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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9)화 (99/123)

99화

“헛소리라고요? 헛소리하는 쪽은 당신 같은데?”

“시끄러워요.”

“그리고 마마는 미칠 지경인 게 아니라 이미 미친 겁니다.”

“대장군, 그냥 같이 죽을래요?”

기가 막힌 온과 마음이 급한 류하가 서로 창살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자, 중간에 끼인 륜은 표정이 괴상해졌다.

아니, 얘네는 이 상황에 갑자기 웬 쌈박질이야?

“폐하, 월빈마마의 말은 듣지 마십시오. 부디 저 하나만 벌하시고 마마는 풀어 주세요.”

“폐하, 제발, 뭐든 하겠다니까요?!”

아, 머리 아파. 륜은 해탈할 뻔했다.

연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싸움판에 끼어 살짝 자괴감을 느끼던 그는 곧 사태의 심각성에 맞춰 자신을 추스르며 냉혹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둘 다 닥쳐.”

그는 일단, 침착하게 명했다. 일국의 황제가 쓰기엔 다소 비속한 언어였지만, 류하와 온은 전혀 지적하지 않고 그저 단숨에 조용해졌다.

온은 류하를 애타게 쳐다보았고, 류하는 필사적으로 륜에게 집중했다.

“상황의 주도권이 그대에게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예 흥미가 없는 제안이라고는 단언하지 않겠지만, 흥미만으로는 전부가 결정되지 않거든.”

륜은 류하를 보며 나긋하게, 잔인하게 타일렀다. 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

“그리고 아우님은.”

형은 동생의 다급한 부름을 뚝, 끊어 밟았다. 륜이 빙글 돌아 온을 마주했다.

“제발 조용히 있으세요.”

경고였다. 온은 저보다는 류하에게 징벌이 내릴까 두려워 이를 악물고 복종했다.

“그래, 그게 더 낫네요.”

륜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눈이 동생의 얼굴을 훑었다. 자신이 아까 류하를 자극하기 위해 갈겼던 뺨이 푸릇한 피멍을 머금고 있었다.

륜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냉정하게 돌아서며 어깨 너머로 말했다.

“죄인들끼리 도주 계획이라도 세우면 곤란하니, 재갈을 물려 놔야겠네요.”

차라리 자기가 혀를 깨물 테니 류하는 부디 내버려 두라고 온은 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한마디도 꺼내기 전, 륜은 싸늘하게 덧붙였다.

“특히 이쪽이 시끄러워.”

이쪽, 하며 그는 류하가 갇힌 방의 창살을 툭 쳤다. 피범벅이 된 손을 타고 울림이 전해지자 류하는 움찔했다. 온은 재차 이를 악물었다.

륜이 퇴장했다. 군졸들이 재갈을 들고 들이닥치기 전, 온은 재빨리 연인을 비난했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미쳤다고 폐하께 그런 말을 해요, 예?!”

“그럼 가만히 앉아서 네, 그냥 우리 둘 다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해요? 뭐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아니, 폐하께 살려 달라고 비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고발당한 것만 어떻게든 넘기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아니, 고발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살아요?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고요. 둘 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데 왜 둘 다 죽으려고 해요?”

“저는 못 빠져나갑니다, 저는 여기가 끝이에요, 당신이라도 살아야 한다고요!”

온은 벌컥 화를 냈다. 류하는 쳐다보았다. 늘 정중하던 사람, 늘 다정하던 사람. 그러던 그가 지금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어차피 5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버틴 게 기적입니다. 덤으로 살았던 시간이 그저 끝나는 것뿐이니 하나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은…….”

온이 애걸하자 류하는 울컥했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로 속삭였다.

“그대가 여태 살아서 나를 만난 게, 그대한테는 그저 덤이에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단지 우연처럼 얻어걸린 인연. 고작 그 정도의 마음일까. 그대는 고작 그런 심정으로 여태 나를 사랑했나.

아쉽지 않다니. 나를 연모한다면서, 그래 놓곤 떠나겠다면서,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온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을 만나 사랑한 시간이 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통틀어 가장 귀중한 나날이었다고, 제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털어놓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두고 혼자 저승으로 떠날 생각인데 그런 묵직한 고백을 전해도 될지 알 수 없어서, 망설였다.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전할걸. 당신의 입이 가로막혀 더는 내게 대답하지 못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다.

문이 열렸고, 군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류하의 피 묻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목을 앞으로 모아 묶었다.

류하의 손은 나무 조각이 박혀 엉망이었다. 온은 본인이 찔린 것처럼 괴로웠다.

“가서 폐하께 아뢰라. 월빈마마의 손이 심하게 다쳐서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려.”

온은 창살 너머로 군졸들에게 명령했다. 투옥된 죄수 주제에 눈빛과 말투는 황족답게 고압적이라 군졸들은 머뭇댔다. 그중 하나가 뚝뚝하게 고했다.

“이미 폐하께 지시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곧 의원이 도착할 겁니다.”

온은 조금 놀랐다. 놀라움은 안도를 동반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과 비교했을 때, 너무 자그마한 안도였다.

“그래, 알겠다.”

온은 탄식처럼 중얼댔다. 류하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연인에게 눈을 흘겼다. 저기요, 나 때문에 저렇게 대놓고 일희일비하지 말란 말이야.

