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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01)화 (101/123)

101화

“글쎄요. 아마도요. 모르겠어요. 그날 현장에 있던 궁인들이 말하기론, 월빈의 눈이 청색으로 변하고 청자초에 반응했대요. 그러면 도깨비 혼혈이지 않을까요.”

눈이 파랗고, 귀가 뾰족하고, 초인적인 신체를 자랑하며, 근원이 깨지지 않는 한 영원을 사는 도깨비들.

이제는 전설 속 존재쯤으로만 치부되는 그들의 특징은 비밀스러운 동화처럼 제국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도깨비에게 청자초는 독풀과 다름없다는 사실은 교육 수준이 높은 귀족들에게나 비사처럼 알려진 사실이었다.

훤아와 수연은 그 수준 높은 귀족에 속했고, 하루아침에 궐내에 쫙 퍼진 소문을 근거로 친구 월빈의 혈통을 짐작했다.

“난감하네요. 그것도 하필 도깨비…….”

훤아는 탄식했다. 수연은 동감했다. 이종족 혼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꺼림칙한데, 하필이면 도깨비였다.

그저께, 성내에 도깨비가 나타났다. 듣자 하니, 온 대장군이 역적의 딸과 접촉했던 장소에 이종족과 시체들이 나타나 아수라장을 펼쳤다고 한다.

그 사실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부풀리고 치장하여 동네방네 열심히 퍼트리고 다닌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장내에 퍼져 이제는 궁중까지 잠식했다.

뜬금없이 폭발한 혼란의 한복판에는 무엇보다 생경한 이종족의 존재가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제의 후궁이자 이국의 공주고 시동생과 놀아났다는 여인이 그 존재의 반쪽짜리 동족이었다.

차라리 류하가 그 도깨비와 서로 완전히 상관없는 종족의 핏줄이었다면 파장이 아주 조금 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류하는 그저께 황성 안에 시체 떼를 풀어놓은 미지의 세력과도 연결되어, 온갖 다채로운 소문의 주인공으로 각색되고 있었다.

“차라리 정말로 월빈이 그냥 대장군과 눈이 맞은 거였다면, 어떻게든 변호했을 텐데.”

수연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훤아가 묵묵히 공감했다.

어차피 지금 황제와 황후가 노리는 건 대장군의 목숨이지, 한낱 뒷방 후궁의 생명 따위가 아니다.

둘이 불륜 관계라는 망측한 염문이 전부였다면, 훤아와 수연은 무슨 수를 써서든 류하만이라도 건지려 애썼을 것이다.

“상황이 너무 나쁘죠, 그렇죠?”

수연은 애타게 의견을 구했다. 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최선일지 모르겠어요.”

훤아는 끝내 털어놓았고, 수연은 달리 보탤 만한 말이 없어 침묵했다.

그저께부터 돌아가는 상황이 참 미묘했다. 온에게 불리한지, 륜에게 위험한지, 애꿎은 류하만 목숨이 간당간당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온이 투옥당해서 드디어 대장군이 내쳐지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시체 떼와 도깨비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갑자기 간통죄가 더해지며 이상한 치정이 끼어들었다.

시체 떼와 이종족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에 대해 누군가는 패륜 황제에게 내린 천벌이라고 수군댔고, 누군가는 감히 형수와 놀아난 문란한 대장군 때문에 신들이 노했다고 의심했다.

황제 측에서는 그냥 대장군을 내친 다음 조용히 죽이기만 하면 그만인 문제였는데, 조급해진 황후가 예빈을 움직여 불륜 문제를 투척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 고의로 퍼트린 천벌 운운하는 소문 때문에 상황이 한층 복잡해졌다.

“성빈. 냉정하게 말하자면.”

훤아는 자그맣게 운을 뗐다. 수연은 괴로운 눈빛으로 훤아를 바라보았다.

똑똑하고 현실적인 수연은 훤아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짐작했고, 원망할 수 없었다.

“그냥 앞으로도 가만히 있는 게, 우리 모두에게 가장 나을 거예요.”

여인들의 우정은 소중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소중하지는 않았다.

훤아와 수연은 각자 지켜야 할 친정이 있었고, 훤아의 경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이 있었다.

내가 휘연을 위해 죽는 건 괜찮아도 휘연이 나 때문에 죽는 건 절대 안 된다. 피붙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는, 친구보다 딸을 선택했다.

“그래요. 그렇겠죠.”

이 예민한 상황에 자칫 말을 얹었다가는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수연은 훤아의 뜻을 이해했다. 신중하고도, 비겁했다. 그리고 신중하고 비겁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해비마마.”

옥중에 갇힌 월빈을 모른 척 외면하고, 폐하 또는 황후 전하께 가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기보다는 입 닫고 그저 조용히 지켜보자.

미안해요, 월빈.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우리는 앞으로 그대를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예요. 살고 싶어서. 지키고 싶어서.

그대에게도 분명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의 이기심을 이해해 주겠지.

수연도 훤아도 각자 겁쟁이가 되어, 소중한 이들의 안전을 저울질하며 저릿한 고통을 감내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도에 괴담이 전해졌다.

제14장. 동아줄

대장군과 월빈의 처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皇弟)의 폐위와 후궁의 처벌은 그리 경솔하게 이뤄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심문하며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훅훅 흘렀다.

