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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00)화 (100/123)

100화

“아셨죠, 류하 님? 무조건 그냥 살려 달라고 비십시오. 아까 했던 말은 잊어 주세요.”

온은 류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절박하게 청했고, 류하는 매 순간 더욱 어이가 없어 그를 힘껏 쏘아보았다.

장난하나? 내가 저딴 구걸을 듣고 흔들릴 거로 생각했다면, 그건 그냥 내 성격 파악이 덜 된 거다.

하지만 류하는, 결코 온에게 오래 화내지 못했다. 그를 미워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달콤한 궤변을 이어 가면 이어 갈수록 홀린 듯 그의 음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단어 하나라도 놓치는 게 아까워서.

차라리 혀가 재갈에 눌려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런 물리적인 방해조차 없었다면, 얼결에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절대, 절대 그대의 저 고결하고 같잖은 청을 따를 마음이 없다고.

혼자 살려 달라고 빌다니, 그렇게 그대를 버리다니. 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이라, 절대로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은 못 해.

연모하는 그대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나의 사랑에 따라 그대를 살리려 해.

한쪽은 속삭이고 한쪽은 다짐하며, 그렇게 하루를 흘려보냈다. 옥중의 낮은 밤으로 저물었다. 그러는 내내, 그들은 함께했다.

궐내가 발칵 뒤집혔다. 워낙 자극적인 소문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숙덕대기 좋아하는 궁인들은 입에 침이 마를 틈이 없었다.

온 대장군이 역적의 딸을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대장군과 후궁 하나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추문이 쫙 퍼졌고, 문제의 후궁은 기괴한 힘을 드러내 후궁전을 박살 낼 뻔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하나씩 천천히 터트렸어도 전부 묵직했을 폭탄이거늘, 이렇게 한꺼번에 폭풍이 내리자 사람들은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소문들에 나름 중요한 조연으로 얽힌 예빈은 월빈이 투옥된 다음 날, 자신의 처소에 해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빈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마마, 우리가 먼저 마마께서 오셨다고 고하겠습니다! 부디 예를 갖춰 주십시오.”

“어어, 성빈, 제발 침착하세요!”

한마디로 난장판의 소리였다. 하빈은 눈살을 찌푸렸고, 예빈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곧 누군가 황소 같은 기세로 들이닥쳤다.

“뚫린 입이라고 그딴 무고를 해요?”

수연은 예빈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씹어뱉었다. 그 무례한 첫인사를 차마 나무랄 자는 이곳에 없었다.

“무고라니. 보통 사실대로 일러바친 걸 무고라고 하진 않지요.”

예빈은 핏기를 잃고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 싸늘하게 받아쳤다.

황후에게 협박당하고 황제에게 거짓을 고하면서 이미 수명이 10년쯤 깎인 느낌인데, 설상가상으로 수연이 싸움을 걸어오자 이제는 거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사실은 무슨, 그대가 모함한 거잖아! 이제는 아예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수연은 평소의 뚝뚝한 평정을 잃고 예빈에게 삿대질까지 남발했다.

그녀는 류하의 무죄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고 싶었다

“모함이라니, 말을 삼가세요.”

예빈은 으르렁거렸다. 이제는 그녀도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맞아요, 사실 황후 전하가 저를 협박했어요, 저는 대장군을 월빈과 엮어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한 거예요’라고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그대야말로 말을 삼가세요. 아니, 오히려 삼가지 마시죠. 당장 폐하께 가서 그대가 거짓으로 고자질했다고 자백하세요. 그대한테 양심이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대가 뭔데 내 양심을 챙겨, 그대가 뭐라고 나한테 명령이야?!”

“윽!”

드디어 예빈이 미쳤다. 미칠 만도 했다. 사람이 극단적인 압력을 받으면, 극단적으로 망가지기 마련이다.

황제에게 가서 자백하라니, 그건 예빈에게 월빈 대신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물론, 예빈의 친정이 이름난 권세가임을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목이 실제로 날아가지는 않겠으나, 황제의 후궁을 모함한 죄는 아무리 다른 후궁이라도 가벼이 처벌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에도 사이가 나쁜 수연이 제게 지껄인다는 말이 자백을 권하는 내용이라니, 정말 깜찍했다.

너무 깜찍해서, 예빈은 수연을 힘껏 쳤다.

“예빈!”

말릴 틈을 놓친 하빈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훤아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뺨을 얻어맞은 수연은 사납게 냉소했다. 이쯤 되자 자기 혼자 이성을 붙들고 있는 건 억울했다. 그녀는 반격을 위해 달려들었다.

“그만, 둘 다 그만해요!”

훤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가 수연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하빈이 예빈의 팔을 붙잡았다.

후궁의 품위도, 귀족의 체통도 잊고 아주 현란하게 뒤엉킬 뻔했던 두 여인은 각자 친구에게 붙들려 가까스로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해비마마, 저도 딱 한 대만 치면 안 될까요?”

수연은 이를 악문 채 애원했다. 훤아는 벗의 간청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녀는 하빈의 품에서 미약하게 버둥거리던 예빈을 쏘아보며 엄숙하게 채근했다.

“예빈, 성빈한테 사과하세요. 같은 내명부의 여인에게 손찌검이라니, 이 무슨 추태입니까?”

예빈의 표정이 한층 포악해졌다. 그러다 수치심으로 구겨지며 바스러졌다.