‘최악이야.’

류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맞물린 잇새로 재갈이 우그러졌다. 자신과 온을 번갈아 훔쳐보는 군졸들의 시선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다.

‘완전히 의심하는 눈치라고.’

아마 지금쯤 황제의 후궁인 자신과 황제의 동생인 온이 서로 부적절한 사이였다고 궁중에 소문이 적나라하게 퍼졌을 터.

온은 본디 궐내에서도 평판이 좋았으니 어떤 이들은 그가 누명을 썼다고 굳게 믿어 주겠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부단히 궁리할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과연 연기가 날 것인가, 하고.

류하는 두 번째 상황을 원치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과 온이 둘 다 결백하다고 믿어 주든 제가 온에게 일방적으로 접근했다고 곡해하든, 온은 모든 지저분한 혐의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러나 설령 온이 무죄라고 모두가 믿어 준다 한들, 그가 이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류하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 사실 확신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온도, 자신도 다 죽어 버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아아, 절대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죽더라도, 그대는 살아야 해.

“대장군님, 뺨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의원들이 도착했다. 한 명이 류하의 손을 살펴보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온에게 다가왔다. 온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다. 치료는 필요 없어.”

형에게 맞은 왼쪽 얼굴이 상당히 욱신댔지만, 굳이 이 통증을 멈춰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폐하의 명이셨습니다.”

의원이 불쌍하게 덧붙였다. 온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창살 뒤로 들어온 의원은 온의 퉁퉁 부은 뺨을 정성껏 세척하고 꼼꼼히 붕대를 붙였다.

치료가 끝난 뒤, 군졸들과 의원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쓸쓸한 옥중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

“류하 님.”

단둘이 남았음을 확인한 뒤, 온은 애달픈 저음으로 불렀다.

류하는 원망과 연정이 뒤섞인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았다. 재갈에 입이 막혀 마주 속삭일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저 덤인 적 없습니다. 고작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살아서 당신을 만난 걸 고작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어차피 5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버틴 게 기적입니다. 덤으로 살았던 시간이 그저 끝나는 것뿐이니 하나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은…….>

<그대가 여태 살아서 나를 만난 게, 그대한테는 그저 덤이에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5년 전에 마땅한 자리를 빼앗기고도 내가 비굴하게 살아남은 건 전부 당신을 위함이었어.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운명이었어. 나는 당신을 만나 사랑하기 위해 버텼던 거야.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연모한다고 말해 줘서 기뻤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제게 다가와 줘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언제나 그럴 거예요.”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며 당신을 생각했다. 땅에 닿기 전에 이파리를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지. 아아, 결국 미신이었다. 헛된 희망의 흔적만 남겼어.

“그러니 부디, 당신은 살아 주십시오.”

하지만 살 수 있을까? 온은 낙담했다.

누군가 모종의 이유로 류하까지 자신과 엮여서 파국에 빠트렸고, 온은 시동생과 바람났다고 고발당한 류하가 제 소망을 이뤄줄 수 있을지 걱정했다.

“저를 위해 폐하와 쓸데없이 흥정할 시간에 차라리 살려 달라고 애원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이번 일을 최대한 조용히 덮기를 원하실 겁니다. 당신은 잘만 하면 이혼 정도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제발 살아 주세요. 살아서 기억해 주세요.”

시끄러워. 헛소리는 그만둬. 듣고 있기 괴로워. 류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입가를 짓누르는 재갈을 저주하며 창살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온은 얼굴을 찡그렸다. 겨우 치료를 마친 류하의 상처가 다시 벌어질까 두려웠다. 그녀의 생채기가 자신의 중상보다 아팠다.

“살아서 저를 기억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계속 기쁠 겁니다.”

온은 간절히 속삭였다. 거짓을, 속삭였다. 류하가 저를 기억하길 바란다는 말은 허언이었다.

류하가 살아남아 상처를 극복하고 과거의 아픈 사랑은 전부 잊기를 원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기적 같은 말이 당신의 긴긴 여생에 찬란한 효과를 보였으면 좋겠다.

본심을 감추며 온은 류하를 설득했다.

타고난 이능을 사용해 황제에게 헌신하겠다니, 필요하다면 전장에서라도 구르겠다니, 안 될 말씀. 당신은 부디, 그렇게 희생하지 말지어다.

당신의 고국도 아닌 이 나라의 지저분한 황실 암투는 잊어.

황제와 황후가 자신을 죽이기 원하니 온은 별수 없이 죽음을 수용했지만, 류하를 위해서는 정반대를 원했다.

“연모합니다, 류하 님.”

온은 달게 고백했다. 과도하게 달아서 더욱 쓰렸다. 류하는 기어코 눈물을 툭 쏟았다. 뭉개진 흐느낌이 온의 심중에 고통으로 박혔다.

“진심으로, 전심으로 연모합니다. 보고만 있어도 즐겁습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살아 주세요. 저를 위해 경솔하게 행동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능을 미끼삼아 황제와 거래를 시도할 시간에 차라리 그 힘으로 혼자 도망쳐야지. 온은 자기 한정, 몹시 아둔하고 이타적인 연인 때문에 첨예한 비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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