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편지 정도는 전해 줄 수 있어.”
그래도, 그는 한 가닥 자비를 베풀었다. 타국에 끌려와 험한 꼴을 당한 스무 살 공주가 불쌍해서. 여전히 동생에겐 마음에 빚이 있어서.
며칠 전 옥중에서 자신을 사이에 두고 각자 상대방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처절해서, 가여워서, 지순해서.
만약 륜이 월빈을 마음에 담았었다면 감히 내 여인을 탐낸 후레자식이라고 온을 미워하는 마음이라도 있었을 텐데, 지금 그는 그저 안쓰러웠다.
륜은 후궁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륜은 오직 화은만 사랑했다.
나는 그 애한테 상처를 주지만 적어도 곁에 있을 수라도 있는데, 공주와 대장군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조차 죄라서, 가련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류하는 자신과 연인의 목숨줄을 쥔 증오스러운 사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말이 아닌 글로 전하는 고별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남으면, 오래 간직할 수 있으니까.
종이가 닳고 먹물이 빛바랠 때까지 두고두고 어루만지며 마음에 새길 수 있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울 때마다 한 번씩 서신을 꺼내 읽으며 나를 기억해 줘.
먼 훗날, 황제가 정말 약속을 지키고 그대는 오롯이 안전해져서 마음에 근심이 없을 때면, 당신의 아픔도 흐려졌으면 좋겠어. 나를 너무 오래 그리워하지는 말아 줘.
종이가 닳고 먹물이 빛바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나를 사랑하고 추억하다가, 낡은 편지를 잊어버리듯 나를 보내 줘.
“나한테 감사해?”
륜은 기괴한 표정으로 물었다. 류하는 씁쓸하게 시인했다.
“네, 폐하.”
나를 신부 삼겠답시고 애초에 억지로 끌고 왔다가 이제는 전장에 나가 싸우라고 독촉하는 네놈을 미워해야 마땅하겠지. 감사하다니,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증오조차 무가치하게 여겨졌다. 당장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게 급하고 내가 과연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감정과 시간의 낭비였다.
그래서 류하는,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해탈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제 전쟁터로 떠나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마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 그런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대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륜이 중얼거렸다. 류하는 대충 칭찬으로 듣기로 했다.
“폐하, 하나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허락하지.”
“저를 모시던 궁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특히, 나와 함께 월국에서 온 애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국 출신 궁인들보다는 고향에서 데려온 사람들이 훨씬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상황이 궁금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았다면 아직 궁에 있는지.
“그대가 폐위되어 월빈전이 폐쇄되면 전부 다른 곳으로 재배치될 거야. 따로 처벌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류하의 근심을 알아챈 륜은 온화하게 달랬고, 류하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 투명한 표정을 보고 륜은 탄식을 삼켰다. 아, 어쩜 비슷한 애들끼리 서로 사랑에 빠져서는.
“감사합니다, 폐하.”
류하는 다시 말했다. 륜은 이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물러나. 따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처소에 조용히 있어.”
황제가 손짓하자 어디에서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모를 궁인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류하의 팔을 하나씩 잡고 일으켜 세웠다.
궁인들은 류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샛길을 따라 대전을 가로질러 후궁전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름길인 듯했다.
류하는 이제 자신이 은폐돼야 할 황실의 치부요, 차마 떳떳이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수치스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황제는 그녀가 폐위될 거라고 했다. 후궁의 지위를 박탈당한 뒤 아마 평민이나 노비의 신분으로, 또는 아예 없는 사람으로 위장되어 군인들 틈바구니에 섞여 전장으로 향하겠지.
그리고 다시는 그대를 보지 못할 거야.
류하는 다시 멍해졌다.
각자 살아 있기만 한다면 길이 있을 거라고 머릿속의 간절한 음성이 미약하게 속삭였지만, 류하는 도저히 그 낙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과연,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온은 몰라도, 나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나는 어떻게 되는데?
설령 기적적으로 파괴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며 이능에 힘입어 끝까지 살아남는다 쳐도,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 내가 ‘쓸모’를 다한 다음에는.
시동생과 바람났다고 소문난 옛 후궁을 휘국 황실이 다시 받아 줄 리는 없다.
월국의 왕 역시 어차피 아낀 적도 없는 출가외인 왕녀를, 그것도 자극적인 추문에 휘말려 황궁에서 쫓겨난 여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
뭐, 사실 나는 그자의 여식이 아니기도 하지만.
류하는 희망을 포기했다. 자신이 이 혼란의 끝에 멀쩡히 살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저버리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별로 기대한 적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흐릿한 낙천은 전부 연인의 안전을 비는 데 쏟아붓기로 했다.
