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월빈마마, 목욕과 환복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궁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류하의 추레해진 의복을 휙휙 벗겼다.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지나치게 거칠어서 류하는 미친 척하고 얘한테 짜증을 내 볼까 고민했지만, 곧 단념했다.
지금은 욱해서 맞대응할 때가 아니었다. 온의 안부를 알아낼 때까지, 그의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유순해질 예정이었다.
류하는 궁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은 뒤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후궁의 지위와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차림이었다.
하긴, 이 상황에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도 우스울 터. 황제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만 차려입은 뒤, 류하는 궁녀에게 이끌려 길을 나섰다.
륜은 대전의 후원에 있었다. 류하는 그 누가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역시, 그대는 똑똑해.”
륜은 부드럽게 평가했다. 류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흙바닥 위에 몸을 낮춘 채 황제가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손은 다 나았나? 어디 불편한 데는 없었고?”
하지만, 원하는 말은커녕 헛소리만 흘러나왔다.
‘저놈이 미쳤나.’
류하는 땅바닥을 노려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륜은 그녀를 구경했다. 나긋한 말투와 달리 눈빛은 냉혹했다.
“그대를 하옥하고 나서 마음이 안 좋았어. 사실 그대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죄가 있다면 하필 그대의 호위대장이 내 동생이었다는 사실이지.”
황후가 예빈을 부추겨 류하를 이 상황에 몰아넣은 건 류하와 온의 관계를 실제로 의심해서가 아니라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얼굴도 잘 마주하지 않는 두 남녀가 갑자기 정분이 났다고 고발해 봤자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 설득력을 갖춘 모함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필요했다.
온은 호위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류하의 곁을 맴돌았으니, 그사이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말을 지어내기에 알맞았다.
“황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제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공손히 조아린 채 류하는 딱딱하게 말했다.
지금 자신이 뒤집어쓴 ‘죄’가 시동생과 사통했다는 내용이라면, 그래, 내가 어찌 무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실제로 그이를 사랑하는데.
“당당하군. 간통죄를 시인하는 건가?”
륜의 저음이 류하의 정수리를 짓눌렀다. 류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위압감을 떨쳐 내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제가 죄를 시인하고 않고를 떠나서 폐하께서는 저를 무죄로도 유죄로도 만들 수 있지요. 결국 폐하의 뜻에 따른 거 아닙니까?”
당돌한 지적이었다. 권력자의 아집이 공정한 판결을 뒤집고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는 건 역사의 흔한 되풀이였다.
여기서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든 솔직하게 털어놓든 달라지는 건 없다고 류하는 믿었다. 지금 중요한 건 황제의 의지. 류하는 그 의지를 공략해야 했다.
“그러니 폐하, 저를 이용하십시오.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 드리겠습니다. 평생 원하시는 대로 쓰셔도 됩니다. 삶도 몸도 힘도 전부 드릴 테니, 그 대가로 대장군을 살려 주십시오.”
평범하게 욕심 많은 나는 이 세상에 원하는 게 많지만, 만약 그중 단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사랑을 고르리라.
“뭐든 할 수 있어?”
륜의 음성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접어 몸을 낮추고 류하와 간격을 좁혔다.
“정말로, 뭐든지?”
륜은 검지 끝으로 류하의 턱을 밀어 시선을 끌어올렸다. 류하는 황제가 제게 닿는 게 혐오스러웠고, 그와 눈을 맞추는 건 두려웠다. 그러나 반감도 공포도 꾹 참고 고집스레 답했다.
“네, 뭐든 하겠습니다.”
륜의 입매가 삐딱하게 휘었다. 불량하면서도 준수한 미소였으나, 류하는 불쾌감도 설렘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형제는 생김새가 서로 꽤 닮았다.
“그러면 나를 위해, 아니지. 내 동생을 위해 전장에서 구를 수도 있어?”
륜은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류하는 당연히 끄덕이려 했다. 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지옥 유황불 한가운데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그 전에 륜이 먼저 덧붙였다.
“변방에서 시체 떼가 일어나 가축을 잡아먹고 몇몇 성들은 독립을 선포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류하는 순수하게 놀라서 눈을 치떴다. 시체 떼라니, 독립이라니? 자신이 미처 예상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일들이었다. 륜은 조곤조곤 부연했다.
“반란이야. 반란이 일어난 거야. 누군가 나 대신 황제가 되겠다고 이종족과 주술사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륜은 이제 검지뿐 아니라 손 전체로 류하의 턱을 감싸며 지그시 압박했다. 류하는 온을 생각하며 황제의 화풀이를 감내했다.
“어떻게 생각해, 월빈? 나한테는 지금이 기회야. 내 동생이 변방의 반군과 내통했다고 딱 한마디만 던지면 그 애는 끝이야. 어떡할까?”
