 해맑게 기뻐할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반군의 칼끝은 분명히 내 아들에게도 향하리라.
“황실에서 원군을 꾸려 조만간 전선으로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그대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알아는 두세요.”
온은 더는 공식적으로 황족도 장수도 아니었고, 조만간 귀양길에 오를 죄인에 불과했다.
그가 참전할 일도 없을 테고 명령을 내릴 일도 없을 테니, 엄밀히 따지자면 변방의 전쟁은 그와 무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일이 터졌는데 아예 모르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태후는 그간 바깥소식과 단절됐던 아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온은 집중해서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온은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는 생각하느라 바빴다. 고작 며칠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윤을 만나고 도깨비와 싸웠던 시간이 마치 백 년 전처럼 느껴졌다.
“감사하긴요. 더 못해 줘서 미안합니다. 항상, 늘 미안했어요.”
태후는 회한을 담아 고백했다. 온은 엄마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저는 항상, 늘 감사했습니다. 한두 번 인사하는 걸로 모자라요.”
이어서 그는 다시 모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야위고 주름진 살결이 안쓰러웠다.
그는 자신이 떠난 후에도 그녀가 건강하기를, 평안하기를 속으로 거듭 빌어 주었다. 순간마다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다.
엄마와 아들은 그렇게 작별을 나누었다. 그들이 예상한 대로, 마지막이었다.
태후전을 나온 온은 다시 군졸들에게 이끌렸다.
군졸들은 아무 설명 없이 그를 에워쌌고, 온은 그들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다 목적지를 알아내고 정색했다.
“여기까지만 모시겠소.”
황궁의 후문 앞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말 두 필이 준비돼 있었다. 한 필은 온이 탈 용도였고, 한 필은 묵직한 짐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바로?’
온은 잠자코 당황했다. 최대한 빨리 출궁하라는 황명이 내려오기도 했고, 온 본인도 질질 끌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정말이지 이건 너무 빨랐다.
‘아직 류하 님은 어떻게 될 건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다른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태후를 통해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를 모시던 궁인들과 군졸들은 지위가 높은 자면 해임되어 사저로 보내졌고, 비교적 말단이면 다른 주인 밑으로 재배치되었다.
확실히 피바람은 없었다. 황제가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기로 한 것 같았다.
온은 대체로 안도했으나, 그 안도는 아직 불완전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무사하다고 확인받았지만, 단 하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조금 기다리셨다가 떠나시면 되오. 당신을 유배지에서 섬길 자들이 곧 도착할 예정이요.”
나를 유배지에서 섬길 자들? 온은 가볍게 눈썹을 모았다. 그러다 그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쌍의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고, 진심으로 반가움을 느꼈다.
예전부터 온을 모시던 시종 하나와 온이 가깝게 여기던 무사였다.
아무리 폐위되어 쫓겨나는 몸일지라도 한때 황족이었던 체면이 있는지라 최소한의 수행 인원은 붙여 준 듯했다.
“도련님!”
시종은 울먹이며 다가왔다. 호위는 음침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묵례했다.
온은 달라진 호칭에 또 한 번 적응할 틈도 없이 다급한 저음으로 물었다.
“둘 다 괜찮으냐?”
혹시 자신과 엮여 별다른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레 확인하는 어투였다. 무사는 잠잠히 끄덕였고, 시종은 처량하게 중얼댔다.
“뭐,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시종은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들을 둘러싼 황궁의 군졸들을 흘긋했다. 무사는 온에게 한 걸음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도련님, 월류하 공주한테서 서신을 받아 왔습니다.”
온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시종과 무사의 팔에 손을 하나씩 얹고 부드럽게 재촉했다.
“어서 떠나자.”
류하 때문에 떠나기를 주저하던 온은 이제 류하 때문에 서둘러 벗어나기를 원했다.
군졸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서신을 마음껏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온과 그의 부하들은 각자 말에 올라 궐문을 나섰다. 육중한 입구가 엄숙하게 닫혔다. 그들은 곧, 단절되었다.
허무한 결별이었다. 저 황궁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텐데, 온은 연인을 위한 조급한 마음에 일말의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서신에 관한 생각이 없었다면 어깨 너머로 애처롭게 뒤돌아보는 감상적인 짓거리에 빠지지 않았을까. 대신, 그는 곧장 무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신을 줘.”