온은 며칠째 바깥소식을 듣지 못했다.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약 한 세기 만에 처음으로 인간들의 대륙에 이종족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도,
월빈이 시동생을 꾀려 한 죄로 폐서인되어 추방령을 받았다는 사실도, 전부 그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며칠간 옥사의 쌀쌀한 밤공기와 연인을 향한 타는 듯한 그리움을 견디며 자중하던 그는 마침내 군졸의 부름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엊그제 류하가 그러했듯, 그는 밖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게 씻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그는 군졸들에게 끌려갔고, 명령을 전하는 신하 앞에 꿇어앉았다.
“휘온은 들으시오. 그대는 오늘부터 대장군의 지위와 황족으로서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고 최대한 이른 시일에 황성을 떠나야 할 것이오.”
황제는 끝까지 동생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가 마지막이었구나.’
온은 며칠 전 옥사에서 제 손에 포개졌던 형의 체열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삼켰다.
함께 수풀에 숨어 길고양이를 구경하던 소중한 유년기는, 그렇게 끝났다.
“태후마마께 작별 인사를 고할 시간을 주겠소. 그러나 그 외에 그 어떤 황실의 인원과도 접촉해서는 아니 되며,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도 그대의 인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소.”
태후마마. 온의 마음이 아프게 쑤셨다. 나의 모친, 나의 스승, 나의 후회, 나의 약점.
때로 불편했고 주로 사랑했으며, 아마도 남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
자신이 정말로 황성에서 쫓겨나 조용한 시골에서 여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은밀하게 타살당하게 될지 온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앞으로도 계속 궁에서 살아갈 어머니와 접점 없는 결말일 것임은 분명했다.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참을 수는 있었다. 온은 자신이 정말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분께 마지막 인사를 올릴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짐과 동시에 홀가분한 기분이 아주 살짝 들었다. 그래. 조금은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온이 어릴 적에 온의 어미는 아들을 군주의 재질로 키워내기 위해 정녕 애썼다.
이미 충분히 빛나는 원석 같은 그를 깎고 깨트리고 다듬어 아비를 뛰어넘는 성군으로 만들고자 했다.
온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렸지만, 때로는 숨이 막혔다.
아장아장 돌아다니던 시절에도 어리광 한 번 허락받지 못했던 것과 이복형뿐 아니라 다른 황자들과도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강요받던 나날이 아이의 어린 마음을 짓눌렀다.
이제 그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때보다 훨씬 강인하며 노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추억에는 이따금 비애가 섞였다.
참을 수 없는 이별은 따로 있었다.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이대로 헤어진다면 견딜 수 없이 그리워 결국 내가 스스로 죽게 만들어 버릴 사람.
‘류하 님은?’
온은 아무라도 제게 다가와 월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았다면 아예 용서받은 건지 아니면 다른 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려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설마, 형님이 거래를 받아들이신 건가?’
온은 창백해졌다. 자기가 황제를 위해 뭐든 할 테니 제발 대장군을 살려만 달라고 악쓰던 류하가 떠올랐다. 그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아니면, 혹시, 벌써…….’
벌써, 죽었다거나. 온은 차마 끝까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온은 꿇려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둔 양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안을 파고들었다.
“이제 태후마마께 안내하겠소.”
속전속결이었다. 지금 당장 가서 태후께 인사를 올리고, 인사를 마친 뒤 바로 떠나라는 뜻이었다.
하긴, 이미 죄인으로 판정된 옛 황족 온을 궁에 오래 둬 봤자 황제에게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온도 굳이 미적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딱 하나, 단 한 사람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다면.
“월빈마마는 어찌 되었습니까?”
온은 결국, 무리수를 뒀다. 자신과 간통했다고 알려진 형수님의 안부를 묻다니, 혐의를 쌍방으로 덧씌우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었다.
다 알면서도, 그는 저버릴 수 없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엮여 어떤 험한 꼴을 당했는지도 모르는데 그저 맹하게 침묵할 수만은 없었다.
“그자는 폐서인되어 현재 처소에 유폐되었소.”
온을 태후전으로 이송하던 군졸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반쯤 말을 낮추는 게 미치도록 어색하다는 표정이었다.
온은 군졸의 거북함을 배려하지 않고 꿋꿋이 질문을 이어 갔다.
“폐서인됐다면, 출궁하는 겁니까?”
“아마 그럴 거요.”
“……월국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거기까지 내가 아는 건 없소.”
군졸은 대답을 회피했다. 실제로 그의 정보력은 제한적이었다. 월빈의 향후 행방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폐위된 후궁을 군대에 욱여넣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황제도 관계자들에게만 넌지시 통보하고 공식적으로는 월빈이 그저 폐위되었다고만 발표했다.
사람들은 간통 혐의를 쓰고 궁에서 쫓겨나는 초라한 이방인 공주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냥, 당분간 떠들다 잊을 것이다.
아무도 류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오직 온만이 그녀에 대해 궁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