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더 추궁해 봤자 건질 만한 정보가 없음은 명백했다.
아아,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붙잡고 매달려야 내 사랑하는 임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그가 고민하며 고통받는 사이, 온과 군졸들은 태후전 앞에 다다랐다.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온의 심장이 다시 죄책감과 회한으로 조였다.
“온!”
아들이 들어서자마자 노약한 여인은 가냘프게 불렀다.
온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온이라니. 그는 어머니에게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이 없었다. 늘 태자, 또는 황자였다.
“어마마마.”
온은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다가갔다. 드디어, 드디어 당신은 아들의 본명을 입에 담을 자격을 얻었구나.
배 아파 낳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황자라는 이유만으로 존대해야 했고, 엄마는 여느 부모처럼 아들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대신 어린아이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여야만 했다.
강해지세요. 높아지세요. 그대는 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슬퍼도 울지 마시고, 기뻐도 웃지 마시며, 아랫사람이 당신을 대신해 처벌받아도 연민하지 마세요.
그리고 천첩의 피를 이어받은 그대의 비루한 이복형에게 절대, 절대 마음을 주지 마세요.
“어마마마. 송구합니다. 진심이에요.”
내가 태자가 아니고 당신이 황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하고 다정한 모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온은 가정법을 접어 두었다. 그는 오직 실제로 일어난 일들과, 그 일들로 인해 일어난 결과를 직시하며 모친의 야윈 손을 조용히 맞잡았다.
“그대가 송구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건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내가…….”
내가, 차라리 1황자를 진즉 죽여 없앴더라면. 아니면, 그자를 어릴 적부터 친아들처럼 상냥하게 대하며 온전히 나와 태자의 편으로 길들였더라면.
태후는 많은 것을 후회했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집착이 되어 결국 죄책감으로 자랐고, 죄책감은 그녀의 목을 덫처럼 옥죄었다.
“어마마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온은 태후의 자책을 단칼에 부정하며 어미의 주름진 이마에 자신의 매끈한 이마를 기댔다. 체온이 느껴졌다.
“절 위해 늘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는 평생 기억하며 살 겁니다. 평생이요.”
당신은 내 이복형제들에겐 모질어도 내게는 오직 다정했다. 강인한 엄마였고, 믿음직한 스승이었다.
그러니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나는 아들이자 제자로서 당신께 참 많은 것을 받았어.
“앞으로 황궁에 돌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살아 있을 거예요. 어디서든 꼭 천수를 누릴 테니, 어마마마도 걱정하지 마시고 늘 평안하세요.”
온은 엄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그의 약속에는 허세가 섞였지만, 그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온, 나는.”
태후는 고단한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말을 하나도 믿지 못하겠다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작게 흐느꼈다.
“어마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온은 엄마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마치 이제는 자신이 부모고 상대방은 가녀린 아이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신비하면서도 먹먹했다.
“어마마마, 하나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뭐든 물어보세요, 온.”
“월빈이 폐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태후의 울음이 뚝 그쳤다. 온은 자신이 엄마에게 몹시 잔인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분이 출궁하면 어디로 갈 예정인지 아십니까?”
제 아들과 바람났다고 소문난 여인을 어머니가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온은 충분히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후는 눈빛을 무섭게 바꾸며 온의 손을 탁 밀쳐냈다.
“온, 설마 사실입니까? 정말 그 사람이 그대에게 꼬리를 친 거예요?”
꼬리를 쳐? 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불효한 생각을 품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물었다.
“판결이 그렇게 났습니까? 월빈이 저를 유혹했다고?”
“온, 내 말에 대답하세요. 그 이방인 계집이 그대한테 무슨 짓을 했어요, 네?”
점점 말이 과격해졌다. 온은 머리로는 어머니를 이해하며 너무 화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온이 위험에 빠진 데는 류하와의 불륜 혐의가 분명 큰 영향을 미쳤고, 팔은 안으로 굽는지라 태후는 아들을 탓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태후 역시 뼛속까지 제국의 기득권층이었다. 소국에서 끌려온 뒷방 후궁이 원래도 달가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난데없이 그자와 사통했다고 알려지면서 태후는 대혼란에 빠졌다.
처음에 태후는 둘 다 모함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뒤, 월빈이 대장군에게 일방적으로 접근했다고 판결이 났다.
태후는 생각을 싹 바꾸었다. 역시, 그 미개한 공주가 원흉이었어.
온은 모친의 눈빛에 넘실대는 원망과 분노를 보고 한숨을 숨겼다. 그 모든 감정의 뾰족한 끝이 전부 류하를 향함을 알았기에 심히 난감했다.