무사는 말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온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정갈한 종이와 명쾌한 필체가 드러났다. 온은 간절한 마음으로 줄글을 속독했다.
묵독을 마친 뒤, 온은 자신의 정확한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연모하는 온에게.
어차피 이미 여러모로 파국이니, 말머리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어도 상관없겠죠?
폐하께서 그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는 못할지언정 이렇게 마지막 서신을 전할 수는 있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내 부족한 글재주를 그러모아 그대에게 보냅니다.
마지막 서신이라 했죠. 분명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 내가 그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때는 글이 아닌 말로,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는 달콤한 언어로 그리할 테니까요.
나는 서부의 전장으로 떠납니다. 폐하께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내가 적게나마 이어받은 도깨비의 힘을 제국의 군대를 위해 바친다면, 그분이 그대의 생존만이라도 보장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또다시 노골적으로 적겠습니다. 내 두려움이 만약 사실이라면, 여기서 더 솔직하게 적는다고 한들 더 나빠질 것도 없겠죠. 이미 사실상 최악인 상황이니까요.
나는 폐하께서 그대의 생존을 끝까지 보장해 줄 거라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망치세요. 어떤 때에 무슨 수로 그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반드시 살아서 도망치세요.
그대의 목숨을 미끼 삼아 나를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니, 적어도 처음에는 그대를 무사히 보내 주는 시늉이라도 할 겁니다.
이후, 그대의 생명이 위협받기 전에 도망치세요. 도망쳐서 살아남으세요.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가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날 겁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니까요.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매 순간,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혹 그사이 그대의 심경이 달라져 그대가 더는 나를 예전처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서신의 내용은 잊으셔도 좋습니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세요.
그대가 아직 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며, 만약 그대가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대는 끝까지 무탈할 겁니다.
어느 쪽이든 살아가 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내 빈약한 글솜씨가 부끄러울 만큼, 그대를 사랑합니다.
달리 그대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은 이렇게 마칩니다.
부디 평안하기를.]
“도련님. 온 도련님?”
옆에서 시종이 초조하게 불렀다. 호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길 한복판에 멈춰 있었고, 뜬금없이 나타나 거리를 막은 인마 세 쌍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들 한 번씩 눈빛이나 저음으로 욕하며 지나갔다.
본의 아니게 교통 체증의 원흉이 된 온은 종이가 구겨질 만큼 꽉 움켜쥔 채 말 위에 얼어붙어 글씨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저기, 온 도련님.”
시종이 다시 애걸했다. 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벌써 구깃구깃해진 서신을 고이 접어 품에 갈무리한 뒤, 말고삐를 잡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가자.”
시종과 무사는 서신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그들이 물어봤자 온도 답해 줄 의향은 없었다.
온은 자기 때문에 엉망으로 꼬여 버린 혼잡한 거리를 벗어나 사람이 없는 골목을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의 부하들이 뒤따랐다.
<나는 서부의 전장으로 떠납니다.>
그 한 문장이 결정타였다. 다른 건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애절한 고백도, 그간 그의 마음이 식었을까 걱정하는 얼토당토않은 문장도.
온은 결심을 마쳤다. 그는 얼음 같은 가면으로 말을 몰았다.
연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연인과 반대 방향으로. 반란이 일어난 서부가 아닌 동부의 유배지로 가는 길목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통이었다.
제15장. 임의 약속
한때 류하는 자유를 꿈꾸었다. 감옥이었던 별궁에서 벗어나, 화려하지만 쓸쓸한 황궁에서 벗어나 광활한 대륙의 곳곳을 다니는 상상을 했다.
고작 반년 안에 류하는 소원을 대부분 이루었다. 황제의 신부로 간택되면서 월국에서 휘국으로 왔고, 오는 길에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드디어 황궁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래 봤자 이동 수단은 사면이 꽉 막힌 마차라서, 류하는 소원의 성취를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이동 중이면 뭐하나, 바깥 풍경이 안 보이는데.
‘우웩.’
심지어 멀미도 심했다. 월국에서 휘국으로 오는 길에 느낀 건데, 여행은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귀중한 인형처럼 가마로 얌전히 모셔지던 그때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은, 죄인이자 병기 신분으로 짐짝처럼 옮겨지는 지금은 환경이 훨씬 극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