“……미안합니다, 성빈.”

“하!”

수연은 뭉툭하게 실소했다. 그녀는 훤아의 말 한마디에 그나마 기세를 누그러트린 예빈을 경멸했고, 연민했다. 아마도 경멸이 연민을 압도했다.

“나한테 사과해 봤자 뭐합니까? 지금 그대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쪽은 따로 있는데.”

수연은 딱딱하게 비꼬며 훤아를 지그시 밀어냈다. 훤아는 수연의 폭력성이 조금 가라앉은 걸 느끼고 안도하며 팔을 풀었다.

“나는 무고한 적 없어요.”

예빈은 차갑게 고집했다. 자신의 결백이 보장되려면, 월빈은 끝까지 죄인이어야 한다. 나름대로 절박해진 그녀는 독기를 품고 저열하게 덧붙였다.

“남쪽의 계집들은 전부 보수적이고 인형처럼 얌전하다더니, 월빈이 그렇게 발랑 까졌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폐하로도 만족하지 못해 대장군에게 꼬리를 치다니. 안 그래요?”

노골적인 모독에 훤아는 창백해졌다. 하빈은 이마를 짚고 싶었다.

수연은 지금이라도 예빈을 한 대 갈길까, 각도와 거리를 계산하며 심각하게 공격을 고민했다.

“아직 혐의가 입증된 건 아니잖아요, 예빈.”

듣다 못한 하빈이 옆에서 중얼댔다. 뭐, 혐의가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모두가 생각하긴 했지만.

여인의 정절에 유독 집착하는 사회에서 제 시동생과 놀아났다고 고발당하는 순간, 그 고발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 여인의 목숨은 자동으로 위태로워졌다.

“입증되는 건 시간문제겠죠. 월빈이 실제로 죄지은 건 맞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그자가 대장군과 간통한 게 아니라 쳐도 그자가 감히 내명부에 남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술을 쓸 수 있다는 걸 숨기고 여태 궁에 있었는데.”

예빈이 서슴없이 쏘아붙이자 이번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연도, 친구의 자폭에 혀를 차던 하빈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현재 월빈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황제의 동생과 몰래 정을 통해 지아비요 주군인 황제를 배신한 죄. 두 번째, 여태 제국의 모두를 속여 온 죄.

사실, 두 번째 죄목은 부분적으로만 정확했다. 정말로 모두를 속인 건 아니고, 대부분을 속였다.

황제와 황후, 대장군과 일부 황제의 최측근들은 이미 류하의 신통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만, 황제와 황후는 절대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월빈의 이능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자는 적어도 제국에서 가장 높은 우리 둘을 속이지는 않았다고, 우리가 그자에게 함구를 명한 장본인이라고.

류하는 어떻게든 가장 극악한 죄인이 되어야 했다.

죗값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연인까지 잡아먹도록, 그녀가 온의 파멸을 보장하는 가련한 장기짝이 되도록,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야 한다.

설령 류하가 기적적으로 간통죄 혐의를 벗어난다 해도, 그녀가 실은 이종족 혼혈이며 체포를 피하고자 사술을 쓰려 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었다.

이종족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대륙에서 그녀는 이미 낙인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호위한 온까지 덩달아 구정물을 뒤집어쓸 만큼.

“성빈과 해비마마도 따지고 보면 그자에게 속은 거잖아요. 괘씸하지 않나요? 두 분이 그자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러니 차라리 옥사에 있는 그자한테 가서 따지세요, 성빈. 괜히 나 붙들고 성내지 말고.”

예빈은 싸늘하게 저격했다. 수연은 이를 악물었고, 나머지 후궁들은 이제야말로 그녀가 아까 못다 한 폭력을 시도할까 긴장했다.

그러나 수연은 그저 사납게 돌아섰다.

“그대야말로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세요.”

수연은 어깨 너머로 예빈에게 씹어뱉었다. 예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바르쥐었다. 수연이 곧장 혼잣말처럼 덧붙인 말은 예빈의 마음에 쓰리게 꽂혔다.

“질투에 눈이 멀어 날뛰는 꼬락서니하고는.”

정곡을 찌르는 경멸의 언어에 예빈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수연은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남았다.

“……아까 성빈의 얼굴 때린 거, 나중에 꼭 다시 제대로 사과하세요.”

훤아는 예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예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훤아는 예빈을 등지고 곧장 수연을 뒤따랐다. 문이 닫혔고, 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성빈! 성빈!”

훤아는 친구를 헐레벌떡 쫓아갔다. 해비를 모시는 궁녀들도 상전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재촉했다. 수연은 저를 부르는 말을 듣고 멈췄다.

“해비마마. 추한 꼴을 보여 드려서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성빈, 우선 내 처소로 가요.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야죠.”

상처의 치료쯤이야 본인의 처소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으나, 수연은 훤아의 뜻을 헤아리고 고분고분 그녀와 동행했다.

두 후궁은 한동안 조용했다. 훤아의 처소에 도착해 의원을 부르고 그 의원이 수연의 뺨에 난 울긋불긋한 찰과상에 연고를 바를 때까지, 그들은 당분간 말을 아꼈다.

“정말로, 정말로 월빈이 도깨비 혼혈일까요?”

의원과 궁인들을 모두 물리고 단둘이 남은 뒤에야 훤아는 양손을 맞잡아 비틀며 초조하게 속삭였다. 수연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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