“어마마마,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호위로서 모셨을 뿐입니다. 만약 저와 월빈의 관계가 지나치게 친밀하게 보였다면 그건 제가 그분의 친절함에 너무 편하게 반응했기 때문일 겁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태후는 심각하게 캐물었다. 그녀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아들이 누명을 썼다고 억울해하며 분노하는 게 아들이 실제로 죄인인 것보다는 나았다.
아들이 결백하면 남을 원망할 수 있지만, 아들이 유죄라면 차마 그를 탓하지 못하니까.
“네, 어마마마. 저도 월빈도 무고합니다.”
온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아, 뻔뻔한 소자를 용서하소서.
“……무고하다, 이거죠.”
태후의 말투가 가라앉았다. 이제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 다른 살기를 띠었다. 온은 엄마의 첨예한 분노가 방향을 바꿨음을 깨닫고 불안을 느꼈다.
“어마마마, 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온은 힘주어 고백했다. 그가 태후를 끌어안았다. 가련한 어미에게 불효자식의 마지막 포옹을 드리며, 그는 전심을 담아 당부했다.
“복수 같은 건 원하지도 않습니다. 어마마마만 제 결백을 알아주신다면 굳이 오명을 씻지 않아도 상관없고요. 저와 무관한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든 말든 관심 없습니다.”
사실, 조금은 신경 쓰여. 아예 무심할 수는 없겠지.
나도 그저 평범한 인간인지라, 아무리 모르는 사람들이라 해도 내가 형수님을 탐한 반역자로 기억되는 건 싫어.
그러나 내 소중한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준다면, 내가 맹세코 형님께 역심을 품은 적 없고 형수님과 부끄러운 짓을 한 적 없다고 믿어 준다면.
그러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하며, 오욕의 무게를 견딜 힘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부디 어마마마의 마음도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로 태후가 황제와 황후를 향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위험한 일을 꾸미다 곤욕을 당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저 가늘게 길고 살아가소서. 그리고 되도록, 행복하게 지내 주세요.
“어떻게, 대체 어떻게 편안하게 살아요?”
태후가 안타깝게 속삭였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아들을 마주 안았다.
“그대와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앞으로 평생, 아마 보지 못할 텐데.”
그리고 나는 그대가 천수를 누리리라는 그 약속을 아직도 못 믿겠어. 태후는 이를 악물어 마지막 진심의 한 조각을 짓씹듯 삼켰다.
“부디 저를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저도 어마마마를 위해 늘 기도하며 꿋꿋이 반드시 목숨 보전하겠습니다.”
온은 다시 허언을 섞어 언약했다. 이후, 그는 그녀를 살짝 밀어낸 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마마마. 월빈이 어디로 떠날 예정인지 말씀해 주세요.”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아들은 엄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 채 그녀를 간곡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궁금해합니까?”
태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들에 대한 불신은 늘어만 갔다.
월빈과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저건 절대,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에서 나올 법한 눈빛이 아니었다.
“저와 연루되어 고초를 당한 사람입니다. 제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알아야겠습니다.”
온은 나직하게 설명했다. 태후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자가 출궁하고 나서 어떻게 될 건지에 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사원에 보내지겠지요. 궁녀들은 그렇게 추측하더이다.”
황실 여인들의 경우, 지아비로 있던 황제나 황자가 죽으면 사원에 들어가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때로는 죄짓고 쫓겨난 황후나 황녀가 유폐되는 곳이 사원이었다.
온은 그럴싸한 추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후조차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발표를 누락한 걸까? 아니면…….’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일부러 숨기는 걸까. 온은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류하가 평소에 황실 내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해도, 시동생과 간통했다는 자극적인 추문에 휘말린 이상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앞으로 류하가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아는 자가 없다니, 이쯤 되자 수상할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으나, 온은 일단 현명하게 포기했다. 어머니한테서도 류하에 대해 얻을 만한 정보는 별로 없는 듯했다.
“온, 그것보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태후가 불길하게 속닥였다. 온에게는 류하가 가장 중요했지만, 태후는 그깟 이방인 계집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에 얼마 전부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북부와 서부에서요.”
“뭐라고요?”
온은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내가 옥에 있던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막으려 하고는 있지만, 반란에 가담한 북부와 서부의 유지들이 있어서 아슬아슬하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도깨비와 달귀신도 목격됐대요. 불여우도요.”
“그게 무슨…….”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도깨비, 달귀신, 불여우. 전부 인간들에 의해 대륙의 역사에서 전설로 밀려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전설이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