그사이 륜은 군졸들을 시켜 류하를 독방으로 옮겼다.

현실적으로 며칠 내내 그녀에게 재갈을 물릴 수는 없으니, 그녀가 밥도 먹고 물도 마시면서 온에게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도록 그녀를 아예 연인과 차단된 공간에 처박아 두었다.

류하는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군졸들이 꼬박꼬박 챙겨 주는 식사를 새침하게 받아먹었다.

지금처럼 몹시 심각하고 긴박한 상황에 허기를 느끼는 자신의 동물적인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온한테 식사는 잘 갖다주고 있는 거야? 설마 나만 이렇게 열심히 먹이는 건 아니지?’

조각난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숟가락으로 그릇을 싹싹 긁으며 류하는 궁리했다.

자나 깨나 연인 걱정이었다. 꿈에서도 그가 나와 그녀를 괴롭혔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류하는 숟가락을 움켜쥐고 심호흡에 집중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만약 온이 벌써 사형을 당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기도 같이 죽었거나, 너는 무죄니 어서 나오라고 누군가 진즉 찾아왔겠지.

류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 비참한 상상만 떠올라서 온 힘을 다해 좋은 장면을 곱씹어야 했다.

자유롭게 풀려난 온을 상상했다. 말이 씨가 되고 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믿음으로 사랑스럽게 번지는 연인의 눈웃음을 그렸다.

대장군 자리를 지키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그대가 사지 멀쩡하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다면, 살아가는 내내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행복에 내가 포함되지 않아도 괜찮아.

본인의 안전까지 엮어서 그려 보기엔 류하의 상상력이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 다 살아서 나가긴 어려울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몫의 행운만 남았다면, 부디, 그대가 전부 가져 줘.

“월빈마마, 나오십시오.”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진 목소리. 옥에 갇힌 류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다주는 군졸이었다.

비록 갇히긴 했으나 아직 공식으로 폐위되지 않았기에 군졸들을 계속 류하에게 말을 높였다.

그러나 존대는 형식에 그쳤고, 류하를 내려다보는 제국 군졸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방인 공주에 대해 잔존하던 편견에 시동생과 통정했다는 혐의와 이종족 혼혈이라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현재 그녀를 향한 여론은 몹시 야멸차게 변했다.

류하는 개의치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제국 군졸의 평가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상처받기에는 그녀의 성정이 너무 단단했거니와, 지금은 오직 단 한 사람 외에는 모두가 안중 밖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군졸이 뚝뚝하게 말하자 류하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군졸은 당신이 그런 걸 궁금해할 자격이나 있냐는 식으로 눈을 흘기더니, 여전히 냉랭하게 덧붙였다.

“폐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왜? 나를 죽이려고? 심문하려고? 내가 내 입으로 온과 간통했다고 자백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니면 혹시, 정말, 혹시. 내가 절박하게 부르짖은 거래에 응하려고?

류하의 심장이 희망으로 욱신댔다. 희망은 절망보다도 두려웠다.

만약 당장 여기서 온이 이미 처형당했다는 보고를 듣는다면 비탄은 극심할지언정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냥 모든 의지를 잃고 스르르 무너져 죽으면 그만이니.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 자신에게 잔인할 만큼 애타게 매달려야 했다.

“알겠다.”

류하는 얌전히 대답했다. 여기서 이 군졸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봤자 차가운 눈빛만 짙어질 뿐 별 소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황제에게 나아가 진실을 듣는 수밖에.

군졸은 류하에게 손대지 않고 그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류하는 저항도 도주도 시도하지 않고 고분고분 뒤따랐다.

공중에는 청자초 향이 역했다. 복도에 주르륵 늘어선 횃불은 전부 청자초 기름으로 타고 있었다.

‘대비를 참 철저히도 하셨네.’

류하는 속으로 비꼬며 구역질을 참았다.

군졸은 류하를 목욕간으로 안내했다. 지난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하고 옥사에 처박혀 있던 탓에 류하의 몰골은 퍽 꾀죄죄했다.

이런 꼴로 황제 앞에 나서는 것도 불충에 속했기에, 류하는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목욕이라는 사치를 누리게 됐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궁녀가 와서 시중들 겁니다.”

군졸은 퉁명하게 아뢴 뒤 쌀쌀맞게 퇴장했다. 혼자 남은 류하는 입술을 잘근대며 기다렸다.

‘궁녀라…….’

제하가 떠올랐다. 다른 이들은 어찌 됐을까. 죄책감까지는 몰라도, 책임감으로 마음이 쓰렸다.

‘……무탈하지는 못하겠지?’

모시던 주인이 불륜녀에 이종족 혼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하루아침에 투옥됐는데, 아랫사람들의 앞날이 평탄할 리가. 염려가 요동쳤다.

‘제발,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죽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냥 쫓겨나는 거면 몰라도.

물론 궁에서 내쳐지는 것도 꽤 심각한 처벌이긴 했지만, 어차피 힘도 없던 뒷방 후궁의 하수들 따위, 그냥 대충 살려 주고 알아서 살아가라고 잊어 주면 안 되는 걸까.

문이 열렸다. 류하는 기대감 반, 두려움 반을 품고 돌아보았다.

그러나 목욕간에 입장한 궁녀는 류하가 아는 이가 아니었고, 아까 그 군졸처럼 매정한 표정을 한 제국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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