류하는 이제 하관이 저릿했다. 그러나 륜의 악력으로 인한 통증보다는 명치끝의 고통이 훨씬 심했다. 누군가 숨통을 움켜쥔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대장군을 살려 주십시오.”
류하는 간절히 속삭였다. 륜은 웃음기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제국의 군대가 싸움에 능해도 이능을 쓰는 자들을 상대로는 불리해. 대전쟁 때도 아니고, 그런 자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게 아니니까.”
륜은 류하를 놓아주며 설명했다. 류하는 얼얼한 턱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대가 가. 가서 그대의 알량한 힘을 보태.”
류하는 평생 곱게 자란 왕족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그녀가 전장에서 도움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전선에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 싸우고 있었다.
“거기서 그대가 그대의 쓸모를 입증하면, 글쎄.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휘온을 살려 둘지도 모르지.”
거부할 수 없는 미끼였다. 아쉬운 쪽은 류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신통력을 타고났을 뿐 전투 경험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자신이 과연 제국의 군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상황도 아니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반드시 폐하께 충성을 바쳐서 폐하의 마음에 의심이 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류하는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때 류하도, 륜도 알았다. 분골쇄신이라는 성어에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한다는 뜻도 있지만, 참혹한 죽음의 의미도 담고 있음을.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륜은 여유롭게 답했다. 이 거래에서 주도권을 쥔 당사자였기에 그토록 느긋할 수 있었다.
“지금은 출정 인원을 꾸리는 중이니, 자세한 사항이 확정되자마자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게. 그때까지는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해.”
출정이라. 류하는 담담한 황명에 섞인 그 비현실적인 단어를 멍하니 곱씹었다.
여태 정녕 화초처럼 길러져 괴담처럼 어렴풋이 전해지는 전쟁의 실체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었다.
한데, 그 실체가 이제는 무게를 갖고 그녀를 짓눌렀다.
사람은커녕 벌레 사체조차 징그러워 마주 보지 못하는 그녀가, 제 바보 같은 사랑을 위해 전장을 택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류하는 얌전히 대답했다. 유순한 태도는 체념에 기반을 두었다.
전쟁터에서 어설프게 싸우다 죽든, 황궁에 남아 간통죄로 몰려 죽든, 주어지는 선택지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대장군은 살려 주시는 거지요?”
류하는 조금 더 단단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 내가 이 미친 상황에 처한 한 가지 이유. 온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무릎까지 꿇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나도 따라 죽으면 그만이야.
“그대가 이렇게까지 비는데 살려 줘야지. 나는 거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야.”
륜은 매끄럽게 대답했다. 류하는 그를 빤히 뜯어보았다. 그의 유리 같은 시선에 혹시라도 기만이 있을까 봐 탐색하고 또 탐색했다.
하지만, 만약 저게 가면이라면 그 가면은 정녕 완벽했다. 스무 살 애송이 공주가 감히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나와 내 군대는 그대의 신통력이 필요하고, 그대는 내 모자란 동생이 목숨을 부지하기를 원하는 거지? 바라는 대로 해 줄게. 그 애는 죽지 않을 거야. 남은 평생 다시는 권력의 끝자락에 스치지도 못 할 테지만, 그래도 공기 좋고 물 좋은 어딘가에 끝까지 살아 있겠지.”
륜의 언어는 보드랍게 이어졌다. 류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믿고 싶었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저자는 피바다를 딛고 제위에 오른 교활한 폭군이니, 속지 말라고. 저자가 정말로 온의 생명을 지켜 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끈질기게 속닥였다.
아아, 하지만 어쩌라고. 내가 달리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류하는 전혀 순진하지 않았다. 저 강력하고 영악한 황제가 얼마든지 약속을 깨트릴 수 있으며, 설령 그러더라도 자신은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으리란 것을 뻔히 알았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제게 내밀어진 동아줄이 썩은 줄이라는 합리적인 의심과 별개로, 붙들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약하게 질질 짜고 있다가 온과 함께 처형대로 끌려가는 그때에야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설령 자신은 전쟁터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황제의 얼어붙은 마음에 부디 아련한 형제애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며.
“다만, 다시는 그를 만나선 안 돼.”
륜이 명령했다. 류하는 고통에 짓찢긴 눈빛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보잘것없는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팍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류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이윽고, 미련하게 속삭였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도 안 될까요?”
멍청한 애원이었다. 서로 간통했다고 소문난 두 남녀가 무슨 낯짝으로 애틋한 마지막 인사를 나눌까. 황제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다 알면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안 돼.”
륜의 거절은 합리적이었다. 바람났다고 소문난 제 아내와 제 동생을 사이좋게 만나도록 해 주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